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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 (12)] 조선에도 유행가가 있었다? 

'춘향전' 이별 노래 한 대목, 유행가로 이어져 

이도령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 유행가로 발전
19세기엔 시조(時調)가 유행가… 옛 노랫말을 새 선율로 즐겨


▎영화 [춘향전]에서 각각 이도령과 성춘향 역을 맡아 열연한 배우 이민우(오른쪽)와 김희선.
남녀공학이란 말은 이제 특별한 의미를 갖고 있지 않지만, 나이가 든 사람들에게는 그렇지도 않다. 필자는 1950년대 중반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3학년까지는 남녀가 같은 반이었지만, 4학년부터는 남녀를 분리해 반 편성을 했다. 그리고 모든 중·고등학교가 남녀를 분리해 학생을 모집했으므로, 남자와 여자는 따로 배우는 것인 줄로 알았다. 물론 몇몇 사범대학 부속 중·고등학교는 남녀공학이 있었고, 외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중·고등학교에서 남녀학생이 함께 공부한다는 것은 알았지만 말이다.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10년 가까이 남학생만 모여 배우는 학교를 다니다가 대학에 들어가 남녀가 같은 교실에서 수업을 듣게 되자 처음에는 꽤 어색했다. 고등학교까지 남녀를 분리해 교육하는 것에 어떤 효용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이제 와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것은 아닌 것 같다. 아직도 중·고등학교 중에는 남녀공학이 아닌 학교가 꽤 있는데, 특히 오래된 사립학교들이다. 1945년 이전에는 여학생의 입학을 허가하지 않는 전문학교나 대학이 있었지만, 이제 이런 대학은 없다. 한때는 여자대학이 많이 있었지만, 상당수가 남녀공학으로 바뀌었고, 지금은 몇 곳 남지 않은 것 같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학교는 이화학당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이화학당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1886년 5월 미국의 여성 선교사가 한 명의 학생으로 시작했다는 이화여자대학교는 세계 최대 여자대학으로 알려져 있다. 이 대학을 세계적 대학으로 키우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은 20여 년 동안 이화전문학교 교장과 이화여대 총장을 역임한 김활란 박사다. 워낙 유명인사이니 그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는데, 그중에는 19세기 조선 유행가와 연관된 것도 있다.

김활란이 이화여대 총장직에서 물러난 때는 1961년 9월로, 그의 나이 62세 때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군부가 당시 65세였던 교원의 정년을 60세로 낮췄고, 그도 총장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40년 이상 봉직한 이화여대에서 갑자기 물러나게 되니 주위에서도 아쉬움이 많았다. 김활란은 무거운 분위기의 이임식장에서 “내가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널 잊을쏘냐. 늴리리 늴리리 늴리리야”라는 노래를 불러 분위기를 바꿨다고 한다.

어려서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오랜 미국 유학생활을 했으며, 당대 최고 여성 지식인이었던 김활란과 이 노래는 어울리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는 이 노래로 가라앉은 분위기를 바꿨고, 그가 퇴임사에서 인용했다는 영국 시인의 시나 미국 군인의 말보다 이 노랫가락 가사로 그의 퇴임식은 더욱 빛났다.

김활란이 언제 어디서 이 노래를 배웠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렸을 때 자주 들어서 알고 있던 노래였을 가능성이 크다. 왜냐하면 퇴임식에서 부르기 위해 이 노래를 따로 배웠을 리는 없고, 또 이미 잘 알고 있는 노래라야 즉흥적으로 그 자리에서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라는 노래의 가사는 19세기 유행한 시조에도 나오고, 창부타령이나 산타령 같은 경기 소리에도 들어 있다. 이런 노래는 모두 당대 유행가로, 서민들이 즐겨 부르던 노래다.

김활란이 퇴임식서 흥얼거린 유행가의 기원

이 노래 가사가 언제 처음 나오는지 찾아보니 19세기 중반 서울 도서 대여점에서 빌려주던 [춘향전]에 실린 것이 가장 오래된 것이다. 아버지가 전라도 남원부사에서 중앙 동부승지로 승진해 남원을 떠나게 되자 이도령은 춘향과 이별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도령은 이별하는 자리에서 가지고 있던 거울을 춘향에게 주고, 춘향은 옥가락지를 이도령에게 주며 서로 잊지 않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한다. 그리고 이도령은 다음과 같은 이별 노래를 부른다.

