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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3)] 문학작품을 통해 살펴본 19세기 기생의 삶 

춤과 노래 익혀 관청 행사 때 가무(歌舞) 도맡던 노비 

관청 소속으로 최하층 천민 신분에도 상류층 남성 상대
남자와 술 마시고 말 섞는 건 예사였지만 매춘과는 거리


▎신성일, 문희 주연 영화 ‘춘향전’.
최초의 영화는 1895년 프랑스에서 만들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이때 만든 영화는 1분이 채 안 되는 짧은 것이었다고 한다. 그 후 10년쯤 지나 요즘 우리가 보는 영화와 비슷한 정도로 1시간 이상 상영하는 영화가 만들어졌다. 영화가 20세기의 새로운 대중예술이 된 계기다. 극장에 가서 돈을 내고 영상을 관람하는 방식의 영화 감상은 디지털시대가 도래하면서 다양한 형태로 바뀌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관객이 보았는지에 따라 그 영화의 성패가 결정된다는 점은 과거와 마찬가지다.

근래 한국이 제작한 영화도 1000만 명 이상 관객을 모은 사례가 심심치 않게 나온다. 국내에서 대규모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해외 영화제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면서 흥행에 성공한 작품도 꽤 많아졌다. 이런 영화 가운데는 오리지널 시나리오가 아닌 원작이 있는 작품도 있는데, 최근에는 웹툰이 원작인 것도 많다고 한다.

한국에서 처음 장편 상업영화를 제작한 때는 1923년이다. 첫 3년 동안 제작된 영화 11편 가운데 6편이 [춘향전]이나 [심청전] 같은 고소설을 원작으로 한 작품이었다. 이후 한국영화사에서 [춘향전]은 특별한 의미가 있는 작품이 됐는데, [춘향전]을 영화화한 것 가운데는 ‘최초’가 붙는 사례가 많다. 1923년 최초 장편 상업영화, 1935년 최초 발성영화, 1961년 최초 컬러시네마스코프 영화, 1971년 최초 70㎜ 영화 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춘향전]의 주인공 이도령과 춘향 역의 남녀 배우는 그야말로 당대 최고 미남 미녀들이다. 특히 춘향역을 맡는 배우는 배역을 맡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장안의 화제였다. 소설에서 춘향의 신분은 기생이므로, 영화에서도 춘향은 기생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그동안 영화 제작자나 감독 그리고 출연 배우 등은 기생에 관해 잘 모르는 이가 많았다. 만약 영화나 드라마 관련자가 19세기 기생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면 좀 더 재미있는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현대인이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기생은 일제 강점기에 정착된 이미지다. 20세기의 기생제도는 일본의 제도를 본떠 만들었으므로, 19세기까지 조선의 기생제도와는 다른 면이 있다. 그런데 기생에 관한 전문 연구도 주로 20세기 기생제도를 밝히는 데 중점을 뒀기 때문에 19세기 이전 조선시대 기생제도에 대해서는 잘못 알려진 것이 많다.

19세기 조선의 기생이 무엇이었나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19세기에 나온 자료를 검토해야 한다. 500년을 지속한 조선왕조에서 기생의 역할은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그러므로 조선시대 마지막 100년의 기생에 관한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19세기 사람들이 기록해 둔 자료를 잘 검토해야 할 것이다. 19세기 관청 기록이나 개인 일기 그리고 [춘향전]과 [계우사] 같은 문학작품 등을 통해 당대 기생의 모습을 알아보자.

조선시대 기생은 관청에 소속된 노비의 하나로, 이들은 서울이나 각 지방 관아에서 열리는 행사에서 가무를 담당했다. 기생이 맡은 역할은 조선조 내내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사회 변화와 함께 세부적으로는 다양한 면모를 보이게 된다. 기생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한 가지 특징은 최하층 천민이라는 신분 한계에도 불구하고 상층 남성을 상대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기생 관련 기록은 기생이 상대한 상층 남성들이 남겨 둔 것이 대부분이다.

수령이 기생에 수청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법

기생은 서울 몇몇 관청과 지방 각 고을에 소속돼 있었다. 중앙 관청인 내의원과 혜민서에는 의녀를 뒀고, 상의원과 공조에는 침선비가 있었다. 그리고 지방에서는 8도 감영과 각 고을에 기생이 있었다. 내의원과 혜민서는 모두 의료기관인데, 여기에 근무하는 의녀(여자 의원)가 기생의 일도 겸하게 됐다. 상의원은 임금의 의복을 만드는 기관으로, 여기에서 근무하는 침선비도 기생 일을 했다.

