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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 정신의 미학(96)] 스승을 존숭한 ‘산림 정승’ 내암(來庵) 정인홍 

“3000 의병 일으켜 대장경과 곡창 호남 지켰다” 

남명 조식 문하 경상우도 사림 종장, 북인 영수된 뒤 광해 시기 영의정까지
스승 문묘 종사 위해 퇴계 비판, 폐모살제 누명 쓰고 인조반정 뒤 처형당해


▎조원영 합천군 가야사복원계장이 부음정의 내력을 설명하고 있다. / 사진:송의호
광주대구고속도로 해인사 나들목을 나가면 도로는 합천군 가야면 소재지를 거쳐 해인사로 이어진다. 면 소재지가 끝날 무렵 길 왼쪽에 부음정(孚飮亭)이라는 안내판이 보인다. 부음정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았지만 조선 중기 남명학파를 아는 이들에겐 지나치기 어려운 유적이다. 바로 남명 조식 선생의 고제(高弟, 덕망 높은 제자)인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1535~1623)의 몇 안 되는 자취이기 때문이다.

1월 16일 가야산에서 내려온 계곡 옆에 자리한 부음정에 들렀다. 조원영 합천군 가야사복원계장을 만나 함께 일대를 답사했다. 정자 벽면에 지난봄 향례(享禮) 분정기(分定記)가 붙어 있다. 내암을 기리는 제사를 누가 진행했는지 보여 주는 기록이다. 분정기엔 부음정 대신 ‘부음서원(孚飮書院)’이라 썼다. 부음정 위쪽에는 내암의 위패를 모신 사당 청람사(晴嵐祠)가 있다. “해마다 봄에 유림이 여기서 향사를 올립니다.” 교지 등 내암의 유품은 후손들이 최근 합천박물관에 기탁했다고 한다.

분정기 위로 내암이 지은 부음정기(孚飮亭記)가 새겨져 있다. 정자 이름 ‘부음’이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내암은 기문에 그 뜻을 스스로 밝혔다. “[주역]가운데 한 효사(爻辭)를 취해 한몸이 스스로 거처할 곳을 삼으니, 대개 술이지만 술이 아니고 마시지만 마시지 않는다는 뜻이다.” 설명은 “술을 마신다고 한 것은 애초 누룩으로 빚은 술에 의해 마음을 흐리게 하는 것을 비유한 것은 아니다”로 끝난다.

부음정은 내암이 학문에 정진하고 후학을 길러낸 공간이다. 1580년(선조 13) 가야면 황산리에 처음 세워졌으며, 현재 건물은 광복 이후 옮겨 지은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인홍은 어려서 독학하다가 남명 선생이 본향인 합천 삼가로 돌아와 뇌룡정·계부당을 짓고 후학을 가르치자 15세(1549년)에 문하로 들어갔다. 스승은 그의 지조가 남달라 지경(持敬) 공부를 가르쳤다고 한다. 23세에 정인홍은 생원시에 합격한다. 그러나 그는 스승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아 과거 공부를 단념하고 학문의 폭을 넓혀 경서는 물론 제자백가·천문·지리·병법 등에 두루 통달했다.

스승의 칼 ‘경의검’ 물려받다


스승 남명은 늘 방울을 찬 채 각성을 꾀하고, 때로 칼을 턱에 받쳐 혼미함을 경계하곤 했다. 그는 만년에 방울은 김우옹에게 주고 칼 경의검(敬義劍)은 정인홍에게 건네면서 이것으로 심법을 전했다. 부음정 뒤 기념관에 경의검이 방울과 함께 전시돼 있다. 정인홍은 37세에 산청 산천재에서 스승을 임종했다. 이후 그는 늘 꿇어앉아 칼을 턱 밑에 대고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 무렵 정인홍은 효제(孝悌)로도 이름이 났다.

정인홍의 인격과 학문은 마침내 조정에 알려져 39세인 1573년 ‘탁행지사(卓行之士)’로 천거돼 6품 황간현감에 임명된다. 당시 조목·이지함·최영경·김천일도 함께 천거돼 ‘오현사(五賢士)’로 불렸다. 현감이 된 내암은 당대 최고 선정관(善政官)으로 뽑혔다.