“간다, 잘 있거라. 좋이 다시 보자, 좋이 있거라.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 잠 깨어 곁에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매라.”

이 노래를 들은 춘향은 아래의 노래로 화답한다.

“울며 잡는 소매를 떨뜨리고 가지 마오. 도련님은 장부라 돌아가면 잊으려니와, 소첩은 아녀잔 고로 못 잊을까 하노매라.”

현대인은 남녀가 이별하는 자리에서 서로 번갈아가면서 노래를 부르는 것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친구 사이에 헤어질 때 주고받은 한시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이도령과 춘향처럼 노래를 주고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시 [춘향전]을 읽은 독자들이 이런 설정을 특별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은 분명하다.

이도령이 부른 노래에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라는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을 보면 김활란이 퇴임식에서 부른 노래가 적어도 19세기 중반 이전부터 있었던 노래임은 확실하다. 이도령이 부른 노래는 굳이 현대어로 옮기지 않아도 그 내용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남자가 여자에게 불러준 이 노래 내용을 보면 이별하는 남녀가 부부 사이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추정할 수 있다.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는 여자가 부른 노래에서 분명해진다. 여자는 떠나는 남자의 소매를 붙잡고 울면서 가지 말라고 하는데, 남자는 붙잡는 손을 떨쳐내고 간다. 떠나는 것을 막을 길이 없는 여자는 남자가 잊지 않기나 바라지만, 남자가 떠나면 잊어버린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자신은 여자이므로, 남자처럼 쉽게 잊지는 못할 것 같다고 말한다.

가사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이도령이 부른 노래는 일시 정을 준 기생과 헤어지는 남자가 기생에게 주는 노래고, 춘향의 노래는 기생이 떠나는 남자에게 주는 노래라는 점이다. 잠시 만났던 남녀가 헤어질 때 부르는 상투적 노래인 셈이다. 남자는 헤어지는 마당에 잊지 않겠다고 하면서 작별 인사를 하고, 여자는 가지 말라고 붙잡으며 잊지 못할 것이라고 한다.

19세기 조선 사람 상식으로는 원님의 아들과 고을 기생의 만남은 원님 아들이 고을을 떠나면 끝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도령과 춘향은 이 노래를 끝으로 다시는 더 볼 일이 없이 헤어지게 돼 있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환상은 있지만, 현실은 ‘이별’이다. [춘향전] 같은 소설이 아니라면 남원부사의 아들과 남원 기생이 헤어지면서 노래를 부른 다음에는 다시 만나기 어려운 것이 당대 상식이라고 봐야 한다.

[춘향전]이 19세기에 그렇게 유행한 이유는 이별 장면에서 부른 두 사람의 노래가 갖고 있는 상투적 결말이 바뀌었다는 점에 있다. 남자가 아쉬움을 보이면서 떠나고, 여자가 그리움이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면 기생과 양반 자제 사이 관계는 그것으로 끝나야 한다. 그런데 기생은 떠나간 양반 자제와의 약속을 믿고 수절하며 온갖 고초를 견디고, 양반 자제는 과거에 급제해 높은 벼슬에 올라 그 기생을 구출해내 같이 산다. 이와 같은 [춘향전]의 내용은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던 상식을 깨버린 것이다.

백마 타고 떠난 임 그린 한시 ‘백마청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여자학교는 이화학당이다. 이화여자대학교는 이화학당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이 대학을 세계적 대학으로 키운 김활란 박사는 무거운 분위기의 이임식장에서 유행가를 불러 분위기를 바꿨다고 한다. 사진은 이화학당 전경과 김 박사.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라는 노래 가사는 유행가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준다. 한 번 떠나면 아주 가는 것이고, 그렇게 가버리면 모두 잊어버리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유행가는 그런 현실을 애써 외면하며 환상을 심어준다. 그렇지만 모든 유행가가 그런 것은 아니고, 이별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유행가도 있다. 남녀가 헤어지는 순간을 포착한 19세기 시조 하나를 보기로 한다.

서울대학교 교내에 있는 ‘자하연’이라는 연못은 조선 후기 인물 신위(申緯, 1769~1845)의 호 ‘자하(紫霞)’에서 따온 것이다. 서울대학교 정문 근처의 원래 지명은 자하동이었고, 신위의 별장이 이 동리에 있었다. 신위는 과거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지만, 그가 후대에 이름을 남긴 것은 정치적 면이 아닌 예술적 업적이다. 신위는 그림과 글씨 그리고 시에 모두 뛰어난 재주를 가진 인물이다.