전기에는 장악원에 소속돼 음악과 춤을 전문으로 하는 기생이 있었다. 서울에서 거행하는 행사에는 이들이 동원됐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이 제도가 폐지됐으므로, 국가 행사에 동원할 수 있는 기생이 부족했다. 그래서 주요 국가 행사가 있으면 각 지방에서 필요한 인원을 뽑아 서울로 보냈는데, 이를 선상기(選上妓)라고 한다.

그러나 모든 제도가 그렇듯 기생과 관련된 제반 규정이 엄격히 지켜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주요 국가 행사나 필요에 따라 지방에서 뽑아온 기생은 행사가 끝나면 바로 돌려보내야 했지만, 실제로는 돌려보내지 않는 사례도 많았다. 소설 [계우사]의 여주인공 의양은 평양의 기생으로, 중앙 내의원으로 뽑혀온 선상기다. 그러나 평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계속 서울에서 생활한다.

[춘향전]에서 신임사또 변부사는 춘향에게 수청을 강요하는데, 조선시대 법률에는 수령이 기생에게 수청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법이었다. 게다가 춘향은 이도령과 부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기생 명단에서 빠졌다. 춘향은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기생 명단에 넣고 기생 일을 그만둔다. 이렇게 합법적 절차에 따라 기생 명단에서 빠졌지만, 변사또는 이런 규정을 모두 무시하고 춘향을 불러들여 수청을 강요한다.

세종은 여자 종이 아이를 낳으면 100일 휴가를 줬고, 출산 한 달 전부터는 일을 시키지 못하게 했다. 종의 남편에게도 출산 30일 뒤 일을 시키도록 했다. 그러나 이런 명령이 조선시대에 얼마나 통용됐는지는 의문이다. 하층민에게 가혹한 것이 봉건시대 속성이므로, 기생인 의양과 춘향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한다. 어쩌면 소설 내용이 당대 현실을 잘 보여주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 기생은 15세까지, 어른 기생은 16세 이상

기생이 되는 나이가 몇 살인지, 몇 세가 되면 기생 노릇을 그만두는지 정확히 알 수 있는 자료는 없다. 15세기 후반 반포된 [경국대전]에는 서울 기생은 50세가 되면 국가 일에 동원되지 않는다고 했지만, 이런 규정이 지방에도 적용됐는지는 알 수 없다. 아울러 조선 후기에도 정확하게 지켜졌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기생 관련 각종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자료로 [춘향전]보다 나은 것은 없을 것이다. 이 소설에는 19세기 지방 관청의 기생에 관한 여러 가지 내용이 들어 있어서, 살아 있는 기생 자료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소설에서 기생의 나이에 관한 내용을 하나 보기로 한다.

[춘향전]에서는 기생을 나이에 따라 아이 기생, 어른 기생, 늙은 기생 셋으로 나눴다. 변사또가 부임할 때 남원 관아 모든 사람이 신임 사또를 맞이하는데, 기생들도 복장을 갖추고 환영 대열에 선다. “아이 기생은 푸른 치마에 붉은 저고리를 입고, 어른 기생은 무관의 복장을 했으며, 늙은 기생은 이들을 영솔한다”고 했다. 기생들은 변사또 생일잔치 때도 같은 복장으로 참여한다.

이렇게 셋으로 나눌 때의 기준은 아이 기생은 대체로 15세까지고, 어른 기생은 16세 이상으로 보인다. 늙은 기생은 아이 기생과 어른 기생을 영솔한다고 했으므로, 기생 중 나이가 많은 사람을 지칭한 것으로 보인다. 한 관아의 기생 우두머리는 행수기생이라고 하는데, [춘향전]에서 나오는 늙은 기생이 행수기생을 말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근래 연구에서 16세에 장기(壯妓)가 된다고 했으니(박영민의 연구), [춘향전]의 어른 기생은 16세부터라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춘향전]에서 기생 나이와 관련된 흥미 있는 대목을 하나 더 소개하기로 한다.

