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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의 19세기 미시사 탐구(14)] 조선시대 신분과 부의 상징이던 가마 

양반 이상 계층 운송수단… 고급 비단 사용해 사치 조장하기도 

타서는 안 되는 계층 상대로 금지령 내렸지만 명령 따르지 않아
1920년대 기본 사양은 40원… 옵션 적용하면 가격 세 배로 껑충


▎지난해 10월 8일 서울 종로구 창덕궁 앞에서 열린 ‘정조대왕 능행차 공동재현’ 행사에서 혜경궁홍씨 역을 맡은 이가 가마에 탄 채 시민들에게 인사하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승용차 번호판에서 지역 이름이 빠진 지 오래됐고, 관용차와 개인 소유 승용차를 구분하는 표시를 하지 않은 것도 오래됐다. 이제 승용차 번호판 색깔은 영업용 차량인지 그렇지 않은지를 구분하는 정도의 역할뿐이다. 최근에 업무용 승용차 번호판을 특정 색깔로 해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는 규정이 생겼는데, 고가의 업무용 차량을 사적으로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어느 사회나 마찬가지지만, 한국에서도 자동차가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일이 많다. 자동차를 갖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특수한 계층임을 나타내던 시대도 있었지만, 이런 시대는 지나갔다. 누구나 자신의 기호에 따라 승용차를 구매해 타는 시대가 됐다. 그러나 자동차를 통해 개성을 드러낼 수 있는 방법이 쉽지 않으므로, 희귀하고 값비싼 자동차로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는 사람이 많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사기꾼들은 거의 예외 없이 고급 승용차를 타는데, 상대방의 신뢰를 얻기 위해 고급 자동차가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언론에 보도되는 내용을 통해서 보더라도 상대방의 환심을 사기 위해 고급 승용차를 이용하는 일이 많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밖에도 연예인이나 프로 운동선수 같이 인기와 관련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도 고급 승용차를 타지 않을 수 없다고 한다.

자신의 수입에 비해 과도하게 비싼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사람이 많다는 말도 흔히 들을 수 있는데, 개인이 중요시되는 현대사회에서 이런 식의 비판이 과연 합당한 것인지는 의문이다. 만약 조선시대에 자동차가 있었다면 각자 신분과 계급에 따라 정해진 승용차를 타지 않으면 안 됐을 것이다. 조선시대 가마는 현대의 승용차와 비슷한 성격의 운송수단이다. 가마 관련 기록을 검토해 자동차가 나타나기 전의 탈것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생각을 알아보도록 한다.

조선은 왕을 중심으로 한 왕족을 제외하면 양반, 중인, 양민, 천민의 네 가지 신분으로 나눌 수 있다. 이 가운데 양반이 지배계층이고, 중인은 양반을 도와 실무를 담당한 계층이다. 그리고 양민과 천민은 피지배계층이라고 말할 수 있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계층은 왕족과 양반이고, 나머지 중인 이하는 원칙적으로 가마를 탈 자격이 없었다. 그리고 가마를 탈 수 있더라도, 각자 신분과 계층에 따라 탈 수 있는 가마의 종류가 정해져 있었다.

아무리 엄격하게 통제된 사회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는 언제나 틈이 있기 마련이다. 조선도 예외가 아니어서 가마를 탈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마를 타는 일이 자주 일어났다. 예를 들면 대궐 안에서 가마를 탈 수 있는 사람은 왕족과 극소수 최고위층 인사에 국한됐지만, 그런 자격이 없는 사람이 가마를 타서 문제가 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그리고 최하층 천민인 기생이 가마를 타는 일 또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중인 이하는 탈 수 없던 가마

고위 관료가 타는 가마에 관한 규정은 법전에 나와 있지만, 그 외의 자질구레한 규정은 그때그때 임금의 명령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면 숙종이 즉위하던 해(1674)에는 무신이 가마 타는 것을 금지하는 명령이 있었다. 무신은 활과 칼로 무장을 하고, 말을 타고 다니면서 나라를 지키는 임무를 맡은 사람인데, 이런 무신이 한가하게 가마를 타고 다닐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지다. 그러나 가마를 타다가 적발된 무신에 관한 기록이 매우 많은 것으로 보면 법령이 있더라도 제대로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 같다.