이어 1580년 나라 기강을 관장하는 사헌부 장령으로 전격 임명된다. 1581년 [선조실록] 15권에 “정인홍은 잘못을 탄핵함에 지위고하를 가리지 않고 법령을 엄히 지켜 한때나마 나라 기강이 자못 숙연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또 “정인홍은 백성이 곤궁한 까닭은 공물을 중간에서 가로채는 모리배와 고을 수령, 아전들이 탐학하기 때문이라며 이를 엄금토록 호조에 촉구했다”는 기록도 있다.

1582년 내암은 모친상을 당한다. 사직했다. 2년 뒤 다시 부친이 세상을 떠난다. 치상 기간이 끝나고 선조 임금이 그에게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사양하고 10년 가까이 부음정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다. 1589년 기축사화가 일어났다. 당쟁은 피를 불렀다. 정여립 반란을 계기로 서인이 동인의 기세를 꺾기 위해 신진사류를 대거 처형한 것이다. 내암은 이 일로 오현사 발탁 때 같이 천거된 동문인 수우당 최영경을 잃었다. 동인은 기축사화를 계기로 남인과 북인으로 갈라진다.

대북 영수로서 퇴계 이황 처세 비판


▎기념관 옆에 ‘영의정 정내암 신도비’가 세워져 있고, 건너편으로 사당인 청람사가 있다. 뒤로 가야산이 보인다. / 사진:송의호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했다. 내암은 정예병과 창군(槍軍) 등 3000여 의병을 일으켜 7년 동안 무계전투 등을 승리하며 해인사 팔만대장경 등을 보존했다. 또 낙동강 수로를 지켜내 왜군이 곡창지대 호남으로 진출하는 것을 제지했다. 체찰사 이원익의 주청으로 내암에겐 ‘영남의병대장’이란 칭호가 주어졌다. 기념관에는 당시 내암의 발자취가 정리돼 있다.

1597년 정유재란 때는 내암만 유일하게 의병을 일으켜 명나라 군대에 협력했다. 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정인홍의 공을 크게 치하하며 형조참의와 사헌부 대사헌 등에 제수하지만 그는 병을 이유로 부임하지 않았다. 대신 산림에 묻혀 후학을 가르쳤다. 조정은 그를 ‘선무원종공신 1등’으로 녹훈한다. 정권은 서인 대신 이제 북인이 들어서는 계기가 마련된다.

1604년 70세 내암은 스승 남명의 수고(手稿)를 모아 [남명집]을 해인사에서 간행하는 것을 주관했다. 이때 그는 문집 발문인 ‘발남명집설(跋南冥集說)’을 쓰면서 이황의 처세를 비판했다. 내암은 당시 남계·덕산 등 서원의 원장을 맡아 경상우도 사림의 종장 위치에 있었다.

그 무렵 선조의 후계 구도가 대두된다. 북인은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小北)과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大北)으로 나뉘고, 임진왜란 공훈에 세자 광해군을 지지한 정인홍은 사실상 대북의 영수가 됐다.

1608년 정인홍은 선조의 광해군 양위 교서를 비밀에 부친 소북의 영수, 영의정 유영경을 처단하라는 상소를 올리다 유배에 처해졌다. 그러나 뜻밖에도 선조가 급서하면서 광해군이 등극한다. 내암은 광해군 시대 대사헌 등 여러 관직에 임명되지만 주로 산림에 은거하며 대북의 정치적, 사상적 지주로 활약했다. 특히 스승인 남명의 문묘 종사를 위해 퇴계 비판 등 대북의 학통을 강화하는 데 힘을 쏟았다.

그러나 퇴계를 비판한 발문은 파문이 커졌다. 성균관 유생 정호성 등이 들고 일어나 전국 향교에 통문을 돌리는 등 지탄의 화살이 쏟아졌다. 남명학연구원장을 지내고 [내암문집] 해제를 쓴 김충렬 전 고려대 교수는 “이것이 후일 내암이 세상의 질시를 받게 된 실마리”라며 “선비들의 존경을 받던 내암이 그들과 갈등을 일으켜 멀어져 갔으니 안타까운 일”이라고 봤다.

