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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 (95)] 임진왜란 19세 의병 충효당(忠孝堂) 이장발 

“나라 위해 몸 죽지만 어머니 못 잊어 혼백만 돌아가네” 

권사온에게 배운 뒤 의병 종군 중 전사, 절명시 발견돼 사후 공조참의 추증
조상 이용상은 고려에 망명한 베트남 왕조 왕자… 봉화군, K베트남밸리 추진


▎화산이씨 봉화종친회 이시창 사무국장이 충효당 마루에서 누각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12월 16일 오전 11시 경북 봉화군 봉성면 창평리. 영하로 뚝 떨어진 기습 한파로 일대엔 눈보라가 휘날렸다. 화산이씨 봉화종친회 이시창 사무국장의 안내로 눈발을 피해 문수산 기슭 충효당(忠孝堂) 마루에 올랐다.

충효당은 건물의 이름이자 한 인물을 가리키는 호(號)였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충효당 이장발(李長發, 1574~1592)이다. 그는 범상치 않았다. 불과 스물이 되기 전 세상을 떠나며 이름이 알려졌고, 고려시기 한반도로 망명한 베트남 왕족의 후예였다. “이쪽은 충효당의 내력을 적은 기문(記文)이고 저쪽에 걸린 것은 우리 선조의 순절시(殉節詩)입니다. 작은 두 편액 아래 벽면을 자세히 살펴주세요. 음각한 그림이 있는데, 보입니까. 둘 다 연꽃을 새겼습니다.”

그러고 보니 꽃모습이 생생하다. 왼쪽은 활짝 핀 연꽃이고 오른쪽은 봉우리 모양이다. “연꽃은 베트남의 국화입니다.” 설명을 듣고 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가지런히 써 내린 충효당기(忠孝堂記)에 먼저 눈길이 머물렀다. 건물이 처음 세워진 시기는 1750년 무렵. 이런 기문은 언제 누가 썼느냐가 관심을 좌우한다. 1826년(순조 26). 글을 지은 시기는 오래지 않다. 글을 쓴 사람은 이야순(李野淳). 그는 퇴계 이황의 후손으로 문장가였으며 대산 이상정 문하에서 퇴계 성리학을 전하고 닦은 학자다. 기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무릇 사람의 집 이름은 모두 주인이 스스로 표방한 것에서 나온다. 그러나 공조참의 이공(李公, 이장발)의 집 이름을 붙인 것은 자신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다. 이름을 붙인 사람이 누구인가? 직장(直長) 황소공이다. 그 이름을 충효당이라고 한 것은 어째서인가. 단지 생사 간에 실제 자취를 남기고 천만년까지 이름을 드리웠기 때문이다. 집의 이름은 이것을 버려두고는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公)이란 표현은 선비에게 붙이는 최고의 경칭이다. 이어 이장발의 순절 내력이 나온다.

“전쟁터 나아갈 용기 없으면 효가 아니다”


“임진왜란 때 근시재 김해(金垓) 공이 의병대장이 되며 원근의 문사들에게 격문을 보내 서기를 맡겼는데 공(이장발)도 그중에 있었다. 공은 형제 없는 외아들이었다. 그가 어머니에게 말씀드리자 어머니는 ‘나라가 한창 혼란하니 군신 간 의리는 막중하고 모자 사이 온정은 가벼운 것이다. 전쟁터에 나아갈 용기가 없으면 효가 아니라는 말을 듣지 못했느냐’라고 했다. 이때 나이가 겨우 열아홉이었다.”

이장발은 국가의 변고를 통탄하고 적과는 함께 살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그는 종군하여 의병이 문경에 이르러 대적할 때 앞장서서 크게 외치며 마치 사람이 없는 듯 적을 무찌르며 적진을 누볐다. 그러던 중 죽음을 맞이한다. 이때가 그해 6월 10일. 이장발은 생의 마지막 순간 절명시를 남긴다.