영조 때에도 정4품 이하는 가마를 탈 수 없다는 숙종 때 정한 규정이 계속 적용됐는데, 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는 보고가 올라온 일이 여러 차례 있었다. 예를 들면 영조 17년(1741) 종6품의 현감이나 찰방 같은 낮은 계급의 관리가 가마를 탄 것을 적발해 보고한 일이 있고, 영조 38년(1762)에는 무신이 가마를 탄 사건에 대해 자세히 조사하라는 명령을 내린 일이 있다.

정조가 즉위한 이후에도 가마와 관련된 기존 규정이 잘 지켜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정조 2년(1778) 기록을 보면 지방관으로 재직한 관리 대부분이 가마를 타는 규정을 어겼다고 한다. 지방관 가운데 2품 이상 벼슬이나 승지를 역임하지 않은 사람은 쌍교를 타지 못하게 돼 있었고, 4품 이하 지방관은 가마를 탈 수 없었지만, 이런 규정은 잘 지켜지지 않았던 것이 분명하다.

가마에 관한 규정을 어기는 일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심해져 19세기에는 가마에 관한 규정이 별 의미가 없을 지경이 됐다. 19세기 들어 가마 관련 규제는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된다. 그동안 문제가 됐던 자신의 신분이나 계급으로는 탈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가마를 타는 것만이 아니라, 이전에는 가마를 탈 수 없었던 계층의 사람들도 모두 가마를 타는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고종 16년(1879) 4월 10일 영의정 이최응은 임금에게 가마에 관한 다음과 같은 건의를 올렸다.

“조정의 법률에는 각 품계에 따라 타는 가마가 정해져 있으므로, 이를 어겨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요즈음 너도나도 보교(步轎)라고 하는 지붕이 있는 가마를 타고 다니는데, 이것은 엄격하게 금지해야 합니다.”

가마 관련 법령 잘 지켜지지 않아

영의정이 이렇게 건의를 하게 된 이유는 각자 자신의 신분과 계급에 맞는 가마를 이용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보교는 시골 부녀자나 늙고 병든 사람이 이용하는 가마였다. 그런데 조정 높은 벼슬의 관리들이 자신이 타야할 가마를 타지 않고 이 보교를 타고 있으며, 심지어 말을 타야하는 무관들도 말을 타지 않고 보교를 타고 다니는 것이 문제였다. 게다가 아랫사람들도 모두 이 보교를 타고 다녔다. 영의정 이최응은 사회 풍조가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는 것만을 생각해 각자의 신분과 계급에 맞지 않는 가마를 타는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고종은 영의정의 건의를 받아들여 보교를 금지하는 자세한 규정을 만들어 전국에 내려 보냈다. 이 규정의 핵심 내용은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1. 지붕이 있는 가마인 보교는 완전히 금지한다.

2. 가마 파는 가게에서는 보교를 팔거나 빌려줄 수 없다.

3. 이 명령을 위반하는 자는 곤장 100대와 중노동 3년의 처벌을 받는다.

4. 부녀자가 이 규정을 위반했을 때는 그 가장이 대신 벌을 받는다.

이 명령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이 감춰져 있는데, 보교를 없애려는 진짜 의도가 무엇인지라는 점이다. 보교를 없애는 것이 명령의 목적이라면 보교를 금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그런데 이 명령에서는 보교를 타서는 안 되는 계층을 하나하나 모두 열거했다. 예를 들면 서울과 지방의 기생, 내시와 각 궁에서 일하는 사람, 유생과 부녀자, 각 고을의 아전 등이 해당 계층이다.

영의정의 건의로 고종이 보교 금지령을 내린 가장 중요한 이유는 가마를 타서는 안 되는 사람들이 가마를 타는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은 바뀌고 있어서 이런 명령으로 가마를 타고 싶어 하는 백성의 욕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보교를 금지한다는 명령은 고종 때가 처음이 아니다. 19세기에 들어와서 순조, 헌종, 철종 때도 계속해서 보교 금지령이 있었지만 백성들이 명령을 따르지 않은 것이다.

영의정 이최응이 고종에게 보고하면서 강조한 내용 중 또 하나는 보교를 만드는 데 상당히 많은 돈이 든다는 점이었다. 보교는 타기 쉽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19세기 들어 인기 있는 가마가 됐다. 그런데 누구나 이 보교를 타게 되면서 가마를 새로 장만하려면 많은 돈이 들었다. 특히 남과 다르게 화려한 치장을 한 보교가 많아지면서 보교의 유행이 사치를 조장하게 됐다.

