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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4)] 인물독립운동사 '기려수필' 기록한 송상도 

“식민지 민초들의 저항이 춘추 정신이다” 

스승 김영주로부터 명나라 기려도사 이야기 듣고 발로 뛰며 항일 애국지사 행적 채록
광복 이후 망명지사 보완하다 출간 못하고 미완으로… 정부 독립유공자 판단 자료 활용


▎기념사업회 송원덕 사무국장이 송상도 지사의 추모비를 찾아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 송의호
"대를 이어 벼슬한 신하나 권세가 중 충심이나 절의가 있는 사람, 그밖에 의열(義烈)이 우뚝한 사람은 역사에 기록되고 야사(野史)에 실려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초야의 미천한 이들은 전해줄 집안도 채록할 사람도 없어 궁벽한 시골에서 썩어 없어져 틀림없이 눈 속 기러기 발자국처럼 흔적조차 없어질 테니 안타깝고 탄식할 일이 아닌가! 그래서 이런 사람의 기록을 더 수집해 숨겨진 사실을 밝히는 [춘추(春秋)]의 뜻을 붙인다.”

인물로 본 항일투쟁사인 [기려수필(騎驢隨筆)]의 저자는 이렇게 집필 동기를 밝히고 있다. 그는 역사의 주인공을 이 땅에 묵묵히 살다가 불의를 보고 바로 일어선 민초들이라 보았다. 그들이 침략자 일본에 끝까지 항거해 독립을 쟁취하는 것이야말로 공자가 의리와 명분을 바로잡기 위해 써서 남긴 [춘추]의 정신임을 만천하에 천명한 것이다.

[기려수필]의 저자는 기려자(騎驢子) 송상도(宋相燾, 1871~1946) 지사다. 민족의 기자를 자임한 지사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필자도 그의 흔적이 남은 경북 영주를 찾아갔다. 먼저 들른 곳은 영주시 중앙로 사회적경제지원센터 앞 추모비 공간이다. 일대는 주변을 정비하는 공사로 추모비만 둔 채 온통 바닥이 파헤쳐져 있었다. 사단법인 기려자송상도지사 기념사업회 송원덕 사무국장이 현장을 안내했다. “이 추모비는 1987년 시민 3만3000여 명이 성금을 내 본래 공공도서관 경내에 세워졌습니다.” 그 뒤 도서관은 옮겨가고 지금 시설이 들어섰다. 추모비는 둘로 이뤄져 있다. 왼쪽은 지사가 남긴 다른 유고 [조선왕조사(朝鮮王朝史)]의 위에 국사편찬위원회가 펴낸 [기려수필] 책을 세운 모습으로 형상화했다. 책 뒷면엔 박영석 전 국사편찬위원장이 추모글을 썼다.

오른쪽 돌은 국가보훈처 추모비다. 국사편찬위원장 추모비엔 지사의 업적이 이렇게 새겨져 있었다. “이러한 때 명청(明淸) 교체 후 나귀를 타고 돌아다니며 명말(明末) 충신의 사적을 수집했던 중국 기려도사(騎驢道士) 행적에 크게 감명받은 지사는 우리나라 애국열사의 사적을 편찬할 큰 뜻을 품고 죽장망혜(竹杖芒鞋)에 괴나리봇짐을 짊어진 채 전국 팔도를 돌며 순국선열의 유가족 혹은 친지를 방문하여 자료를 수집하셨으니 어찌 총검 들고 일제와 직접 싸운 것만 독립운동이라 할 수 있으랴.”

채록한 한지, 노끈과 같이 꼬아 숨겨


송상도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194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삼천리를 누비며 애국지사의 행적을 조사·수집하고 정리·기록한 ‘식민지 종군기자’였다. 대나무 지팡이에 해진 짚신을 신고 괴나리봇짐을 맨 그는 누추한 과객의 행색이었다. 그는 스스로 ‘기려자’라 불렀다. 이는 ‘기려도사’를 따른다는 뜻이다.

