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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람] '허송세월' 작가 김훈 

김훈의 허송세월 독자들에겐 화양연화다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단번에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며 작가 김훈의 이름값 톡톡
‘생활은 크구나’… 철모 똥바가지 보고 느낀 것을 책 첫 장에


▎소설가 김훈이 입담을 뽐냈다. 책 [허송세월]의 한 대목은 이렇다. “햇볕을 쪼이며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 사진:나남
김훈(76)이 5년 만에 에세이집을 냈다. [허송세월]이다. 단번에 예스24와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2년 전 펴낸 소설 [하얼빈]에 이어 이번에도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혀가 빠지게 일했던 세월도 돌이켜보면 헛되어 보이는데, 햇볕을 쬐면서 허송세월할 때 내 몸과 마음은 빛과 볕으로 가득 찬다. 나는 허송세월로 바쁘다.” 책 [허송세월]의 한 대목이다. 다분히 아이러니한 제목이다.

출판사가 소개한 서평은 이러했다. “늙어 가는 일의 즐거움을 논하는 글로 운을 떼어, 도로변의 투명벽에 부딪혀 죽는 새들과 철모를 남기고 간 옛 병사를 향한 헌사로 닫는 45편의 산문은 ‘본래 스스로 그러한 운명’에 포박되어 있던 가엾은 중생의 말에 바치는 송가다. 꽃과 새와 밥과 꿈에 뒤엉킨 이 시대의 기쁨과 슬픔을 애달프면서도 때로는 웃음기 있게, 명료하면서도 섬세하게 그려낸 언어의 짜임이 눈부시다.” 책을 읽어봤더니 ‘언어의 짜임이 눈부신’ 것은 사실이었다. 이런 문장이 있었다.

“와인은 현실을 서서히 지우면서 다가온다. 와인의 취기는 비논리적이고 두루뭉술하다… 막걸리는 생활의 술이다. 막걸리는 술과 밥의 중간쯤 되는 자리에 있다… 소주는 아귀다툼하고 희로애락하고 생로병사하는 아수라의 술이다.” 무릎을 쳤다. 기껏해야 ‘목마와 숙녀’를 읊조리고 조지훈의 ‘주도유단’을 들먹였던 치기 어린 술꾼들의 방자함을 날려버리는 촌철살인의 문장이 아닌가!

출판사 ‘나남’에 물었더니 독자들과 만나는 행사가 예정돼 있다고 했다. “삶의 어쩔 수 없는 비애와 아름다움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우리 시대의 문장가를 만나볼 시간을 준비했습니다”라는 소개 글이 발길을 당겼다. 7월 24일 저녁,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대산홀 객석 300여 석이 꽉 찼다. 1000여 명의 참가 신청을 받아 추첨을 거친 사람들이라고 했다. 멀리 부산에서, 광주에서 차표를 끊고 발품을 파는 수고를 마다치 않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연필로 원고지에 쓰는 김훈 빈티지


▎나남이 펴낸 [허송세월]. 출간 즉시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다. / 사진:나남
왜 사람들은 김훈을 만나려 할까? AI 광풍이 부는 이 시대에 그는 연필로 글을 쓴다. A4 종이도, 대학노트도 아니다. 원고지에 꾹꾹 눌러 쓴다. 사각사각 원고지 위를 유영하는 펜과 지우개를 생각해보라. 면도칼로 연필을 깎는 노 작가의 손…. 김훈의 말마따나 “내가 나의 글을 내 몸으로, 내 육체로 밀고 나간다는 확실한 느낌” 때문에 연필로 쓰는 것이지만 젊은 MZ들에게는 빈티지다. 신기한 레트로(복고)의 세계다. 중년의 김훈이 카페에서 조용히 차를 마시며 상념에 잠겼다가 글을 써내려가는 모습에 심쿵했다는 작가 지망생이나 여성 독자도 여럿 보았다. 김훈은 컴퓨터를 모른다. 스마트폰도 사용하지 않는다. 피처 폰으로 전화를 받고 전화를 준다. 문자메시지를 읽을 줄 알지만, 문자를 보내는 데는 익숙하지 못하다. 문자로 연락하면 전화로 답이 올 때가 많다. 출판 편집자들이 그의 원고를 받으려면 팩스로 수차례 오고 가는 불편한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그런 골동품 같은 김훈을 멋있게 보는 이들이 많다.