한목숨 바쳐 사직 지킬 생각으로(百年存社計)/ 유월에 군복으로 갈아입었네(六月着戎衣)/ 나라 걱정으로 몸이 헛되이 죽으니(憂國身空死)/ 어버이 그리워 넋만 홀로 돌아가네(思親魂獨歸)

이야순은 다시 충효당기에 이렇게 적는다. “공의 충효는 본래 시를 기다려 비로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임금과 어버이 사이에서 강개하고 적절한 마음은 말을 다 했어도 뜻은 남음이 있다. 죽어도 살아 있는 것과 같으니 100대(代) 후라도 상상하고 흥기하는 기풍을 도와 일으킬 것이다. 이 사람이여, 이 사람이여! 차마 그 자취를 사라지고 묻히게 할 수 있겠는가. 이에 황공이 반드시 공이 살던 곳에 나아가 그집에 징표하여 후대에 전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19세 청년의 전사 뒤에 남은 절명시 20자. 이 오언절구 20자는 청년 선비가 남긴 공식 문자의 전부이다. 오늘날 전하는 이장발의 문집 [충효당집(忠孝堂集)] 중 본인의 남긴 글은 이 20자뿐이란 뜻이다. 문집 속 나머지 글은 모두 순절 이후 다른 사람이 그를 기려 쓴 글이다.

이야순의 기문은 이어진다. “아, 공은 단지 일개 서기이고 막료로서 몸이 전투를 맡은 것이 아니고 직분이 국경을 수비하는 것도 아니었다. 또 이름이 군대에 편입된 것도 아니었지만 다만 나라를 위한 충정으로 흰 칼날 밟기를 어렵게 여기지 않았다. 그 용기는 기개와 의리가 더욱 장렬하다.” 글쓴이는 충(忠)을 말하면서, 그는 무인도 아니었고 징집의 대상이나 병역의 의무도 없었음을 강조한다. 효(孝)는 또 이렇게 묘사했다.

“어찌하여 중도에 몸이 죽어 넋만 돌아온 것인가. 유독 공이 불행한 때를 만나서이겠는가. 비록 7척의 몸으로 삼강(三剛, 君爲臣綱과 父爲子綱)의 짐을 지고 거듭 어머니의 현명함까지 있었으니 공의 집은 이로부터 면목을 일신할 것이고 그가 큰 근본을 세우고 아름다운 이름을 날렸으니 또한 무엇을 한스러워하겠는가.”

남긴 글은 절명시 20자가 전부


▎순절시(왼쪽)와 충효당기를 새긴 편액 아래 베트남 국화인 연꽃이 각각 음각돼 있다. / 사진:송의호
충효당 난간 앞으로 나아갔다. 충효당을 받치는 다섯 개 기둥에는 한가운데 충효당 편액을 걸고 양쪽 네 기둥에 5자씩 순절시 20자가 주련으로 걸려 있다. 눈보라가 주련 앞을 스쳐 지나간다. 사헌부 지평과 봉화현감 등을 지낸 박시원이 쓴 이장발 묘표(墓表)에 짧은 그의 생애가 좀 더 구체적으로 나온다. “(공은) 태어나면서 남다른 자질이 있었고, 문장이 일찍 이루어졌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셨는데, 무슨 일이든 반드시 여쭌 뒤에 행하였다. 고장에서는 ‘기특한 동자’라 칭송했다.”

그는 15세에 동강 권사온 문하에서 공부했다. [동강유고]에는 ‘나이 겨우 열다섯에 또 견문이 넓구나’라는 그를 칭송하는 시구가 실려 있다. 스승은 제자의 죽음에 다시 시 한 편을 남겼다. “당 앞에서 색동옷 입고 장난한 지 몇 해던가/ 독실한 학문 되려 거슬러 오르는 배 같네/ 어찌 알았으랴, 전장에서 죽음 앞두고/ 홀로 남긴 시구에 마음을 다 써낼 줄”

임진왜란이 나자 김해 의병대장은 격문을 보내 그를 종사관으로 삼았다. 그는 어머니가 연로하고 형제가 없어 가기 어려운 뜻을 모친에게 말씀드린다. 이장발은 3대 독자이자 당시 혼인한 지 9개월밖에 안 된 새신랑이었다. 어머니는 뜻밖에 “임금이 몽진했는데 어찌 어미를 돌볼 겨를이 있겠느냐 (…) 남아가 세상에 태어나 나라를 위해 죽으면 유감이 없을 것”이라면서 손수 갑옷을 지어 전송했다고 한다. 이은순이 쓴 또 다른 묘표에는 “어머니가 치마를 찢어 발을 싸서 문에서 전송했다”는 기록도 있다.