퇴계 비판은 발문으로 끝나지 않았다. 내암은 좌찬성 자리를 사양하면서 ‘회퇴출향소(晦退出享疏)’란 차자(箚子, 상소)를 올린다. 이미 5현으로 문묘에 배향된 이언적과 이황을 내치자는 주장이었다. 서인과 퇴계학파 등이 그냥 넘어갈 리 없었다. 결국 내암은 그 일로 선비 명부인 청금록(靑衿錄, 성균관 학적부)에서 이름이 지워졌다.

부음정을 돌아본 뒤 정자 뒤 돌계단을 올라 기념관 옆 ‘영의정 정내암’ 신도비를 살폈다. 처음에는 묘소에 세워졌다고 한다. 신도비 건너편에 2003년 건립한 사당 청람사가 있다. 비석을 받치는 거북 형상 귀부는 이끼 등 연륜이 느껴졌지만 건립 시기는 단기 4293년(1960)이라 새겨져 있다. 비문은 서울대 총장과 이승만 정부 문교부 장관을 지낸 최규남 박사가 지었다.

광해군이 즉위하자 내암은 먼저 한성부 판윤에 제수된다. 그는 ‘정치와 사림의 일신’을 주장하며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이를 통해 백성이 원망한 공물의 비리를 일신하고 대동법을 시행할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했다. 그 무렵 임해군 역옥(逆獄)이 일어난다. 내암은 “사사로이 병(兵)을 길러 반역을 도모한 사실이 드러난 이상 왕의 형제라 해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며 법대로 처리할 것을 촉구했다. 이른바 내암의 ‘할은론(割恩論, 은혜 베풀기를 끊음)’이 이원익·정구의 ‘전은설(全恩說, 온전한 은혜를 베풀자)’과 대립한 것이다.

김창렬 교수는 “할은론으로 인해 반대파는 내암을 가혹한 법가로 몰아붙이고 이후 일어난 영창대군 증살과 인목대비 폐출까지 그가 주장한 것으로 덮어씌우는데, 사실은 그와 반대”라고 강조한다. 그 무렵 내암은 한 번도 벼슬에 나아간 일이 없지만 그는 좌찬성·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임명됐고 여전히 가야산 아래 은거했다.

“8세 아이 영창대군 역모론은 무고”


▎남명 조식 선생이 사용하다 제자 정인홍에게 전한 경의검과 김우옹에게 넘긴 방울. / 사진:송의호
내암은 영창대군의 일을 전해 듣고 상소를 올려 이렇게 변론한다. “의(영창대군)는 8세 어린아이입니다. 무슨 이해(利害)와 취사(趣舍)를 알겠습니까. 그가 역모에 불참했으리라는 것은 전하도 교지로 내리신 바 있습니다만 누구나 그의 무고함을 알고 있습니다 (…) 무고하게 죽이지 않는 것이 또한 의리의 당연함이 아니겠습니까?”

1615년 81세 내암은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임금을 독대한다. 그 자리에서 흉년으로 백성의 삶이 어려움을 말하고 구황책을 건의했다. 이 무렵 영창대군의 화(禍)는 생모인 인목대비에게 번져 폐모론이 일기 시작했고, 광해군의 패륜 등 혼정(昏政)은 극에 달했다.

내암은 폐모론에 대해 별궁을 쓰는 것은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고 했으나 폐모 문제는 “군신자모(君臣子母) 명의는 하늘로부터 나온 것이니 바꿀 수 없다”는 대의를 들어 반대했다. 그는 이러한 폐모 반대의 뜻을 밝히고 임금의 간곡한 만류도 뿌리친 채 고향으로 내려갔다. 내암은 이후 생을 마칠 때까지 9년 동안 도성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다. 또 그가 83세에 영의정에 임명되자 세 차례 사직소를 낸 뒤 죽을 때까지 6년 동안 글로서 뜻을 전하지도 않았다.

문제는 이이첨의 국정 농단이었다. 그는 내암이 사직했지만 명의상 영상이라는 직권을 도용해 광해의 혼정을 부채질했다. 왕조실록인 1613년 [광해군 일기] 정초본 67권은 이와 관련해 “(정)인홍이 올린 차자는 모두 이이첨의 서보(書報)를 보고 올린 것이며 시일이 촉박할 때는 이이첨이 소(疏)를 자작해 대신 올리고 뒤에 인홍에게 알렸다”고 적었다. 내암은 이렇게 만년에 이이첨에 속아 산림에 묻혀 정치를 하지 않으면서도 정승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한 채 광해군 혼정의 책임을 뒤집어쓴 것이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서인 정권이 들어섰다. 광해 시기 이이첨 등 집정(執政) 대북은 모두 주살(誅殺)됐다. 89세 산림 정승 내암도 폐모살제(廢母殺弟, 어머니를 폐위하고 동생을 죽임)를 주도한 죄명을 쓰고 도성으로 압송된 지 3일 만에 처형됐다.