김훈은 선한 품성의 소유자임이 분명하다. 전설적인 무협소설가 김광주로 더 잘 알려진 부친이 말년에 병석에 누워 연재할 소설 대목을 구술할 때 김훈이 옆에 앉아 받아 적었다. 그는 이른 아침 아버지가 드실 해장국을 사 오다가 국그릇이 엎어져 울던, 어릴 때의 자신을 말하곤 했다. 대학에 합격한 여동생을 위해 다니던 학과를 중퇴해 학력이 고졸이 된 것도 후회하지 않는 그다. 삶의 비애를 긍정하는 김훈은 위선이 아닌 위악을 자처할 때가 있다. 굳이 ‘마초’로 비난받을 때가 그렇다. 기자가 보기에 김훈은 다소 표현이 서툰 휴머니스트일 뿐이다. 자신의 노동으로 글을 쓰는 정직한 근로자다. 육체노동의 고달픔을 즐길 줄 알며, 누구보다 잘 관찰하고, 깊이 생각해 쓰는 작가의 본래 일에 충실하다.

진리는 말하여질 수 없다고 한다. 하물며 글로 전할 수도 없을 터이다. 살아내고 이겨낸 자만이 눈빛과 몸짓으로 알아챌 뿐이다. 그런데 김훈은 쓰고 또 쓴다. 뭘 말하고 싶었을까? 토크쇼는 나남 박해현 주필이 김훈 작가에게 묻고 답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역시 김훈’이라고 할 만한 몇 가지 인상적인 대화를 인용한다.


▎김훈과 독자들이 만난 7월 24일 토크쇼 장면. 광화문 교보빌딩 23층 대산홀 객석 300여 석이 꽉 찼다. / 사진:나남
책에 보면 철모를 이용한 똥바가지 얘기가 나오잖아요. 그 똥바가지 얘기를 굳이 쓰신 이유는?

“파주에 가면 민속박물관이 있어요. 생활과 직접 관련된 것들이 많은데, 철모로 만든 똥바가지가 있었어요. 정말 큰 충격을 받았어요. 나는 그 철모를 무슨 병사가 하나 전사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 철모가 돌아다니다가 생활용품으로 쓰이고 있는 거야. 그 똥바가지가 아주 고귀하게 느껴졌어요. 그래서 그 박물관에 가서 똥 바구니 사진을 얻어 와서 책 맨 앞에다가 모셔온 거예요. 우리가 겪은 전쟁의 고통과 죄악을 우리가 생활로써 이렇게 극복해 나가는, 평화와 긍정의 정신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인간의 생활이죠. ‘생활은 크구나’ 라고 글자 6개를 내가 썼어요. 그냥 주어와 술어로 군더더기 없이.” ([허송세월] 첫 장엔 국립민속박물관의 철모 똥바가지 사진이 실려 있다. 김훈은 그 옆에 ‘생활은 크구나’ 여섯 글자를 자신의 손으로 썼다.)

책이 '허송세월'인데요. 좀 해학적이면서 역설적인데, 허송세월이란 제목을 정한 까닭이 궁금합니다.

“그건 일반 사람들이 지나간 세월을 돌이켜볼 때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공허감 같은 것입니다. 가령 제가 건강이 좋지 않아 술을 못 먹게 됐거든요. 근데 가끔 이렇게 위스키를 한 방울 입에다 대면 야 이게 진짜 그 맛이구나! 지금까지는 이걸 모르고 그 많은 술을 내가 먹었구나 싶어 이게 허송세월을 한 거구나 알게 돼요…. 돌이켜 보면 대개 그렇잖아요.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아주 일상적이고 흔한 감정들입니다.”

“교양 있는 언어로 말하는 훈련 필요하다”


▎김훈이 고귀한 인간의 생활을 느꼈다는 철모로 만든 똥바가지. 김훈은 ‘생활은 크구나’ 라는 6개 글자로 표현했다. / 사진:나남
책에 여러 단어들이 나오는데, 밥과 똥, 새와 꽃, 글과 책 이렇게 한 글자 단어가 많습니다. 그런 한 글자 언어에 애착을 가지신 이유가 있나요?

“한 음절짜리 우리말을 나는 굉장히 소중하게 생각해요. 명사로는 ‘달, 별, 밥, 똥, 꽃, 산, 강, 물’, 동사로는 ‘없다. 먹다, 하다, 넣다, 꽂다. 빻다, 치다, 밀다, 깎다, 찌다. 찌르다’ 이런 말은 인간과 삶의 직접적인 관계에서 생기는 단어라고 생각해요. 가장 몸에 가까운 동작을 표현하는 단어죠. 김소월 시인의 ‘산유화’라는 시가 있죠. ‘산에는 꽃 피네 꽃이 피네 갈 봄 여름 없이 꽃이 피네…’ 한 줄짜리 동사 4개와 명사 3개를 가지고 자연이 순환한 그 모습을 그리는 거예요. 이건 김소월이 아니면 못 해요(웃음). 그런 단순한 언어들이 갖는 힘은 정말 고귀한 것이죠.”

책에 보면 불신과 증오와 저주가 우리 사회를 지배해 왔다고 쓰고 있어요.