변사또는 부임하자마자 다른 업무는 다 제쳐두고 바로 기생을 점고한다. 기생 명단에 들어 있는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면 기생이 대답하는 것이 기생 점고다. 변사또는 점고하는 도중 그만두라고 하고, 기생 하나를 가리키면서 나이가 몇 살이냐고 묻는다. 그 기생이 서른한 살이라고 답하자 변사또는 “계집이 삼십이 넘으면 물이 다 빠진 것”이라고 하면서 저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런 후 다음에 서 있는 기생 영애에게 또 몇 살이냐고 묻는다.

영애는 나이가 거의 40이 된 기생인데, 앞에서 31세를 물이 다 빠졌다고 하니, 자신은 나이를 바짝 줄여보겠다는 심산에 13세라고 답한다. 변사또가 대답을 듣고 화가 나 뺨을 때리려고 하자 영애는 겁이 나 사실대로 말하겠다며 53세라고 한다. 이 대목은 소설을 재미있게 하려고 만들어 넣은 이야기지만, 19세기 지방 관아 기생 나이를 13세에서 53세까지로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늙은 기생’이라는 말이 나이에 따라 분류한 것이라면 30세가 넘으면 늙은 기생으로 분류했을 가능성도 있다.

19세기 몇몇 자료에서 아이 기생의 나이를 알 수 있는데, 춤을 추는 동기(童妓)의 나이를 기록해 준 자료가 있다. 1804년 작성된 [지정연기]에는 의주에서 검무를 추는 어린 기생 네 명 모두 11세라고 했고, 1848년 기록한 [몽유연행록]에는 승무를 추는 두 어린 기생 나이를 14~15세라고 했다. 18세기 자료인 [연행일기]에도 검무를 추는 13세 아이 기생에 관한 기록이 있다.

지방 기생집마다 각기 독특한 풍습


▎1997년 9월 21일부터 사흘간 서울놀이마당에서 송파구 ‘한성백제문화제’가 열렸다. ‘송파장터’에서 말을 탄 아이와 기생 분장을 한 여인들(왼쪽 아래)이 장터를 돌아다니고 있다.
현재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분원리는 조선시대 사옹원 분원이 있던 곳이다. 이곳에서 그릇을 만들어 궁궐에 납품하는 일을 맡았던 지규식이라는 인물이 1891년부터 약 20년 동안 쓴 일기가 남아 있다. 이 일기는 분원의 사기 그릇 제작 업무를 자세히 파악할 수 있다는 면에서도 중요한 자료지만, 당대 사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내용도 많이 들어 있다. 일기에는 기생과 관련된 내용도 들어 있어 19세기 말 기생 모습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한 예로 지규식이 1891년 7월 1일부터 15일까지 서울에서 황해도 해주까지 공무로 출장을 다녀온 기록을 보기로 한다. 그는 서울에서 출발해 7월 4일 해주에 도착했는데, 해주 인근 주막에서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만났다. 여인은 연안으로 가는 도중 이 주막에 들렀다고 말하며 지규식과 더불어 연거푸 10여 잔 술을 마셨는데, 함께 취해 노래를 부르고 농담도 주고받은 후 헤어진다. 지규식은 그 여인을 해주의 퇴기라고 생각한다.

지규식은 해주에서 일을 보며 며칠을 머무는 동안 일찍이 이름을 들은 적 있는 해주 기생 옥연을 만나려고 한다. 옥연의 집에 가니 옥연이 웃으며 이야기하는 소리가 밖에서도 들렸다. 그러나 중문이 닫혀 있어 그냥 돌아왔다. 해주에서는 기생 집 중문이 닫혀 있으면 손님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풍습이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비가 와 일을 보지 못하고 무료하게 여관에 머물고 있었다. 지규식은 심심풀이로 금홍이라는 여덟 살 된 동기를 여관으로 불러 노래를 들었는데, 아직 목이 트이지 않았지만 들을 만했다. 지규식은 그의 재주와 미모가 뛰어나 크면 뛰어난 미인이 되리라 생각하면서 한시를 한 수 지어줬다.

7월 9일 해주 감영에서 출장업무를 끝낸 지규식은 지난번 만나지 못한 옥연의 집을 찾아간다. 옥연은 해주의 퇴기로, 노래와 춤과 함께 미모도 해주에서 가장 뛰어난 인물이었다. 지규식은 옥연과 더불어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다 저녁 무렵 여관으로 돌아왔다. 그는 상당히 많은 양의 술을 마셨음에도 옥연을 생각하며 한시를 지었다.