그의 문집에는 4000수가 넘는 한시가 실려 있는데, 이것도 43세 이후의 시만 뽑은 것이라고 한다. 신위의 시 중 ‘소악부’라는 이름으로 모아놓은 40수의 한시는 19세기 초 유행하던 시조를 한시로 옮긴 것이다. 그중 한 수인 ‘백마청아(白馬靑娥)’는 다음과 같다.

“욕거장시낭마백(欲去長嘶郞馬白)
만삼석별소아청(挽衫惜別小娥靑)
석양염염함서령(夕陽冉冉銜西嶺)
거로장정부단정(去路長亭復短亭)”


이 한시는 신위가 당시 유행하던 아래의 시조를 옮긴 것이다.

“백마(白馬)는 욕거장시(欲去長嘶)하고 청아(靑娥)는 석별견의(惜別牽衣)로다
석양은 이경서령(已傾西嶺)이요 거로(去路)는 장정단정(長亭短亭)이로다
아마도 설운 이별은 백년 삼만 육천일에 오늘인가 하노라”


이 시조를 현대어로 옮기면 “백마는 떠나자고 길게 울음을 우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는 이별이 아쉬워 옷자락을 잡아당긴다. 지는 해는 이미 서쪽 고개로 기울어졌는데, 갈 길은 아득히 멀고도 멀다. 아마도 서러운 이별은 한평생 사는 동안 오늘인가 하노라” 정도가 될 것이다. 신위는 종장은 빼고 번역했으므로, 한시의 내용은 초장과 중장의 내용과 같다.

19세기 초 유행한 이 시조는 떠나는 남자와 이를 아쉬워하는 여자가 등장하는 오랜 전통을 지닌 노래다. 그런데 떠나는 남자가 타고 가는 것은 시대와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 고려시대 정지상이 쓴 유명한 한시 ‘대동강’에서는 배를 타고 강을 건너 떠나는 남자를 그렸다면, 19세기의 이 시조에서는 백마를 타고 떠나는 남자를 그렸다.

20세기 유행가 ‘정한의 밤차’는 시조 차용

조선이 개항해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19세기 말 조선에는 여러 나라의 기선이 정박하고, 서울에는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서울을 중심으로 인천, 부산, 신의주 등지가 철도로 연결된다. 이렇게 새로운 문물이 들어오면서 백마나 거룻배 대신 기차나 기선이 유행가에 등장하고, 백마 울음소리가 아닌 뱃고동이나 기차의 기적이 가사에 나타나게 된다. 이처럼 시대와 상황에 따라 남자가 타고 떠나는 것은 달라지지만, 이별을 주제로 한 노래에서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라는 내용은 별로 바뀌지 않는다.

1935년 나온 ‘정한(情恨)의 밤차’라는 유행가에는 ‘시극(詩劇)’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노래와 함께 대사가 있어서 마치 연극을 보는 것과 같은 효과를 준다. 노래 내용을 보면, 먼저 증기기관차 소리가 기적과 함께 들리면서 반주 음악이 나오고, 이어 여자 가수가 “기차는 떠나간다 보슬비를 헤치며, 정든 땅 뒤에 두고 떠나는 임이여”라고 노래한다. 그리고 이어서 여자 성우가 “임이여 가지 마오”라고 시작하는 긴 대사를 읊는다. 여자의 대사가 끝나면 남자 가수가 “간다고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으랴. 밤마다 꿈길 속에 울면서 살아요”라는 노래를 한 다음 남자 성우가 긴 대사를 한다.

남자 성우의 대사는 “기차는 가자고 목메어 우는데, 어찌타 임은 옷소매를 잡고 이리도 슬피 우느뇨”라고 시작하는데, 이 대사가 끝나면 여자 성우가 남자에게 “당신은 천하의 온갖 꽃동산을 헤엄쳐 다니는 호랑나비”라고 하며, 남자의 말을 모두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한다. 마지막으로 남자 가수는 “임이여 술을 들어 아픈 맘을 달래자. 공수래공수거가 인생이 아니냐”라는 가사로 노래를 마친다.

