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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1)] 조선시대 ‘비선 실세’ 책방과 방폐 

책방(낭청)은 지방관의 비공식 수행원… 원님 사랑 받는 기생 일컫는 방폐도 폐단 

책방, 뇌물 제공·수수 역할 도맡고 관청 회계장부까지 검토해 말썽
방폐가 지방관 권세 믿고 뇌물 받거나 인사에 간여해 문제 되기도


▎책방을 낭청이라고 한다는 것은 [춘향전]을 통해 알 수 있다. 사진은 배우 김지미 주연 영화 ‘춘향전’ 포스터.
2023년 봄 세상을 떠난 가수 현미가 부른 노래 중 ‘몽땅 내 사랑’이라는 곡이 있다. 1967년 발표한 이 곡의 가사 첫 부분은 이렇다. “길을 가다가 사장님 하고 살짝 불렀더니, 열에 열 사람 모두가 돌아보네요. 사원 한 사람 구하기 어렵다는데, 왜 이렇게 사장님은 흔한지 몰라요. 앞을 봐도 뒤를 봐도 몽땅 사장님.” 대중가요는 당대 사회의 분위기를 잘 전해주므로, 이 노래를 통해 이 시대에 ‘사장님’이 벌써 대중적 호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노래가 나온 지 50년이 더 지난 지금, 사장이라는 단어에서 회사의 책임자라는 의미는 거의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사장이라는 단어는 CEO라는 영어로 바뀌었고, 이제 사장님은 상대방을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 됐다. 요즘 웬만한 가게에서 조금 나이가든 손님에 대한 호칭은 대개 ‘사장님’이나 ‘사모님’이고, 좀 더 큰 매장에서는 ‘고객님’이 됐다. 한동안 쓰이던 ‘선생님’이라는 남자에 대한 호칭은 이제 점차 줄어드는 것 같다.

현재는 거의 쓰는 사람이 없지만, 한때는 일반직 6급 공무원의 직급인 ‘주사’를 호칭으로 쓴 적도 있다. 공무원이 아닌 사람들끼리, 상대방의 성에 주사를 붙여 ‘김 주사’, ‘이 주사’라고 부르는 것을 흔히 볼 수 있었다. 이렇게 관직의 명칭이나 특정한 자격을 일반적 호칭으로 쓴 것은 오래됐다. 정3품과 종2품의 벼슬아치를 이르던 말인 ‘영감’이 나이 먹은 남자를 일컫는 말이 된 것도 그런 예의 하나다.

‘낭청(郎廳)’은 정3품에서 종6품 사이의 벼슬을 말하는데, 이 벼슬 이름을 엉뚱한 데서 썼다. 조선 후기 지방관으로 부임하는 원님들은 자신이 아는 사람을 사적으로 데리고 가서 비서 역할을 맡겼다. 역사에서는 이런 사람을 ‘책방(冊房)’이라고 말하는데, 이들을 부를 때는 낭청이라고 했다. 예를 들어 이씨 성을 가진 책방을 부를 때 ‘이 책방’이라고는 부르지 않고, ‘이 낭청’이라고 불렀다.

책방을 낭청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공식 기록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렵다. 조선시대 각 고을 원님들은 모두 책방을 데리고 갔으므로, 19세기 한 세기 동안에만 수천 명의 책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들 책방에 관한 내용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고, 또 이들을 부를 때 낭청이라고 했다는 사실도 잘 모르고 있다. 책방을 낭청이라고 한다는 것은 [춘향전]을 통해 알 수 있으니, 만약 [춘향전] 같은 소설이 없었다면 책방의 호칭이 낭청이었다는 사실이 후대에 전해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춘향전'에 등장하는 낭청이라는 호칭

지방관의 비공식 수행원인 책방은 책객(冊客), 아객(衙客), 책실(冊室) 등 몇 가지 다른 이름으로도 불렸다. 언제부터 이런 제도가 생겼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영조 초기 기록에 이미 나타나므로 적어도 18세기 초부터는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책방에 관한 기록이 18세기 말부터 자주 나오는 것으로 보면 이 시기에 이르러 상당히 보편적 제도로 자리 잡았음을 알 수 있다.