지규식은 7월 11일 출장업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서울로 가는 여자 일행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같이 갔다. 이들은 해주 기생 경옥 일행으로, 경옥이 서울 재동에 사는 오씨 양반의 첩이 돼 서울로 올라가는 길이었다. 지규식은 이들과 낯을 익혀 종일 함께 갔다.

지규식의 보름 동안 일기를 통해 조선 말기 기생에 관한 정보를 여러 가지 얻을 수 있다. 일기는 매일 일어난 일을 기록해두는 것이므로, 문자 그대로 생생한 정보라고 할 수 있다. 일기 내용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일기는 우선, 기생은 남자를 많이 접하기 때문에 남자와 어울리는 데 별로 스스럼이 없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규식이 황해도 해주로 가는 길에 주막에서 만나 10여 잔이나 술을 주고받은 여인은 먼저 그에게 술을 같이 마시자고 권한다. 그리고 서울 사는 양반의 첩이 된 해주 기생도 처음 만난 낯선 남자 지규식과 종일 동행한다. 주막에서 만난 여인이 퇴기인 것을 알아차린다든가 처음 만난 여인 일행과 온종일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은 지규식이 사십 평생 겪은 기생에 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둘째, 조선시대 각 지방 기생집에는 각기 독특한 풍습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해주에서는 기생집 중문이 닫혀 있으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예의였다. 그리고 어린 기생은 여관으로 불러 노래를 듣던 반면, 어른 기생을 상대로는 그 집으로 직접 찾아가야 한다는 것도 알 수 있다. 관가 기생이 서울 사는 양반의 첩으로 가는 현장도 일기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일 수교 뒤 ‘기생관광’ 말 퍼지며 왜곡돼


▎‘기생 교습소’인 진주 권번의 기생과 견습생.
기생이 매춘과 연결된 중요한 계기는 1965년 한국과 일본이 국교를 맺으면서 시작된 일본인 남성의 ‘기생관광’이다. ‘섹스관광(sex tourism)’의 다른 이름인 기생관광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사람들은 조선시대 기생을 주로 매춘과 연관시키게 됐다. 그러나 앞에서 봤듯 조선시대 기생은 관청에 소속된 노비로, 주된 임무는 춤과 노래를 익혀 관청 행사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기생은 서울과 지방을 막론하고 소속된 관청에 행사가 있을 때만 참여하는 것이지 매일 출근하는 게 아니었다. 관청에서는 특별히 인원을 파악할 필요가 없는 한 매달 1일과 15일에 기생을 불러 기생 명부와 맞춰봤을 뿐이다. 그러므로 기생들은 관청 행사가 없을 때는 자기 집에 있었다.

앞서 지규식이 해주 기생 옥연의 집에 가서 놀았는데, 낮에 가 술을 마시고 이야기하다 저녁 나절 돌아왔다고 했다. [춘향전]에서도 이도령이 춘향의 집을 찾아갔을 때 춘향 어머니 월매는 이도령에게 “춘향이와 얘기나 하다 돌아가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기생집에 가서 논다는 게 반드시 성적 관계를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공무로 지방에 간 관리들이 각 고을에서 기생의 접대를 받는 내용의 기록은 많이 있는데, 그중 두 가지를 보기로 한다.

“밤에 달이 밝아 밖에 나와 뜰 안을 거닐다가 돌아오니, 늙은 기생 옥랑과 수청 기생 두 명이 와서 앉아 있었다. 잠시 후 두 기생은 가 버리고 옥랑 혼자서 남아 옛말을 지껄였는데 한참 있다가 그녀도 돌아가 버렸다.”(1713년, 연행일기)

“수청 기생 네댓 명과 같이 술을 마시면서, 나직이 노래를 부르면서 악기 연주로 호응하게 하였다. 두보의 시에 차운하여 시 한 수를 지었다. 밤이 샐 무렵에 정사와 부사가 모두 모이니, 결국 기악(妓樂)이 성대하게 베풀어졌다.”(1804년, 지정연기)

기생의 접대란 이처럼 음악과 이야기 정도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 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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