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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탐구] 윤 대통령에 영향 미치는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 김영호 통일부 장관 

대북 강경론 주도하며 한·미·일 군사협력 강조해 논쟁 불러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이명박·윤석열 정부 외교·안보 정책 설계한 뉴라이트 브레인들
“정책은 패권의 전유물 아냐… 국론 분열·갈등 심화 초래” 지적도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왼쪽)과 김영호 통일부 장관(오른쪽)은 뉴라이트 지식인으로 이명박 정부 때 대북·외교 정책에 참여했다. 윤석열 대통령의 역사관에 영향을 준 대표 인물로 꼽힌다.
윤석열 대통령의 역사관은 취임 뒤에 다져진 게 아니다. 취임 전까진 구체적인 판단 근거가 부족했을 뿐이다. 다만 그가 어떤 역사관을 갖고 있었으며, 역사관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누구인지 가늠할 수 있는 힌트가 있다. 2022년 2월 25일 대선 후보 방송토론에서 한 발언을 통해서다.

“한·미·일 동맹이 있다고 해서, 유사시에 들어올 수는 있는 것이지만, 꼭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 발언은 “(한·미·일 군사동맹은) 유사시 한반도에 일본이 개입하도록 허용하는 것인데 하겠느냐”라는 심상정 정의당 후보의 물음에 대한 윤 대통령의 답이다. 전제로 한 것은 아니라고 확대해석을 경계했지만, 그 이후부터 최근까지도 ‘유사시 한반도 일본 군사 개입’ 가능성을 차단하거나 경계하려는 조치는 없었다. 묵인인지 동조인지는 확실치 않지만, 적어도 ‘반대’를 표명한 적이 없었던 건 팩트다.

윤 대통령의 이 같은 인식 형성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거론되는 인물들이 있다. 김태효 국가안보실 1차장과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다. 외교·안보 학자 출신인 두 사람은 뉴라이트 이론가로 꼽힌다. 특히 김태효 1차장은 이명박 정부와 현 정부의 정책 토대를 만들었다.

김 1차장이 학자 시절 내놨던 주장들은 윤 대통령의 언급과 거의 일치한다. 김 1차장은 여러 논문과 기고를 통해 일본과의 협력 관계를 군사 분야까지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신아세아연구소 외교안보연구실장으로 재직할 때 내놓은 논문 ‘한반도 유사시 일본의 역할: 미·일 신방위협력 지침을 중심으로’(2001년)의 한 대목이 대표적이다.

“일본이 한반도 유사 사태에 개입하는 것이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평상시 대북 억지력을 증대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북한의 입장에서 볼 때는 전쟁 상대국은 종전 2개국(한·미)에서 3개국(한·미·일)으로 확대되는 꼴이 되며, 이는 북한으로 하여금 남침 의도를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하게 하는 강력한 억제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김태효, ‘비핵·개방3000’·‘담대한 구상’ 설계


2006년 성균관대 교수 재직 시 쓴 논문(한·일 관계 민주동맹으로 거듭나기)에서 김 1차장은 아예 “자위대가 주권국가로서의 교전권을 사용하지 못하는 상태에 영원히 있어야 한다는 논리는 대단히 편협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평화헌법을 수정해 자위권을 확대하려는 일본의 주장과도 맥락이 같다.

김 1차장의 대일관은 뚜렷하게 우호적이다. 일각에선 이를 실리주의로 보기도 한다. 감상적인 민족주의보다 양보할 것은 양보하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실리를 취하는 게 낫다는 주장이다.

2015년에 쓴 ‘사과받는 나라와 사과하는 나라’라는 제목의 한 칼럼에서 김 1차장은 “한국과 일본이 서로 협력해 얻을 혜택이 안보와 경제 영역을 망라해 즐비한데도 그 필요성을 역설하려면 ‘친일’ 낙인이라는 크나큰 정치적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아쉬움을 토로했다. 당시는 한·일 위안부 협상을 두고 논쟁이 치열하던 때였다. 그로부터 4개월 뒤 박근혜 정부는 한·일 위안부협정에 서명했다.