송상도는 애국지사의 행적이 신문에 실리면 곧바로 현지를 찾아가 유가족이나 친지, 관계자를 만나 자세한 내용을 채록했다. 한 번 집을 나서면 6개월 길게는 3년 만에 돌아오는 때도 있었다. 그는 35년간 이렇게 일제 감시를 따돌리며 기록을 남겼다. 당시 이야기는 지사를 곁에서 모셨던 며느리(김창규)가 박하식 소설가에게 남긴 생전 회고에 남아 있다. “아버님은 한복 한 벌 돌돌 말아 괴나리봇짐 지고 나가면 계절이 바뀌어 오곤 했지요. 찾아오는 손님은 다 거지 행색이어서 빨래를 수없이 하고, 새 옷을 짓기도 했어요 (…) 시아버지 원고 뭉치를 콩 단지에 넣었다가 땅에 파묻었다가 숨기느라 고생했지요.”

추모비를 뒤로 하고 송상도 지사의 생가터를 찾아갔다. 동쪽으로 2.4㎞ 떨어진 휴천지구 도시개발구역 ‘기려자 공영주차장’ 안이다. 기념사업회가 주차장 끝에 표지석을 세웠다. ‘35년 길 위의 여정, 역사가 되다.’ 송원덕 사무국장이 표지석 뒤 야산을 가리켰다. “일대는 야성 송씨 집성촌입니다. 본래는 저 위쪽에 지사의 묘가 있다가 1992년 대전현충원으로 옮겨졌지요.” 표지석 옆 경로당도 기려자란 이름이 붙어 있다.

송 사무국장은 또 다른 일화를 전한다. “지사는 며느리가 지어 준 옥양목 새 옷을 입고 집을 나선다고 해요. 괴나리봇짐에는 휴대용 벼루가 있었고 (…) 현지에 도착해 애국지사 이야기를 들으면 일경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자기만 아는 초서(草書)로 적었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내용을 적은 한지를 노끈과 같이 꼬아 숨겼다고 해요. 그런 뒤 오랜만에 집에 돌아오면 노끈을 풀어 종이를 인두로 하나하나 편 뒤 정서(正書)했다고 전합니다. 정리한 자료는 단지에 차곡차곡 넣어 땅에 묻었다고 하지요.”

송상도는 어떻게 중국 기려도사 이야기를 알게 됐을까? 송상도는 24세인 1895년 무렵 탄당(坦堂) 김영주(金永冑)를 스승으로 모셨다. 김영주는 본래 충청도 사람이지만 이 무렵 송상도가 살던 영주로 이사 왔다. 김영주는 기호학파 갈래인 위정척사를 내세운 화서학파 출신이다. 탄당은 송시열의 9대 손인 송병선의 제자였다. 영주에 자리 잡은 김영주는 그 무렵 제자들에게 기려도사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었다고 한다. “옛날 토적인 이자성이 병사를 일으켜 대궐을 침범하자 명나라가 드디어 멸망했다. 위로는 황제로부터 아래로 선비와 백성에 이르기까지 나라를 위해 죽은 사람이 많았다. 이후 오랑캐인 청나라가 들어와 머리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머리를 깎으면 살고 깎지 않으면 죽는다’고 했다. 한 선비가 죽는 게 두려워 머리를 깎았으나 마음속에는 오히려 명나라를 그리는 충심이 있었다. 이후 그는 이름을 숨긴 채 나귀를 타고 천하를 돌며 절개를 지키다 죽은 사람의 사적을 모아 세상에 전했다. 사람들은 그를 기려도사라 불렀다.”

이 이야기는 나라 잃은 선비 송상도의 삶에 새 이정표가 됐다. 1910년 한·일병합은 큰 충격이었다. 여기에 항거하는 죽음이 잇따른다. 특히 송상도가 살던 경북지역에서는 의병장 출신 향산 이만도를 비롯해 이중언·류도발 등이 자결했다. 향산의 단식 순절은 안으로는 나라를 지키지 못한 책임을 자신에게 묻고 밖으로는 일제 강점의 부당성에 대한 가장 강렬한 저항이었다.