먼저 책방에 관한 조선시대 기록 두 가지를 보기로 한다. 하나는 윤기(1741~1826)의 [무명자집]에 들어 있는 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정약용(1762~1836)의 [목민심서]에 들어 있는 것이다. 윤기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친인척이나 오랜 친구 중에 지방으로 부임하는 사람이 있으면, 따라가서 함께 생활하는 자가 반드시 있다. 세상에서는 이를 책방이라고 말한다. 대체로 지방관은 혼자 있기가 어려우니, 반드시 책객을 데리고 가서 형제나 아들 또는 조카같이 친하게 대해 준다. 아전과 하인을 통솔하는 일, 서울로 뇌물을 보내는 일, 공공사업을 감독하는 일 등을 그에게 맡겨서 자신이 할 일을 시킨다. 그리고 외부의 사정을 몰래 살피도록 하여 정보를 많이 얻는다.”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책객을 두지 말아야 한다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즈음 관청의 풍속 중에 책객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회계를 맡아서 장부의 기록을 검사하는데, 이는 법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관청의 회계는 사적이건 공적이건 모두 기입하는 것으로, 아전과 하인들도 관련되지 않는 사람이 없다. 그러므로 직위도 없고 명목도 없는 사람에게 회계 전체를 관리하는 권한을 주어, 돈을 관리하고 장부를 기록하는 아전이나 하인과 다투게 하는 것이 어찌 이치에 맞는다고 하겠는가.”

두 사람은 거의 같은 시기에 살았고, 조선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지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인물들이므로, 이들이 말하는 책방(책객)의 문제가 정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18세기 인물인 임성주도 책방에게 회계를 맡기지 말라는 말을 한 것으로 보면, 책방이 회계에 간여하는 문제는 일찍부터 논란이 있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앞에서 본 내용을 통해 책방을 정의해보기로 한다.

첫째, 책방은 정식 관원이 아니다. 지방에 부임하는 지방관이 사적으로 데리고 가는 사람으로, 대부분 지방관의 친구나 친척이다.

둘째, 책방은 처음에는 지방관의 말동무를 해주는 정도의 역할이었다. 그러나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고을의 정보를 수집하는 일을 맡는다든가, 심지어 지방관의 업무를 대신 수행하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방관이 서울의 윗사람에게 뇌물을 바치는 일과 아랫사람으로부터 뇌물을 받는 일을 주로 책방이 맡아서 처리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 책방은 관청의 회계장부를 검토하는 일을 맡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자연스럽게 회계 부정에 연루되는 일이 생겼다.

이상의 몇 가지로 책방이라는 존재가 무엇인지를 모두 설명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책방이 이런 역할을 하는 사람이었다고 보면 될 것이다. 정약용이 정확하게 지적했듯이 책방은 ‘직위도 없고, 명목도 없는 사람’이다. 이처럼 책방은 공식적 직책이 아니므로 역사 기록에 등장하는 일이 많지 않아서 실제로 책방이 무슨 일을 하면서 지냈는지를 밝히기는 쉽지 않다.

공적 행정에 간여하고 이권에 개입

책방은 조선시대 여러 기록에 나타나지만, 대부분 부정적 면이 강조되고 있을 뿐이다. 영조 12년(1736) 임금이 ‘지방에서 책방이 폐단을 일으킨다’는 말을 한 적이 있으니, 이때 이미 책방의 문제가 드러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책방과 관련된 조선시대 기록은 대체로 비리에 연루된 것인데, 지방관의 묵인 아래 비리를 저지르기도 하지만, 책방이 독자적으로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도 했다. 이러한 예는 상당히 많은데, 그중 몇 가지를 보기로 한다.

정조 14년(1790) 평안도 감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영변 고을 책방의 비리가 여러 가지 나열돼 있다. 이 책방은 고을 아전을 임명하는 일에 간여해 뇌물을 받고, 부유한 사람들이 아전 자리를 차지할 수 있도록 했으며, 백성들로부터 좁쌀 180석을 구입하면서 구매대금의 반만 줘 500냥 이상을 착복했다.

순조 8년(1808) 경기도 암행어사가 올린 보고서에는 포천현감 허임에 대한 평가가 있는데, 허임은 그저 착하기만 하고 다스리는 데는 일정한 규율이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남씨 성을 가진 책방이 뇌물을 끌어 모으고 정사에 간여해 포천 고을에는 ‘남씨 현감 허씨 책방’이라는 노래가 퍼졌다는 보고 내용도 있다. 그리고 같은 해 충청도 암행어사 보고서에는 남포현의 권세가 모두 책방에게 있어서 재판 결과나 아전 임명 등이 모두 책방에게 달렸다고 했다.