북한에 대해선 강경한 입장을 숨기지 않는다. 2005년 5월 한 언론사 주최 북핵 관련 전문가 좌담회에서 그는 “전쟁과 무력 사용만은 안 된다는 생각은 신화이고 강박관념”, “정밀폭격에 따른 주가 폭락이 위험한지, 북한의 핵 보유로 한국 경제의 도산이 더 위험한지 생각해야 한다. 정밀폭격은 카드로만 존재해서도 안 된다”라고 주장했다.

그의 뚜렷한 대일·대북관은 이명박 정부에서 빛을 발했다. 서강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학교 대학원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고 돌아온 뒤 2002년 외교통상부 산하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로 정책 분야에 첫발을 내디뎠다.

2005년부터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는 2007년 대선 때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를 돕다가 이명박 정부 출범 후 불과 41세에 대통령실 초대 대외전략비서관에 기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이명박 정부 말기인 2012년에는 수석급인 대외전략기획관으로 승진하기까지 5년 내내 국제관계 분야의 정책을 입안했다.

지소미아(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 밀실 처리 논란에 휘말려 공직에서 물러난 뒤 교단으로 돌아갔던 그는 2021년 6월 정치 참여를 선언한 윤 대통령의 외교·안보정책을 자문하며 정책 설계에 참여한다. 윤석열 캠프 외교·안보정책본부를 거쳐 20대 대통령직인수위 외교·안보분과 인수위원으로 새 정부 정책 기조 수립에 일익을 담당했다.

국정원 고위 관계자는 김 1차장을 두고 “완벽한 보고서와 브리핑을 통해 이슈를 장악하는 능력이 있다”고 평가했다. 윤 대통령의 이념적 철학을 정책으로 만들어내는 탁월한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그가 이념 코드뿐만 아니라 윤 대통령과 정서적 코드가 맞는다는 평가도 있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 3000’, 윤석열 정부의 ‘담대한 구상’ 등의 대북 정책이 그의 작품이다. 또 김 1차장의 지론인 일본과의 안보 협력이나 한·미 동맹 강화와 같은 ‘자유 연대론’도 현 정부 핵심 기조가 됐다.

윤 대통령의 외교 순방에서 김 1차장이 직접 언론브리핑을 하는 모습은 대통령의 두터운 신임을 방증한다. 2022년 5월 18일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 관련 브리핑에 이어 한 달 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 현지 브리핑을 맡기도 했다. 같은 해 11월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G20 정상회의와 2023년 4월 윤 대통령의 미국 국빈 방문에도 수행하는 등 외교 순방에 늘 윤 대통령과 함께했다.

김영호, 좌파에서 우파로 전향한 뒤 브레인 역할


▎2006년 3월 22일 자유총연맹 자유센터에서 열린 강연 ‘해방 전후사와 6·25 전쟁의 재인식’에서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강연하고 있다. / 사진:자유총연맹 유튜브
또 다른 인물로는 김영호 통일부 장관이 있다. 김 장관은 1959년생으로 서울대 외교학과를 나와 미국 보스턴대학교, 버지니아대학교 대학원에서 국제정치학 석·박사를 취득했다. 1990년대 중반 귀국해 세종연구소 상임객원연구위원으로 재직하다가 성신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로 임용됐다.

김태효 1차장과 마찬가지로 김 장관도 ‘MB맨’이다. 2011년 이명박 정부에서 대통령실 통일비서관으로 일했다. 김 장관은 역대 우리 정부의 통일방안에 부정적이면서 독자 핵무장을 주장하는 등 강경파로 꼽힌다.

김 장관은 청년기에 좌파 지식인이었다. 1984년에 ‘운동권 서적’을 펴내던 도서출판 녹두의 대표를 맡았다. 그가 대표를 맡는 동안 이탈리아 공산주의자인 안토니오 그람시의 책을 번역했다. 민주화운동이 절정으로 치닫던 1987년 4월에는 소련 사회과학원에서 펴낸 [세계철학사]와 제주 4·3사건을 다룬 이산하 시인의 대서사시 [한라산]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런 활동 때문에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돼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 자격정지 3년을 선고받기도 했다. 1988년 출옥 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게 우익으로 전향한 계기가 됐다. 미국에 머무는 동안 6·25전쟁 연구에 몰두하면서부터다.