전장에서 시신을 수습한 대목도 묘표에 나온다. 이장발의 장인인 황소가 화살과 돌이 날리는 진중으로 갔다. 사위의 옷깃 속에는 시 한 수가 묶여 있었다고 한다. 바로 20자 절명시였다. 황소는 사위의 시신을 거두어 집 뒤 금혈산 언덕에 장사 지내고 그 집에 ‘충효당’이란 이름을 붙였다. 사위가 남긴 시의 뜻을 잘 끌어내 아파한 것이다. 이후 이장발의 유복자 아들이 태어났다. 부인 황씨는 남편이 남긴 뜻대로 시어머니를 잘 봉양해 천수를 누리게 했다. 충효당을 내려와 왼쪽 뒤에 세워진 비각 안 유허비를 둘러봤다. 비석 앞면에는 ‘공조참의 충효당 이공 유허비’라 새겨져 있다. 벼슬 공조참의는 이장발 사후 내린 증직이다.

13세기 베트남 왕자의 후손


▎충효당과 왼쪽 뒤편으로 보이는 유허비 비각. 사위의 죽음을 승화시킨 장인의 절절함이 전해진다. / 사진:송의호
이장발이 순절한 지 31년이 지난 1622년(광해군 14). 경상도 관찰사 김지남이 조정에 아뢴다. “이장발은 단지 약관의 일개 포의(布衣)로 애초 군대와 관계가 없는데도 7척의 몸을 바쳐 삼강의 막중함을 담당했으니, 이는 하기 어려운 일입니다. (…) 여기에서 나라가 배양한 교화를 볼 수 있으니 충과 효를 권면하는 도리에 있어 선을 표창하고 의리를 기리는 은전이 마땅히 있어야 합니다.”

이장발의 죽음에 거룩한 뜻을 담아 처음 나라에 보고한 것이다. 임금은 옳다고 여겼고 마침내 통정대부 공조참의 품계가 추증됐다. 유허비엔 처음에 이장발의 이름이 나오고 “화산군(花山君) 이용상(李龍祥)이 시조”라고 밝힌다. 조상이 예사롭지 않다. 연원은 고려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용상은 바로 베트남에서 고려로 망명한 리 왕조(李王朝)의 왕자라는 전설과 사료가 전하고 있다.

베트남 호찌민 한국총영사관 이철희 전 영사의 연구에 따르면 리(李, Ly) 왕조는 1009년부터 1225년까지 중국의 지배를 벗어나 존속한 베트남 최초의 독립 국가였다. 리 왕조는 수도를 현재 하노이 인근 탕롱(昇龍)으로 정해 반 미에우(文廟)를 세우고 유교 실용화와 과거제 실시 등 나라의 기틀을 다졌다. 베트남 호찌민 주석은 그런 연유로 생전에 리 왕조의 태조 사당을 수십 차례 방문했다. 리 왕조는 8대까지 이어진 뒤 마지막 찌에우 호앙(昭皇) 시기 외척인 쩐 투 도(陳守度)의 난으로 멸망했다. 신흥 쩐 왕조는 리 왕족 해체에 나서 성씨를 리에서 응우옌(阮)으로 바꾸게 했다고 한다. 리 왕조 6대 영종(英宗)의 일곱 번째 아들인 이용상은 찌에우 호앙의 할아버지 뻘이 된다. 그는 쩐 왕조의 탄압을 피해 1226년 일가를 이끌고 3000㎞ 떨어진 고려로 피신한 것이다.

이용상은 고려 고종 시기, 지금은 북한 땅인 황해도 옹진에 도착했다. 그는 고려로 귀화하면서 왕조 관련 기록과 족보, 제기 등을 들고 나왔다고 한다. 또 고려로 오던 도중 해적에 잡힌 고려인을 구출하는 공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1879년 작성된 [옹진부읍지]에는 “안남(安南) 국왕의 아우 이용상이 나라가 망해 친족과 함께 옹진현에 이르니 외국 왕손임을 불쌍히 여겨 화산군으로 봉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또 옹진에는 이용상 왕자가 그 뒤 고려에 침입한 몽고병을 항복시킨 공을 칭송하는 ‘수항문(受降門) 기적비(紀蹟碑)’가 있다고 한다.