200명 넘는 애국지사 약전(略傳) 실려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 중인 [기려수필]의 원고 전체 5권 중 일부. / 사진: 독립기념관
한편으론 만주와 연해주로 망명해 무장투쟁을 펼친 사람도 있었다. 선비 송상도도 갈 길을 놓고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그의 고충은 [기려수필] 발문에 남아 있다. “나 송상도는 미약하여 순절하려 해도 마땅히 죽을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의거를 하려해도 지혜와 담력이 없으며, 해외로 나가 광복을 도모하려 해도 자금과 능력이 부족하니 모두 할 수 없다. 그러나 의리를 좋아하는 마음은 오히려 사라지지 않았다. 이에 감히 옛날 기려도사가 한 일을 본받아 호남·관서·기호·영남 등지를 돌아다니며 어려움과 수고로움을 회피하지 않고 늙어 죽을 때까지 널리 수집하고 찾아다녀 책을 완성했다.”

송상도는 순국열사가 간 길을 기록으로 남기는 일을 선택한 것이다. 그 결과물이 [기려수필] 5권이다. 강윤정 안동대 교수에 따르면 [기려수필]에는 200명이 넘는 애국지사의 약전(略傳)이 실려 있다. 여기엔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순국한 인물이 66명, 자결 등 순절한 사람이 52명이다. 관료도 있고 유학자도 있다. 송상도는 이들 사대부 이외에 여성과 포수·무당·노비·내시 등 이름 없는 민초들을 포함시켰다.

그는 인물을 선정할 때 신분의 귀천과 남녀를 구별하지 않았다. 또 이념이나 노선보다 그 사상이 지향하는 본질이나 진정성을 먼저 생각했다. 공산주의자나 아나키스트가 포함된 것은 그 때문이다.

생가터를 나와 다시 소수서원 옆 소수박물관을 방문했다. 학예사가 수장고에서 [기려수필] 관련 자료를 꺼내 왔다. 아직 내용 분석이 이루어지지 않은 부록 등이다. 자료와 함께 박물관이 제작한 지사의 갓 쓴 초상화도 보관돼 있었다. [기려수필] 5권의 원고는 천안 독립기념관에 보관돼 있다.

송상도가 증언 등을 채록한 방식이나 원칙은 엄정한 편이었다. 그는 충신과 열사가 있는 곳이라면 거리를 따지지 않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는 당사자의 집이나 친지 또는 명망 있는 선비를 만나 관련 자료를 수집하고 증언을 들었다. 거기에 덧붙여 관련 기록은 공정한지 나름 판단한 뒤 정리했다. 신뢰성 때문이다. 그리고 약전이 정리되면 인물의 끝부분에 자신의 평을 붙였다.

'기려수필'에 나오는 50여 명 유공자로


▎2017년 송동완 화백이 제작해 소수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송상도 지사 표준 영정./ 사진: 송의호
[기려수필]의 초고가 완성된 것은 1930년대 초반이다. 그는 초고를 완성한 뒤 책을 간행하려 했으나 때가 아니라는 판단이 들었다. 이 시기 전북 임실의 유학자 조희제도 항일운동가의 의행을 수록한 [염재야록(念齋野錄)]을 저술했다. 그는 1931년 원고를 완성한 뒤 1934년 편찬을 마쳤다. 그런데 1938년 [염재야록]은 일제에 발각된다. 조희제는 경찰서로 연행돼 혹독한 고문을 받았으며, 집으로 돌아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접했을 기려자는 자신의 원고를 땅속에 묻었다. 1945년 광복이 되자 송상도는 감추어둔 초고를 꺼내 드디어 간행 작업을 시작한다. 그런데 엮고 보니 나라 밖에서 활동한 지사들의 행적이 미비했다. 그는 추가 채록에 들어갔다. 마침 독립운동가들이 속속 귀국하고 있어 송상도는 서울로 올라가 해외에서 활약한 지사들의 행적을 수집하고 써나갔다.

그러나 1947년 송상도는 그 일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기려수필]은 미완으로 남아 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한국사료총서 제2집 [기려수필]을 간행했다. [기려수필]이 마침내 세상에 알려진 것이다.