내암은 죽기 전 이렇게 공초(供招, 진술)를 남겼다. “스승에게 학문을 배워 군신부자의 대의가 무엇인지 알았다. 구원(丘園)에 물러가 있은 지 이십 년, 어지러운 세상일을 듣고 알려 하지도 않았다. 구십세 모진 목숨이 아직 죽지 않고 살아서 마침내 폐모 죄명을 얻으니, 이제 한 번 죽음에 돌아봐 슬플 건 없으나 장차 지하에서 무슨 면목으로 선왕을 뵙겠는가? 그것이 두려울 따름이다.”

상대 파당과 반목으로 지지 잃어


▎내암 정인홍 서거 400주기를 맞아 지난해 기념관 앞에 세워진 ‘정맥고풍변’ 기념비. / 사진:송의호
부음정 뒤 300여m 떨어진 탑골 뒷산에 내암의 묘가 있었다. 안내판에는 묘가 처음에는 알려지지 못하다가 1864년 현재 위치로 이장했다고 적혀 있다. 내암은 사후 285년이 지난 1908년(순종 2) 신원으로 관작이 회복됐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정인홍의 이름이 2000회 넘게 등장한다, 내암은 신병주 건국대 교수의 표현처럼 원칙과 신념을 위해 굽힘 없는 선비의 면모를 보였다. 나라가 위태로울 땐 의병으로 지키고, 신하로서 광해군에 충성을 다했으며, 제자로서 스승 남명에 대한 존숭을 일관되게 실천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인 그의 기질이 그런 장점들을 덮어 버렸다.

김충렬 교수는 “내암은 정계에서 서인과 반목해 절반을 잃었고 학계에서 퇴계학파와 반목해 또 절반을 잃어 적이 많아 형세가 외로워졌다”고 아쉬워했다. 거기다 산림에 묻혀 있으면서 여전히 조정 일에 관심을 두고 정쟁에 간여한 것도 불운을 불렀다고 지적한다. 내암에 대한 재평가는 지금도 진행형이다.

[박스기사] 단재 신채호가 4대 영웅이라 극찬한 내암

내암 서거 400주기 기념비 ‘정맥고풍변’에 담긴 뜻

합천군 가야면 내암 정인홍 기념관 앞에는 ‘정맥고풍변(正脈高風辨)’ 기념비가 새로 세워졌다. 지난해 10월 내암의 후손이 서거 400주기를 기념해 건립했다. 정맥고풍변은 2003년 진주 하세응 종가에서 발견된 필사본 [변무(辨誣)]에 들어 있는 내암의 글로, 김우옹의 죽음에 정구가 지은 만사를 반박하는 내용이다. 기념비 뒷면엔 조찬용 남명선생선양회장이 쓴 정맥고풍변의 주요 내용과 의미 등이 적혀 있다.

내암은 71세인 1606년(선조 39) 정맥고풍변을 지었다고 한다. 기념비 뒷면에 인용한 정맥고풍변의 일부는 이렇다. “스승 남명(조식)은 저술도 없이 은둔하고 남들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않은 연평(延平, 주자의 스승)처럼 중용의 도를 취했다.” “퇴계가 정맥의 지위에 도달했는지 알지 못한다.” “실낱만큼이라도 이르지 못했는데, 한강(정구)이 퇴계를 정맥이라고 칭한다면 아부한 것이거나, 분수를 모르고 인륜을 저버린 것이다. 사람을 논하려면 그 사람의 욕망이 다한 곳을 보라고 했다.”

정맥고풍변을 인용한 뒤엔 마지막에 단재 신채호의 평가를 덧붙였다. 단재는 남명과 내암이 “교조적으로 성리학만 논하는 폐단으로 나라의 근본이 무너졌다”고 일갈했다며 내암을 을지문덕, 최영, 이순신과 함께 ‘4대 영웅’으로 평가했다는 것이다.

-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

202403호 (2024.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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