책방의 문제는 고종 때까지도 계속돼 암행어사 보고서에 책방의 비리가 자주 등장한다. 고종 11년(1874) 충청도 암행어사의 보고서에는 서천 군수가 간사한 책방과 협잡해 백성의 재물을 갈취한 내역이 자세히 나와 있다. 그중 몇 가지를 보면 두 집안이 화목하지 않다는 것을 트집 잡아 두 집에서 700냥의 뇌물을 받고 무마해준 일이 있고, 절을 헐겠다고 협박해 승려로부터 1000냥의 뇌물을 받기도 했으며, 물건을 사고는 값을 주지 않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백성의 돈을 뜯어냈다. 군수가 이런 악행을 저지를 때 책방이 도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고종 29년(1892) 전라도 암행어사의 보고서에도 책방의 문제가 등장하는데, 만경 현령은 관직에 있은 지 1년 동안 모든 일을 책방에게 일임했고, 옥과 현감도 모든 일의 결정을 책방에게 맡기고 자신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또 고종 41년(1904) 평안남도 관찰사의 보고에 따르면 영원 군수는 4년 동안 모든 일을 책방에게 맡겨 백성들이 소요를 일으키기에 이르렀다고 했다.

이처럼 200년이나 되는 동안 끊임없이 책방의 문제가 드러났지만, 조선이 끝날 때까지 지방관이 책방을 데리고 부임하는 일이 계속됐다. 그리고 이 지방관의 사적 개인 비서가 각 지방의 공적 행정에 간여하고 이권에 개입하는 일이 끊임없이 벌어졌다.

앞에서 역사 기록에 나타나는 책방을 살펴봤는데, 이런 기록을 통해서는 책방의 구체적 모습을 알아내기가 대단히 어렵다. 또한 대부분의 자료가 책방의 비리를 적발해놓은 내용이므로, 책방의 부정적 면을 주로 기술해놓았다. 게다가 당대 사람들은 책방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어 따로 책방에 대해 설명해놓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므로 역사 기록만을 통해 책방이 어떤 일을 했는지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비선’인 만큼 부정적 이미지가 대부분


▎다산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책객(책방)을 두지 말아야 한다고 적었다.
책방의 일상을 서술해놓은 자료를 찾기란 매우 어려운데, 이런 자료로 소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이광수의 [일설춘향전]이나 홍명희의 [임꺽정] 같은 소설에 책방이 등장하지만, 이는 근대소설이다. 19세기 소설 중 책방이 등장하는 작품으로는 [춘향전]이 있다. [춘향전]에는 두 명의 책방이 나오는데, 한 명은 이도령의 아버지가 데리고 온 책방이고, 다른 한 명은 그의 후임인 변사또가 데리고 온 책방이다. 작품에서 책방이 등장하는 대목을 잘 읽어보면 책방이 구체적으로 어떤 존재였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도령의 아버지는 이도령이 책을 열심히 읽는다는 말을 하인에게 듣고는 ‘책방 조 낭청’에게 자신이 선조의 무덤을 좋은 자리로 옮겼더니 아들이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말을 한다. 그런데 책방 조 낭청은 이 한 대목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책방이 어떤 일을 하는지 알아보기에는 부족하다. 다만, 두 사람이 나눈 얘기가 매우 사적인 것으로 보면 책방과 이도령 아버지가 스스럼없는 사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변사또의 책방은 상당히 여러 장면에 등장하는데, 이를 통해 19세기 책방의 역할이 무엇인지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 이야기의 진행 순서대로 변사또의 책방이 등장하는 대목을 보기로 한다.

춘향이 관가에 잡혀 오자 변사또는 책방 이 낭청에게 춘향의 인물이 어떤지 평가해보라고 하며 “이 사람, 이 낭청. 춘향의 소문은 그리 높더니 지금 보니 유명무실이로군”이라고 떠보듯이 말한다. 앞에서 이도령 아버지의 책방도 ‘조 낭청’이라고 했고, 변사또도 책방을 ‘이 낭청’이라고 불렀으므로, 당시 책방에 대한 호칭이 ‘낭청’이었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소설에서 변사또의 책방에 대해 언급한 대목을 보면 “이 낭청이라는 자는 서울서부터 쓰던 인물로, 크고 작은 일을 이 낭청과 의논하면 콩을 팥이라 하여도 곧이듣는 터이다”라고 했다. 변사또가 서울에 있을 때도 데리고 있었고, 또 변사또의 비위를 잘 맞추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변사또와 이 낭청의 대화를 통해 변사또가 평안도 여러 지방에서 근무할 때도 이 낭청이 책방으로 따라다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변사또의 책방에 대해서는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고리”라든가 “누구에게나 두루두루 좋게 대하는 사람”이라고 해 줏대도 없을 뿐 아니라 남의 비위를 잘 맞추는 사람이라고 했다.