[기려수필]은 지사가 35년 동안 직접 보고 듣거나 수집한 자료를 바탕으로 엮은 책이어서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국가가 독립유공자를 포상할 때 [기려수필]을 중요한 근거 자료로 채택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이미 [기려수필]에만 나오는 지사 50여 명이 독립유공자로 인정을 받았다고 한다.

송상도는 1871년 경북 영주시 휴천동 광승마을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학으로 한학을 익힌 뒤 25세에 탄당 김영주, 31세엔 동정 이정호 아래에서 배웠다. 기려자는 이후 권상익·곽종석·송준필·김창숙·전우 등 당대 민족의식이 투철한 거유(巨儒)들과 교류하면서 식견을 넓혔다. 그는 일찍이 경학(經學)보다 사학(史學)에 힘을 쏟아 중국 사서를 섭렵하고 [조선왕조사] [중국사] 등을 편찬하던 중 1910년 39세에 경술국치를 당한다.

조선판 '안네의 일기'


▎송상도 지사가 독립운동가 이야기를 채록하고 정리할 때 사용한 벼루. / 사진: 독립기념관
기념사업회는 2017년 국가보훈처·영주시 등과 함께 [기려수필]을 [안네의 일기]처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를 추진하는 학술대회를 열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사 박은식이 상하이에서 쓴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국내에 반입한 이유만으로도 체포·구금되던 암울한 시대에 200명이 넘는 독립투사 후손을 찾아다니며 기록을 남긴 송상도의 의로운 정신을 인류의 유산으로 지정하자는 논의였다. 이후 전문가들은 [기려수필]만이 아닌 황현의 [매천야록], 조희제의 [염재야록] 등을 묶어 추진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1990년 정부는 송상도 지사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한번 입에 오르거나 붓으로 쓰면 재앙은 바로 찾아든다. 그렇다고 그 사실을 수집해 세상에 전하지 않으면 늠름한 충성과 높디높은 절개는 사라져 들을 수 없게 될 것이다. 이것이 어찌 내 책임이 아니겠는가?” 역사를 공부한 기려자 송상도는 암울한 시대 이러한 사명감으로 민족의 충절을 기록으로 남겼다.

[박스기사] 이름 없는 여종의 행적까지 기록한 '기려수필'

을사오적 이근택의 매국 행위 저격한 비화 발굴

[기려수필]에는 이름 없는 여성 항일투사들이 등장한다. 그 중 ‘의비(義婢)’의 기록이 있다. ‘의비는 군부대신 이근택(을사오적 중 1인)의 부엌에서 일하는 여종’이었다. 11월 17일 밤 이근택이 궐에서 집으로 돌아와 처와 노비들에게 말했다. “오늘 조약은 내가 찬성했으니, 이로부터 나의 권세와 위엄이 크게 빛나 죽을 때까지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조금도 자신의 행동을 뉘우치거나 거리낌이 없었다.

마침 밥하는 여종 하나가 음식을 만들다가 그 말을 듣고 분을 이기지 못해 부엌칼로 도마를 치며 큰 소리로 꾸짖었다. “이놈이 저처럼 흉악한지를 내가 모르고 몇 년 동안 그 밑에서 일했으니, 분하고 한스럽다.” 그리고는 곧바로 일어나 부엌을 나가버렸다. 이근택과 자식들은 매우 부끄럽고 분해 그 여종을 잡아 벌주려 했다. 의비는 문을 나서며 크게 소리쳤다. “고을 사람들 모두 제 말좀 들으시오. 이른바 집주인이 저렇게 흉악해 내가 바른말로 꾸짖었는데, 도리어 나를 때리려 하니 여러분이 나를 구해 주시오.” 듣는 사람은 모두 통쾌하게 여겼고 이근택에 이를 갈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집의 침모(針母, 남의 집에 매여 바느질하고 품삯을 받는 여자)도 의비의 행동을 보고 역시 이근택의 집을 나왔다.

송상도는 글 끝에 의비를 이렇게 평한다. “예로부터 충의와 절개는 남녀 구분이 없었다. (…) 부엌에서 일하는 여종으로 충의와 반역을 구분할 줄 알아 한바탕 크게 꾸짖고 서릿발 같은 말을 뿜어내었다.”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1호 (2023.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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