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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위기는 현장에서 보인다 

전기 사용량 급감했다면 위기 … CEO의 자질 중요
유동성 위기 옥석 가리기 

유동성 위기에 시달리는 기업이 늘고 있다. 한편에선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리는 기업도 늘고 있다. 위기설이 난무하는 시장에서 옥석을 가려내는 방법은 없을까? 또 당장은 유동성이 좋지 않지만 미래의 가치가 큰 기업을 찾아낼 기준은 뭘까? 재무제표가 말해주지 않는 미래 가치는 현장에서 찾을 수 있다.

"아무리 설명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아예 대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우리는 유동성 위기라고 할 만한 상황이 아니다’라고 말하면 또 꼬투리를 잡아 의심할 게 뻔하니까요. 단지 차입금이 많다는 이유만으로 유동성 위기를 의심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기준 아닙니까? 현금 보유가 중요한 요즘 같은 때엔 돈이 있어도 차입금을 당장 갚을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차입금이 많은 것을 위기의 소지로 판단하는 것보다는 차입금을 갚아갈 수 있느냐에 초점을 맞춰야 하는 것 아닙니까?”

몇 달 전부터 ‘유동성 위기설’에 시달리고 있는 A기업의 CEO가 이렇게 토로했다. 현재 정부가 수십 조 원대의 중소기업 유동성 지원 대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중소기업들은 계속 자금난을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금융기관도 전반적으로 영업지표가 악화돼 몸을 사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상환 능력이 확실치 않은 기업에 돈을 선뜻 빌려주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지난해 연간 시중은행의 중소기업 원화 대출 증가액은 52조4000억원으로 2007년 증가액 68조2000억원보다 23% 줄었다.

CEO의 자질이 기업 신뢰도 높여

특히 경기 침체가 본격화된 하반기부터 대출액이 계속 줄고 있다. 현대자동차 매출이 몇 10% 줄어든다면 현대차에 납품하는 1, 2차 협력 중소기업 매출도 비슷한 폭으로 감소하게 마련이다. 실적이 나빠지면 대출을 받지 못하게 되니 중소기업의 유동성 위기는 더욱 심각해질 수밖에 없다.

현재 조선업종 중소기업은 여신이 거의 막혔다고 보면 될 정도다. 한 시중은행의 지점장은 “구체적 수치로는 언급할 수 없어도 대출 가능한 중소기업 수가 많이 줄었다”고 말했다. 대출 때문에 속이 타는 것은 지점장도 마찬가지다. 지금과 같은 시기에 투자 및 여신 거래기업을 발굴해 경쟁우위를 확보해야 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은행은 실적을 채우기 위해 우량 중소기업들에 “돈을 빌려가라”고 채근할 뿐, 정작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에 기회를 주지는 못하고 있다. 우량하지만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에 돈을 빌려준다면 은행에나 기업에나 위기가 기회가 될 터인데 말이다.

한 시중은행 시점장은 “현재 긴급히 수혈 받으면 회생가능성이 높고 성장성도 있으나 불확실한 시대인지라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결국 믿을 건 숫자밖에 없다”고 말했다. ‘위기의 시대, 어떤 기업에 돈을 빌려줘야 할까.’ 이런 과제를 놓고 최근 기업은행과 신한은행 등은 지점장과 심사역을 대상으로 강연회를 열었다. ‘신용위험평가와 위기관리에 있어서의 새로운 의사결정’‘리스크 함정시대, 리스크 관리와 마케팅 전략’이 강연의 제목이다.

CEO 자질이 핵심 대출 결정기준

강연의 내용을 한마디로 정리하면 ‘재무제표상의 숫자 자체보다 ‘왜’를 분석하고 현장의 징후를 살펴 대출 가능한 기업을 찾아보자’는 것이다. 강연자인 이정조 리스크컨설팅 코리아 대표는 “2008년의 자료로 지금의 경영상황을 온전히 판단하기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했다.