당시 운동권 안에선 미국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시카고대 석좌교수)가 1981년에 펴낸 [한국전쟁의 기원]을 신봉했다고 한다.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원인이 공산주의자들의 야욕에 있다고 본 전통주의 시각을 벗어나 외부 요인이 아닌 일제강점기부터 한반도에 형성된 내부적 사회 모순에 의해 촉발됐다고 주장했다. 그는 미국이나 한국의 전쟁유도설도 주장했다.

김 장관은 2006년 우파 지식인들이 펴낸 [해방전 후사의 재인식>에 참여해 커밍스의 한국전쟁 해석을 반박했다. 김 장관이 2권에 실은 한국전쟁에 관한 논문에는 미국에서 새로 발굴된 자료를 근거로 한국전쟁이 한반도를 적화하려는 북한의 시도로 발발했다고 주장했다. 기존 통일방안에 대해서도 신랄하게 비판했다. 김 장관은 “지구상에 정치적으로 이질적인 국가가 국가연합이나 연방국가를 구성한 전례가 없다”며 “남북한은 체제를 달리하는 한 어떠한 방식의 통일을 이뤄도 제대로 된 국가의 모습을 갖출 수 없다”고 단언했다. “북한의 ‘민족공조론’은 체제 문제의 중요성을 흐리기 위한 수사에 불과하다”라고도 했다.

“일방의 견해가 국가 정책 근간되는 것 경계해야”

이는 김영삼 정부가 제시한 민족공동체통일방안이나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 등 역대 정권들이 추진해온 대북정책을 ‘낭만적 민족주의’라고 평가절하했다. 대신 김 장관은 ‘분리를 통한 통일전략’을 실효성 있는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의 대북 통일관은 북한 체제 경쟁을 통한 흡수통일에 가깝다. 이 때문에 통일부 장관 후보 시절 남북관계발전법과 ‘대한민국의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도서로 한다’는 헌법 제3조를 부정한 발언이란 비판을 받았다.

김 장관은 뉴라이트의 싱크탱크인 ‘뉴라이트 싱크넷’ 운영위원장을 맡으며 뉴라이트의 손꼽히는 이론가로 통한다. 2005년에 출범한 뉴라이트 역사단체인 ‘교과서포럼’에서도 활동했다. 김광동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과 김태효 1차장, 한오섭 대통령실 국정상황실장, 김종석 규제개혁위원회 민간위원장 등도 뉴라이트 활동 경력이 있다.

2008년에는 뉴라이트 연구자인 안병직 서울대 명예교수와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 노재봉 전 국무총리 등과 논문집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을 공저했다. 여기서 김 장관은 ‘국가론의 관점에서 본 대한민국 건국의 특징과 의의’라는 글을 통해 “구한말 조선은 서구의 팽창에 직면해 근대국가로 거듭나지 못하였기에 메이지유신을 통해서 근대국가로 변신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말았다”고 주장했다.

김 장관의 주장들은 여러 논쟁을 낳았다. 일본의 강제침탈이 우리 탓이란 식민사관과 맥락을 같이하기 때문이다. 앞서 윤 대통령이 김태효 1차장의 인식과 유사한 주장을 펼친 것처럼 김 장관의 역사 인식을 윤 대통령이 차용한 듯한 장면도 있다. 지난 3·1절 기념사에서 윤 대통령이 “우리는 세계사의 변화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국권을 상실하고 고통받았던 우리의 과거를 되돌아봐야 한다”고 언급한 대목이다. 이는 김 장관이 [대한민국 건국 60년의 재인식]에 게재한 글의 한 대목 “구한말처럼 세계사적 차원에서 전개되고 있는 새로운 변화를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 민족은 또 다른 어려움에 직면할 수 있다”(690쪽)고 한 것과 일치한다.

익명을 원한 한 역사학자는 “학자로서 내놓은 학문적 성과가 논쟁의 대상이 되는 건 당연하고 바람직한 일”이라면서도 “다만 일방의 견해가 국가 정책의 근간이 되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정책이 보편성과 균형을 잃고 패권의 전유물로 전락하면 국론 분열과 사회 갈등 심화의 늪에서 빠져나오기 어렵다”고 강조했다.

- 유길용 월간중앙 기자 yu.gilyong@joongang.co.kr

202311호 (2023.1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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