“우리 시대에 가장 고민스러운 문제가 ‘말(言)’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이 소통하기 위해서 말을 하는데 말을 하면 할수록 단절이 돼버려요.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도 믿지 않는 세상이 돼 버렸어요. 그러면 어떻게 민주주의를 합니까? 민주주의라는 것은 인간이 말로써 소통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만 가능한 건데…. 인간에게는 ‘듣기’와 ‘말하기’ 두 개가 있는 거예요. 듣기라는 것은 ‘읽기’와 같은 건데, 내가 외계의 것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죠. 요즘 우리 사회언어의 병은, 이 듣기가 안 된다는 것이죠. 저 사람이 하는 말을 내가 듣고 소화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말을 해야 하는데, 그걸 안 듣고 내 말만 하니까 소통이 안 되는 것이죠…. 특히 자기의 정치·사회적 견해를 말할 때 교양 있는 언어로 말을 했으면 좋겠어요. 우리가 정치·사회적인 의견을 말할 때는 반드시 거친 말을 쓰고 공격적인 말을 쓰잖아요. 그런 것들이 나는 큰 문제라고 생각해요. ‘교양 있는 말을 하고 고운 말과 순한 말을 써야 된다.’ ‘듣기에 바탕을 둬서 말하기와 소통 기능을 회복시켜야 한다.’ 저는 그런 고민을 하는 것이죠.”

김훈의 말소리는 때론 무대 밖으로 퍼지지 않아 웅얼거림이 있었고, 중간중간 말이 새는 듯 들렸다. 그래도 강연 도중 많이 웃었다. 그의 애독자들이 대부분인 관객들에게 적극적으로 반응했고 세상을 달관한 듯한 천진한 미소도 보였다. 아무래도 코로나 19를 겪으며 죽음의 강을 건넜다 돌아온 여유일 것이다.

김훈은 “오늘 말을 많이 했어요. 집에 가면 반성해요. 난 그냥 나의 편견과 내 생각을 가감 없이 말할 뿐이지요. 그렇게 말할 때 편해요. 그러니까 제 말은 저 사람이 무슨 진리나 원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 생각을 그냥 편하게 주저 없이 말한 것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라고 자신을 낮췄다.

“기득권에 저항하고 해답을 요구하라”


▎토크쇼는 나남출판 박해현(왼쪽) 주필이 김훈 작가에게 묻고 답하는 식으로 이뤄졌다. 두 사람 다 기자 출신의 문장가들이다. / 사진:나남
하지만 남들이 보지 않는 것들, 놓치는 것들에서 의미를 발견하느라 깊이 관찰하고 생각하며 허송세월 보내는 김훈, 김훈은 언어의 ‘뼈다귀’만 있는 딱딱한 보고서나 기록물을 소중하게 여기며 공부하는 자신이 허송세월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수고로 만들어낸 작품 속 세상은 독자들에겐 다시는 만나기 힘든 화양연화(花樣年華)일 터이다.

대화의 후반부. 객석에서 딸아이와 함께 왔다는 중년의 애독자가 이런 질문을 했다. “생각과 관찰력이 여전히 청춘이신 노 작가님께서 지금 젊은 대학생들에게 보내는 희망과 격려의 메시지 한마디만 해달라.” 그러자 김훈이 이렇게 말했다.

“지금 젊은이들이 겪고 있는 고통의 대부분은(늙은) 우리 세대가 만들어 놓은 거예요. 우리 세대는 국민소득 80달러에서 지금의 4만 달러를 건설하는 것이었고, 눈부시게 성공을 거둔 것이죠.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이런 말도 못할 악을 저지른 겁니다. 사회악, 차별, 억압, 독재, 비리… 밑바닥에 깔린 이 악들을 해체하는 것이 젊은 세대가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이 기득권들이 어떤 도덕적인 각성에 도달해가지고 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를 바라면 안 돼요. 세상에 그런 일은 절대 없어요. 젊은이들은 거기에 문제를 제기해야 되고, 저항해야 하고 해답을 요구해야 돼요… 내가 젊은 세대들한테 느끼는 불만 중에 하나는 나보다도 합리적이고 신문물에 빨리 적응하고 첨단 쪽으로 가는 기능은 뛰어나지만 이 무질서와 혼란을 돌파해 나갈 능력이 없어요. 난관을 극복하는 열정이 우리 세대보다 모자라요. 인정하실 겁니다.”

그런데 김훈이 모르는 게 있다. 지난해 조사에 따르면 성인 10명 가운데 6명이 1년간 책을 한 권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지난 6월 닷새 동안 열린 도서전에는 15만 명이 다녀갔다. 그중 상당수가 2030들이었다고 한다. 그렇다. 그래도 MZ들이 희망이다. 그런 의미에서 김훈의 허송세월은 절대 허송세월이 아니다. 부디 건강을 잘 챙겨서 우리 시대의 장인(匠人) 김훈의 글을 더 만날 수 있기를, 돌아오는 차 안에서 달에 빌어 보았다.

- 나권일 월간중앙 편집장 na.kwonil@joongang.co.kr

202409호 (2024.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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