경제 여건이 워낙 많이 바뀌었기 때문에 지난해 9월 말 기준의 회계자료를 들여다볼 경우 엉뚱한 평가 결과가 나올 수 있다는 말이다. 현재 은행에서 대출심사를 할 때 보통 상환능력을 점검하는데, 이때 중요하게 보는 것이 유동비율, 당좌비율, 부채비율 등이다. 그러나 이 대표는 “유동성이나 당좌비율 등은 교과서에나 나오는 지표일 뿐”이라며 “금융 쓰나미가 덮쳤을 때에는 현장에서 미래 성장가치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예를 들어 요즘 같은 때라면 외상으로 물건을 사느니 현금으로 사 값을 할인받으려는 회사가 있을 수 있다. 이때 매입채무액이 줄어들면서 현금흐름이 나빠질 수 있는 것이다. 숫자 자체를 보지 말고 회사의 재무정책과 연관해 ‘왜’를 볼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 이 대표의 주장이다. 또 만약 최근 재고가 급격히 증가했다면 처리 가능한 자산이 늘어 유동비율은 증가하고 현금흐름은 나빠질 수 있다.

이 때 금융기관은 회사의 사정에 따라 어떤 지표로 판단해야 하는지 알아야 할 것이다. 이 대표는 “재무제표상 숫자가 왜 나왔는지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현장을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현장에서는 숫자 이면에 가려진 위험 징후들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세금, 통신료, 의료보험료, 국민연금 등을 연체하고 있다든지, 오는 2분기 이후 전기 사용량이 급격히 줄었다면 심각한 유동성 위기가 곧 닥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재무적 기준 외에 지점장들이 대출 결정기준으로 많이 보는 것이 CEO의 자질이다. 특히 공인회계사의 검증을 받지 않는 회사라면 경영자의 자질이 중요한 평가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이 대표는 지점장을 대상으로 강연할 때 특히 경영자의 경험을 중시하라고 강조한다.
기업의 유동성 위기는 위기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분명한 것은 재무제표는 과거를 말해준다는 것이다. 기업의 미래가치는 현장과 사람에 있다.

현장에서 드러나는 유동성 위기 전조

한 건설회사의 부도로 공사가 중단된 모 지방 사업장의 썰렁한 모습.
-주거래은행이 자주 바뀐다
-세금, 통신료, 의료보험료, 국민연금 등을 연체하고 있다
-신용관리가 철저한 금융회사나 거래기업이 최근 들어 거래를 중단했다
-보증기관의 기피로 회사채의 차환 발행이 불가능해졌다
-용도가 불확실한 자금의 차입을 신청한다
-주요 거래기업이 이탈하거나 판매거래 규모 축소 등 거래조건이 악화되고 있다
-하청기업 확보에 어려움이 있다
-본업과 다른 거래가 늘었으며 무엇이 본업인지 확실하지 않다
-판매거래처의 산업이 심각한 불황에 허덕이고 극단적인 할인판매를 시작했다
-과거와 달리 월별로 판매현황이 차이가 많이 난다
-화재보험 등 필수적인 보험에 가입돼 있지 않다
-계열기업이 규모에 맞지 않게 영업에서 많은 적자를 내고 있다
-중소·중견기업이 사옥 신축 같은 수익성이 없는 부문에 무리하게 투자했다
-전기 사용량이 급격히 줄었다
-머니 게임과 재테크에만 집중한다

위기의 CEO를 골라내는 법

-명함에 회사 외의 보직이 많다
-현장보다 유명인과의 교류가 많고 명예를 좇는다
-주가조작 또는 회계 투명성 문제 등 윤리 문제가 있다
-실무경험이 없거나 현장경영을 등한시한다
-잡지 표지에 자주 등장하거나 자신의 성공사례를 저술한다
-사생활이 복잡하다
-자금 담당 핵심 인물이 최근 퇴사했다면 그 이유를 파악하라
자료: 리스크컨설팅코리아


973호 (2009.0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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