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企業은 괴롭다 

불황기 복합 스트레스 

정부가 기업을 자꾸 사면초가로 몰고 있다. 정치권은 해달라는 규제 완화는 내팽개치고 정쟁에만 매달린다. 투자와 고용 압박에 시달리는 것도 모자라, 시장엔 ‘악성 루머’가 떠돈다. 힘을 내야 할 기업은 힘이 빠지고 스트레스만 늘어간다.

'우리는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지난날 정부가 전 국민에게 암기를 강요했던 국민교육헌장의 첫 구절이다. 요즘 정부와 정치권 심정이라면, 이렇게 바꾸고 싶지 않을까?

‘기업은 투자와 고용의 사회적 사명을 띠고 이 땅에서 태어났다. 출총제 폐지해준 정부의 고마움을 되살려, 안으로 일자리 나누기에 힘쓰고 밖으로 경제성장률 위한 투자에 이바지할 때다. 이에 기업의 나아갈 바를 밝혀 경영의 지표로 삼는다’.

최근 한 신문이 대·중소기업 CEO를 대상으로 조사했더니 백 명 중 아흔다섯 명이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답했다. 쉰다섯 명은 밤잠을 설친단다. 전에 비해 짜증이나 화가 늘어났다고 답한 CEO도 절반에 달했다.

자고로 정치인 만나 반가운 기업인 없다

여느 때 같았다면 엄살이 심하다고 할 수도 있다. 그간 많은 기업이 엄살·엄포용으로 ‘비상 경영’이란 표현을 써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경제학자 킨들버거는 경제위기를 “불경기와는 달리 예상하지 못한 충격이 발생해 경제가 전체적으로 붕괴하거나 기능이 마비되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상황”이라고 정의했다.

지금이 그렇다. 한 경영컨설턴트의 말대로 “베테랑 CEO도 정신 못 차리는 때”다. 이 마당에 정치가는 기업을 향해 혀를 찬다. ‘혼자 살자고 금고에 돈 잔뜩 쌓아 놓고 나라가 어려운데 투자도 안 한다’는 투다. 반가울 리 없는 만남을 갖자고 기업 CEO에게 시간 좀 내라는 정치인과 관료도 점차 늘고 있다.

자고로 정치인 만나 반가운 기업인은 없다. 왜? 대부분 손해 보는 장사니까. 돈 풀라는 것도 모자라 채용을 늘리라는 압박도 거세다. 일자리 나누기에 동참하라고 해서 신입사원 초임이라도 깎겠다고 했더니 욕 세례만 더 늘었다. 채용시즌이 다 끝난 마당에 민간경제연구소장 출신으로 기업 사정을 알 만한 장관은 경제단체장과 TV카메라 앞에서 “신규 채용 계획을 조속히 발표해 달라”고 했다. 채용 계획은 자판기가 아니다.

요즘 공장가동률이 60%다. 잘나가던 반도체·디스플레이 투자가 올해 40%나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국내 600대 기업의 올해 투자계획은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지난 4분기에 이어 올 1분기는 ‘실적 전망’이 두려울 정도라는 게 증권가의 얘기다. 하지만 수천, 수만 명씩 감원하는 세계적인 기업과 달리 감원의 ‘감’자도 잘 꺼내지 못하는 것이 요즘 한국 기업이다.

정치가나 경제관료 입장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다. 시차 고민도 있을 것이다. 정부가 ‘수퍼추경’ 30조~50조원을 동원한다고 해도 당장 효과가 나는 것도 아니다. 정책 시차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외부경제 충격에 가장 둔감한 게 정책 당국이다. 충격을 인지하고 부랴부랴 정책 만들고 국회 동의 얻어 실제 집행돼 효과를 내는 데 많은 시간이 걸린다.

반면 기업은 빠르다. 정부가 기업에 투자와 채용을 권유하며 ‘빨리 빨리’를 강조하는 이유다. 기업에서 일자리를 늘려주면 당장 내년 정부가 내놓을 성적표용 숫자에 상당한 도움이 된다. 배구로 따지면 기업에 시간차 공격을 해달라는 것인데 기업은 그럴 여력이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물론 정부와 정치인에게 이번 기회에 국가 미래 성장을 위한 ‘정치적 사리분별’을 발휘해 달라고 하기도 어렵다. 원래 1억원짜리 일자리 10개 만드는 것보다 1000만원짜리 일자리 100개 만드는 것을 선택하는 게 정치가다. 돈 쓰는 방식도 기업인과 다르다. 정부나 정치인은 정책 효과가 잘 드러나지 않는 교육, 의료, 국방 분야보다는 토목이나 공공근로같이 효과를 쉽게 보여줄 수 있는 곳을 선호한다.


외환위기 때 정부는 국민의 희생을 강요했다. 그땐 기업이 다 무너질 판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우리 기업이 체질을 바꾸고 체력을 키워 최근 경제위기에도 선방하고 있는 것 같으니, 정부는 기업에 희생을 요구한다.

10년 전에 국민이 희생했으니, 지금은 기업이 맡으라고? 경제는 누군가 손실을 보면 누가 이익을 보는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기업이 손실을 보면 국민도, 나라도 손실을 본다. 이 점이 간과돼서는 안 된다.

월 단위 시나리오 경영해도 불안한 판

상식이지만 자원 배분을 시장에 맡기는 것이 시장경제다. 기업이 제각각 여력에 따라 투자하고 사람을 뽑는 게 시장경제에 맞는 자원 배분이다. 투자하지 말라고 해도 ‘기회’가 보이면 베팅하는 게 기업이다.

필요하면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찾아가 인재를 뽑아 오는 것이 기업이다. 그렇지 않아도 기업은 요즘 스트레스투성이다. 월 단위 시나리오 경영을 해도 불안한 판이다. 잘나가던 기업이 ‘악성 루머’에 휘청하고, 줄도산설이 끊이지 않는다.

일부 대기업까지 ‘유동성 위기설’이 도는 마당에 중소기업은 피가 마른다. 이 와중에, 기업 경영에 방해가 되니 풀어달라는 규제는 국회에서 또 잠을 잔다. 그래서 기업은 괴롭다. CEO는 우울하다.

979호 (2009.0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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