19세기 서울 회현동에는 가마를 팔거나 빌려주는 교자전(轎子廛)이 있었다. 이 교자전에서 파는 가마값이 얼마인지 알 수는 없지만, 19세기 말의 어떤 자료를 보면 180냥을 주고 가마 하나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쌀 한 가마를 살 수 있는 금액 정도다.

20세기 들어 기차나 자동차 같은 근대적 교통수단이 등장하면서 운송수단으로서 가마의 효용은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20세기 중반까지 가마는 여전히 중요한 쓰임새가 있었으니, 바로 혼례 때 신부가 타는 용도였다. 1920년대 일간지에서 가마 광고를 볼 수 있는데, 가마 상점에서 취급하는 물품은 주로 혼례 때 필요한 것이었다.

1920년 9월 16일 동아일보에 실린 가마 광고를 보면 네 명의 가마꾼이 드는 가마의 값이 40원에서 120원 사이라고 했다. 기본 재료만 쓰면 40원이지만, 고급 재료를 쓰고 갖가지 치장을 덧붙이면 가격이 세 배인 120원이 되는 것이다. 요즈음 승용차 가격에 대비해서 말한다면 기본 모델 값은 40원인데 옵션 비용이 80원이 되는 셈이다. 가마가 사치를 조장한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가마 하나 제작에 쌀 한 가마 가격


▎기산(箕山) 김준근의 풍속화. 대신이 금관과 조복을 갖춰 입고 홀(笏)을 두 손으로 모아 쥔 정자세로 왕궁으로 출근하고 있다.
가마를 사치스럽게 꾸미는 것과 관련한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있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려운데, [춘향전]에는 화려한 가마를 묘사한 내용이 나온다. 그 중 몇 가지를 보기로 한다.

가마의 지붕은 고급 비단으로 싸고, 가마 지붕의 꼭지는 선명한 붉은색으로 칠한다.

가마에 둘러치는 휘장은 겨울에는 담비의 모피로 만든다.

휘장을 받치는 대는 최고급 목재인 먹감나무를 쓴다.

가마 앞에 치는 발은, 전라도 담양에서 나는 대나무로 제작한다.

이 발에는 거북무늬를 넣고, 갖가지 장식을 붙인다.

그리고 가마만 이렇게 화려하게 장식하는 것이 아닌, 가마를 메고 가는 가마꾼도 훤칠하고 건장한 사람을 뽑아 화려한 의상을 입혀야 한다고 했다. 소설에 이런 내용이 나온다는 것은 당대 이와 같은 가마가 유행했음을 보여준다고 하겠다.

조선 사람에게 가마는 아주 일상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가마에 대한 자세한 기록을 해놓은 자료를 좀처럼 찾기 어렵다. 다만, 가마에 대한 구체적 묘사 기록은 19세기에 조선을 방문했던 외국인이 남긴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여러 자료 가운데 먼저 언더우드 부인이 써놓은 것을 보기로 한다.

릴리어스 호톤(Lillias Horton)은 1888년 의료선교사로 조선에 온 미국 여성이다. 그녀는 다음해 조선에서 언더우드 목사와 결혼했고, 1904년에는 [Fifteen Years among the Top-Nnots, or Life in Korea(상투쟁이들과 함께 한 15년, 또는 조선의 생활)]이라는 책을 냈다. 이 책에는 그녀가 경험한 가마에 관한 다양한 얘기가 들어 있다. 언더우드 부인은 조선의 가마가 편안하다고 했다.

신혼여행 때 자신이 탔던 가마를 묘사한 부분을 보자. 가마 지붕은 대나무로 만들었는데, 천장에 기름먹인 색종이를 발랐고, 파란색 천을 바른 양쪽 벽에는 색유리를 끼운 조그만 창이 나 있으며, 가마 앞면에는 걷어 올릴 수 있는 휘장을 쳤다고 했다. 그리고 방석을 바닥에 깔고 등에도 댔으며, 가마 안쪽으로는 외풍을 막기 위해 담요 같은 것을 둘렀고, 뜨거운 물을 담은 병과 발에 끼는 토시를 준비했으므로 상당히 편안했다고 했다.

언더우드 부인은 가마꾼에 대해서도 구체적으로 기록해 뒀다. 그녀가 탄 가마는 두 사람이 메고 가는 가마인데, 가마꾼은 네 사람이었다. 두 명이 한 조가 돼 10리쯤 가면 서로 교대했다. 그리고 10분에 한 번 정도 약 30초 동안 가마를 내려놓고 쉴 때, 예비 조는 가마 밑에 가마를 받치는 나무틀을 놓았다. 가마꾼들은 하루에 약 100리 이상을 가는데, 별로 지치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녀는 가마꾼들이 아주 재미있고 재치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고도 말했다.