‘정한의 밤차’의 노랫말을 지은 사람은 19세기 시조의 노랫말에 들어 있는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는 그대로 썼고, “백마는 떠나자고 길게 울음을 우는데, 아리따운 아가씨는 이별이 아쉬워 옷자락을 잡아당긴다”는 백마를 기차로 바꿔 적절하게 잘 이용했다. 그런데 19세기 노래에서는 떠나가는 남자를 못 잊겠다고 말하며 슬픔을 안으로 삭이기만 하던 여자가 ‘정한의 밤차’에서는 “한번 보고 내어버릴 꽃이라면/ 무슨 억하심정으로 꺾어 놓았단 말이요”라고 남자에게 원망의 말을 하는 여자로 바뀌었다.

1863년 방각본으로 간행된 [남훈태평가]는 우리나라 유행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책이다. [남훈태평가]에는 224수의 시조와 함께 7편의 긴 가사가 실려 있는데, 이 노래는 당대 인기 있는 유행가들이었다. 조선시대 서적의 출판은 정부에서 독점하고 있었으므로, 양반층 이외의 서민들은 책을 구해 보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19세기 초 방각본이 나오면서 누구나 이를 사서 읽을 수 있게 됐다.

[남훈태평가]가 방각본으로 나오기 전에 노랫말을 모아놓은 책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근 보물로 지정된 김천택의 [청구영언]이나 김수장의 [해동가요] 같은 책이 있지만, 이런 책은 모두 붓으로 쓴 필사본이다. [남훈태평가]가 나오기 전에는 모두 이와 같이 손으로 쓴 노랫말 책이 있었을 뿐이다. 이런 필사본 노랫말 책은 대개 노래를 전문으로 하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남훈태평가]가 나오게 됨으로써 돈만 있으면 누구나 이 노래책을 구입해서 노래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유행가 역사의 새 장을 연 '남훈태평가'


▎1863년 방각본으로 간행된 [남훈태평가]는 우리나라 유행가 역사의 새로운 장을 연 책이다. [남훈태평가]에는 224수의 시조와 함께 7편의 긴 노래 가사가 실려 있는데, 이 노래는 당대 인기 있는 유행가들이었다. 사진은 [남훈태평가] 제17장. / 사진:국립중앙도서관
1910년대부터 수없이 많이 나온 ‘잡가집’은 [남훈태평가]를 이은 유행가 가사집인데, 여기에는 노랫말만 실려 있다. 이후 악보를 넣은 노래책이나 악보에 기타의 코드를 함께 표기한 노래책 등 여러 가지 책이 나오게 된다. 오선지에 악보와 함께 노랫말이 실리던 노래책은 노래방 기계가 나오면서 이제 거의 사라진 것 같다. 반주 음악과 함께 화면에 노래 가사가 뜨는 노래방 기계는 19세기 [남훈태평가]에 그 맥락이 닿아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남훈태평가]에 들어 있는 노래의 주제는 ‘사랑’이 가장 많은데, 187번째 노래는 [춘향전]의 이별 대목에서 춘향이 부른 노래 “울며 잡는 소매를 떨뜨리고 가지 마오”다. [춘향전]에 이 노래가 들어 있다는 사실은 당시 이 노래가 상당히 유행한 노래였음을 알려준다. 그리고 이 노래가 [춘향전]보다 더 오래 된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

이도령이 부른 “간들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잊을쏘냐”라는 내용의 시조는 [남훈태평가]에는 없는 것으로 보면, 이 노래는 [춘향전]이 나올 무렵에는 아직 크게 유행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내용은 19세기 중반 이후의 많은 노래에서 주요한 모티프로 쓰였다. 그리고 이별 장면에서 남자가 말하는 상투적 내용으로 아직도 종종 나타나는 구절이다.

대표적 신여성이 부른 오래된 노래를 통해 19세기 유행가가 어떻게 근대로 이어졌는지 간단히 살펴봤다. 19세기에는 다양한 종류의 유행가가 있었고, 그중 대표적인 것이 시조다. 그리고 이 19세기 유행가를 즐기던 사람들이 20세기에 들어와서는 새로운 선율의 유행가도 즐기게 된다. 새로운 선율의 유행가라도 가사에는 19세기 유행가 노랫말의 전통을 이어받은 것이 많이 있었다. 신여성 김활란 박사의 머릿속 기억 주머니 어딘가에 자리 잡고 있다가, 불현듯 퇴임식 자리에서 나온 옛 노래 한 가락이 그런 오래된 전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겠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2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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