이장발 유허비를 살핀 뒤 내려오니 충효당을 두른 담장 왼쪽 빈터에 기념식수 소나무 한 그루가 보였다. 석 달 전인 지난 9월 봉화군과 베트남 뜨선시가 자매결연하며 심은 나무였다. 뜨선이 바로 리 왕조 태조 이공온의 고향이라고 한다. 이런 내력을 감안하면 임진왜란 당시 이장발의 순절도 조상인 이용상의 업적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왕족 후손이니 행동 바로 하라” 가르침


▎봉화군과 베트남 리 왕조 태조의 고향인 뜨선시는 2023년 9월 자매결연을 하며 충효당에 기념 소나무를 심었다. / 사진:송의호
거기서 이 사무국장이 어린 시절을 회고했다. “어렸을 때 잘못해 아버지가 회초리로 종아리를 때릴 때는 ‘너희는 베트남 왕족 후손이니 행동 바로 해야 한다’는 말씀을 하셨어요. 그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누각 처마 가운데 걸린 ‘충효당’ 글씨가 우람하다. 유사(遺事)를 남긴 손자 이유안은 이 편액이 공민왕의 필체를 모각했다고 적었다. 베트남 왕족의 후예들이 역시 그들을 받아들인 고려 왕실의 은혜를 잊지 않은 것일까. 기념식수 왼쪽 뒤로 ‘정복헌(貞復軒, 군자의 도리를 지키는 집)’이란 표석을 세운 한옥 종택이 보였다. 집은 비었고 종손은 서울에 산다고 했다. 창평리는 한때 화산 이씨 후손이 10여 호 있었지만 지금은 7가구쯤 남았단다. 충효당을 떠나 1㎞쯤 떨어진 금혈산 자락 소금미 계곡 재실 영모당에 들렀다. 이장발 등 화산 이씨 문중 묘역의 재실이다. 활용이 뜸해져 건물은 부실했다.

깊은 산중 재실 아래로 널찍한 창평저수지가 있었다. 물이 그득하다. 봉화군은 창평리 충효당과 소금미 계곡 등 일대를 묶어 K베트남밸리를 조성하는 사업을 추진 중이다. 저수지엔 베트남의 수상가옥 등을 꾸미는 구상도 들어 있다고 한다.

임진년 19세 의병 이장발은 하늘이 돕지 않아 불행히 왜적의 칼날에 스러졌다. 그러나 그 죽음은 충에 부끄러움이 없고 효에 유감이 없었다. 짧은 생애에 남긴 글은 20자가 전부였지만 그는 충과 효를 온전히 해낸 선비였다. 서애 류성룡은 임진왜란을 수습하고 1607년 세상을 떠나기 석 달 전 자제들에게 “권면하노니 자손들아 꼭 삼가라/ 충효 외에 다른 사업은 없으니”라는 유훈시를 남긴다. 서애의 6대손 류이좌는 이장발의 ‘충효당유집서(忠孝堂遺集序)’를 쓰면서 서애 종택의 이름도 충효당임을 상기시켰다.

[박스기사] 770년 만에 이뤄진 베트남 딘 방 마을의 전설 - 화산 이씨 후예의 참배 후 리 왕조 유물 발견돼

베트남 딘 방 마을에는 “방나무 숲이 없어지고 따오케 강물이 마를 때 리 왕조가 다시 돌아온다”는 전설이 내려왔다. 딘 방 마을은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에서 조금 떨어진 박닌(北寧)성에 위치한다. 이곳에는 11세기 세워진 리 왕조의 사당이 있다. 이곳 도사당에는 리 왕조 여덟 왕의 위패와 상이 봉안돼 있다고 한다. 마지막 아홉 번째 왕 찌에우 호앙은 남편인 쩐 까인에 왕위를 넘겨 리 왕조를 멸망시킨 탓에 위패가 도사당에 봉안되지 못하고 종사당에 따로 떨어져 있다.

딘 방 마을의 원래 이름은 꼬 팝(古法)이었다고 한다. 1225년 왕위를 찬탈한 쩐 왕조가 꼬 팝이 리 왕조를 연상시킨다며 마을 이름을 바꾼다. 딘 방(停榜)은 더는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지 말라는 뜻을 담고 있다. 이런 딘 방 마을에 방나무 숲은 오래전 사라졌고, 마을 앞을 흐르던 강은 지금 농토로 변했다. 전설이 구현된 1994년 리 왕조의 후손 이용상 왕자의 26대손인 한국의 화산 이씨 후예가 도사당을 참배했다. 1992년 우리나라가 베트남과 수교한 뒤다.

베트남 사람들은 그들의 정신적 바탕인 리 왕조의 후손이 780년 만에 방문하면서 마을의 전설이 마침내 실현됐다고 믿는다. 이후 신비한 일이 이어졌다. 땅에 묻혀 있던 리 왕조의 제기가 발견되고, 태조가 탄생한 절에서 왕관 모양의 파인애플이 나왔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yeeho1219@naver.com

202402호 (2024.0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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