책방은 과거에는 급제하지 못한 인물로, 지방관을 따라다니면서 그의 잔심부름을 해주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지방관의 의도를 미리 알아차려 그 일을 처리하고, 또 지방관이 직접 하기 어려운 일은 자신이 대신해 지방관의 이익을 챙겨주는 일을 맡았다고 하겠다.

조선 후기 지방관에게 일어나는 문제 중 하나로 방폐(房嬖)가 저지르는 비리를 들 수 있다. ‘방폐’는 원님의 사랑을 받는 기생을 가리키는 말인데, 방폐가 지방관의 권세를 믿고 뇌물을 받거나 인사에 간여해 문제가 되는 일이 많았다. 그런데 이 방폐가 책방과 함께 짝을 지어 비리를 저지르는 일도 있어서 “책방이 고을을 다스리는 일에 간여하고, 방폐가 권세를 부리는 일이 있다.” “고을의 일에 책방과 방폐가 중간에서 농간을 부린다.” 또는 “방폐와 책방이 뇌물 받는 문을 활짝 열어놓았다.” 등등의 기록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원님에게 사랑을 받는 기생이 구체적으로 어떤 비리에 관련됐는지 자세히 기록한 문서는 찾아보기 쉽지 않다. 그런데 방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이권을 차지하는지 알 수 있는 내용이 [춘향전]에 나온다. 춘향이 변사또의 수청을 거절하고 감옥에 갇힌 뒤 새로 옥선이라는 기생이 변사또의 수청을 든다. 변사또는 옥선에게 몹시 반해 밤낮으로 이 기생을 끼고 놀면서 여러 가지 이권을 주는데,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책방과 기생이 손잡고 비리 저지르기도


▎조선 후기에는 원님의 사랑을 받는 기생이 책방과 짝을 지어 비리를 저지르는 일도 있었다. 사진은 신윤복이 그린 ‘연소답청’. 한량이 기생에게 담뱃대를 건네고 있다.
“남원 읍내의 크고 작은 일을 옥선에게 먼저 청탁하면 백발백중 영락없고, 변사또가 옥선의 아버지는 군관의 우두머리를 시켰으며, 옥선의 오빠는 서쪽 창고의 책임자를 시켜주었다. 옥선의 재산은 볍씨 열 섬을 뿌리는 정도 넓이의 논과 보름 정도 갈아야 하는 넓이의 밭이 있으며, 그 밖에 집안의 기물이 5000~6000냥 정도이다.”

소설 속 내용이지만, 지방관이 기생에 빠져서 이런 정도의 이권을 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찍이 다산 정약용은 방폐의 폐단을 말하면서 지방관으로서 이 문제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를 말한 적이 있다. 정약용은 “여색을 조심해야 한다. 방폐는 뜻을 거칠게 하며, 정사를 어지럽게 하는 것이니 무릇 방폐가 있는 자는 그 기생이 뇌물을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에 관계없이 모두 죄가 있다”고 강하게 말했다. 지방관으로 부임해 기생을 가까이하는 것 자체가 잘못이라는 것이다.

정약용은 책방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회계를 보는 아전들이 속인다고 하더라도 그 손실은 1년에 100냥을 넘지는 않는다. 그런데 책방에게 1년 동안 들어가는 경비가 300~400냥은 된다.” 이 말은 책방이 장부 검사를 잘해 100냥을 절약한다고 하더라도 책방에게 들어가는 경비를 생각하면 고을 경비가 200~300냥이 더 드는 셈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명목도 없고 실리도 없는 책방을 마땅히 없애야 한다는 것이 정약용의 주장이었다.

책방은 공식적 직책이 아닌 만큼, 지방관이 데리고 다니는 사적 개인 비서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사람을 5품이나 6품 벼슬의 명칭인 낭청이라고 부른 것은 참으로 가소로운 일이다. 이처럼 명목과 실제가 맞지 않는 일이 오랜 기간 계속되면서 사장이 아닌 사람을 사장님이라고 부르는 현재에 이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요즘 말하는 ‘비선’이나 ‘비선실세’의 원조가 조선시대 책방인지도 모르겠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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