1885년 [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조선, 고요한 아침의 나라)]라는 책을 펴낸 퍼시벌 로웰((Percival Lawrence Lowell)도 책에 자신의 가마 탄 경험을 기록한 바 있다. 그는 서양인에게 가마는 매우 불편한 탈것이라고 했는데, 서양인은 바닥에 앉는 문화가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했다. 로웰도 언더우드 부인과 마찬가지로 가마꾼은 두 사람인데, 교대하는 두 명이 함께 간다고 했다.

왕이 타던 가마 중 하나는 빈 가마


▎1907년 가마꾼들이 마님을 태우고 포목점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 뒤 몸종은 카메라 촬영에 놀란 표정을 짓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마를 탄 경험만이 아닌, 임금의 가마를 묘사한 외국인도 있다.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이라는 책으로 유명한 이사벨라 버드 비숍의 책 제3장의 제목은 ‘THE KUR-DONG’인데, 이것은 임금의 행차를 뜻하는 순우리말인 ‘거둥’을 발음 그대로 표기한 것이다. 제3장의 내용은 1894년 4월 11일(음력 3월 6일) 고종의 동구릉 행차를 자세히 묘사한 것으로, 그녀는 여기에 임금의 행차를 구경하고 난 자신의 감상도 남겨뒀다. 비숍은 고종의 가마를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왕의 가마 둘이 나오는데, 앞의 가마는 붉은색 비단으로 장식한 가마 지붕이 있는 것으로 아무도 타지 않았다. 이것은 아마도 암살자의 저격을 대비한 것으로 보인다. 이 빈 가마 뒤로 붉은 옷을 입은 40명의 가마꾼이 메고 오는 왕이 탄 가마가 나온다. 붉은색의 이 가마는 지붕에도 장식을 했고, 가마 양 옆으로는 햇빛을 가릴 수 있도록 차양도 친 극히 화려한 것이었다.”

이 대목에서 흥미로운 것은 빈 가마에 대한 그녀의 설명이다. 임금이 타는 가마는 연(輦)이라는 별도의 명칭이 있다. 공식 행차에서는 임금이 타는 가마 앞에 빈 가마가 먼저 가는데, 이 빈 가마는 부련(副輦)이라고 부르고, 실제로 임금이 타고 있는 가마는 정련(正輦)이라고 한다. 부련이 암살에 대비한 것이라는 비숍의 추정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다. 진시황이 행차할 때 여러 대의 수레가 함께 움직여 어느 수레에 황제가 탔는지 모르게 한 것이나 요즈음 대통령이 헬리콥터를 탈 때 두 대 이상의 헬기를 띄우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마를 타 본 경험이 있는 언더우드 부인이나 퍼시벌 로웰이 남긴 기록은 가마에 관한 구체적 내용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이들이 남긴 글을 통해 장거리 여행에서 가마꾼들이 어떤 방식으로 가마를 메고 갔는지 알 수 있다. 전승이 끊어진 어떤 분야의 과거를 재현해내려고 할 때 우리가 참고할 수 있는 것이 기록뿐이라는 것은 이들이 남긴 글을 통해서도 분명해진다.

만약 [춘향전]이 없었다면 겨울에 가마에 치는 휘장을 모피로 꾸몄다는 사실을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19세기 말 조선 영의정이 가마의 사치를 걱정했다는 것은 [춘향전]에 나오는 가마의 사치스러운 치장을 볼 때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19세기 소설을 잘 읽어보면 지금은 전하지 않는 당대의 미세한 사실을 많이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 이윤석 - 한국 고전문학 연구자다. 연세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고, 2016년 연세대 국어국문학과에서 정년 퇴임했다. [홍길동전]과 [춘향전] 같은 고전소설을 연구해서 기존의 잘못을 바로잡았다. [홍길동전] 이본(異本) 30여 종 가운데 원본의 흔적을 찾아내 복원했을 뿐만 아니라 작품 해석 방법을 서술했다. 고전소설과 관련된 저서 30여 권과 논문 80여편이 있다. 최근에는 [홍길동전의 작자는 허균이 아니다]와 같은 대중서적도 썼다.

202404호 (2024.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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