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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격+가치’에 지갑 활짝 연다 

가치소비族 전성시대 

조득진 기자
아울렛·홈쇼핑·중고 매장 승승장구 취미·스포츠·힐링엔 아낌 없이 투자




경기 침체로 백화점 성장률은 제자리 걸음이다. 하지만 아울렛·홈쇼핑은 다르다. 매출이 급증했다. 불황에도 욕구나 취향을 포기하지 않고 가격과 만족도를 세밀히 따지는 ‘가치소비’가 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중고 매장에선 별 게 다 팔린다. 명품·승용차·가구는 물론 속옷을 사는 소비자도 늘었다. 이런 소비 트렌드에 맞춰 기업도 변신을 거듭했다. ‘서브스크립션 서비스’ 등 새로운 유통 행태가 속속 등장했다.

다음 네 문제를 풀어보자.

1. 올해 계획 중인 백화점 신규 출점 수는?

2. 롯데가 서울역 콩코스백화점을 인수해 오픈한 매장 형태는?

3. 지난해 주요 홈쇼핑 회사의 전년 대비 평균 매출 신장률은?


4. SK엔카 등 중고차 사이트에서 최근 인기 높은 차종은?

최근 소비 트렌드를 읽을 수 있는 문제들이다. 답을 내보면 1번 없다, 2번 아울렛, 3번 16.4%, 4번 1998년식 마티즈다. 불황이 이어지면서 소비성향도 바뀌었다. 백화점을 찾지 않고 지갑을 닫는 ‘소비 회피’, 아울렛이나 홈쇼핑에서 합리적인 가격으로 만족도를 높이려는 ‘우회 소비’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중고차 매장에선 유지비가 적게 드는 경차가 인기다. 평소 절약이 몸에 밴 생활을 하지만 꼭 필요하고 가치가 있다고 여기는 상품을 살 땐 돈을 아끼지 않는 ‘가치소비’가 저성장 시대 새로운 소비 트렌드로 뿌리 내린 것이다.

고급 소비의 대명사인 백화점은 1997년 외환위기,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에도 굴하지 않고 신규 출점을 이어왔다. 그러나 올해는 새로운 백화점 등장을 보기 어려울 전망이다. 업계에 따르면 올해 점포 개장을 계획 중인 백화점은 한 곳도 없는 것으로 파악됐다. 애초 롯데백화점의 경기 수원점이 예정됐지만 잠정 연기했다. 백화점 신규 출점이 한 곳도 없는 것은 1996년 이후 17년만이다. 지난해만 해도 롯데백화점 경기 평촌점, 신세계백화점 경기 의정부점, 현대백화점 충청점이 신규 출점했다.

지난해 백화점 업계의 매출 성장률은 큰 폭으로 줄었다. 롯데백화점은 전년 대비 성장률이 3분의 1 수준에 그쳤다. 신세계는 절반, 현대백화점은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올 들어서도 실적이 신통찮다. 롯데백화점은 1~2월 매출 신장률이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1.9% 감소했다. 현대백화점은 1.8%, 신세계백화점은 0.4%로 제자리 걸음을 했다. 경기 악화로 인해 비싼 백화점을 찾는 소비자들이 줄었기 때문이다.

백화점 고객 가운데 상당수는 아울렛·홈쇼핑·중고매장 등으로 옮겨갔다. 백화점에서는 제품을 구경만 하고, 아울렛과 온라인에서 사는 이른바 ‘쇼루밍(Show-rooming)족’이 늘어난 것이다. 직장인 홍은영(41)씨도 같은 경우다. 홍씨는 “예전에는 한두 달에 한번 정도는 백화점에서 쇼핑을 했는데 요즘엔 윈도 쇼핑만 한다”며 “백화점에서는 입어보거나 만져보고, 나중에 온라인 쇼핑몰이나 아울렛을 찾아 비슷한 제품을 구매한다”고 말했다.

아울렛과 홈쇼핑은 전에 없는 호황을 누린다. 롯데백화점이 운영 중인 김해·파주 프리미엄아울렛과 청주 등 도심형 아울렛 네 곳

의 지난해 매출은 1조원을 기록했다. 2011년 매출(5700억원)보다 75% 늘었다. 마리오아울렛·W몰 등 서울 가산동 아울렛들의 매출도 전년 대비 10~20% 상승했다. 경기에 덜 민감한 백화점 고객이 상대적으로 가격이 싼 아웃렛으로 발길을 돌리는 것으로 분석된다. 아울렛은 백화점과 똑같은 이월상품을 30~70% 할인한 가격에 판다.

홈쇼핑도 기업별 매출 1조원 시대를 열었다. 지난해 CJ오쇼핑은 1조773억원, GS샵은 1조196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GS샵이 발표한 지난해 히트상품 가운데 글로벌 패션 브랜드 모르간은 50만개에 달하는 판매량으로 1위를 차지했다. 기존 명품 브랜드 못지않은 품질과 디자인에도 값은 10만원대에 불과해 불황기 소비자의 사랑을 받았다는 게 GS샵 측의 설명이다.


GS샵 관계자는 “홈쇼핑 패션 제품은 백화점과 동일하거나 비슷한 품질에도 값은 최저 3분의 1에 불과한 경우가 많다”며 “불황이지만 패션 제품 구입 의지가 있는 고객들을 겨냥해 내놓은 제품이 인기를 모았다”고 말했다.

최근 ‘가치소비’가 널리 퍼졌다. 가치소비는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나 취향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가격·만족도를 세밀히 따져 소비하는 성향을 말한다. 경기가 좋을 때는 남들에게 보이기 위해 소비하는 과시소비가, 경제위기 때는 무조건 아끼는 알뜰소비가 유행하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가치소비는 질 좋은 제품을 좀 더 합리적인 가격에 구매하려는 꼼꼼한 소비 행태다. 필요하다면 다소 비싸더라도 과감히 지갑을 연다.

김앤커머스의 김영호 대표는 “생필품은 이성적 판단이 작용해 절약할 수 있지만 개인의 욕망이 투영된 이른바 감성제품은 조절이 쉽지 않아 불황에도 영향을 덜 받는다”며 “가치소비는 트레이딩 업(trading-up), 즉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엔 돈을 더 지불하는 상향소비 트렌드”라고 정의했다.

가치소비는 좀 더 스마트하게 구매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브랜드는 유지하되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살 수 있는 아울렛이나 할인행사를 이용한다. 또 ‘명품’보다는 가격대가 낮은 해외 수입 제품인 ‘컨템포러리’ 브랜드로 눈을 돌린다. 컨템포러리는 명품의 품질과 고급스런 분위기는 고집하면서도 가격은 명품보다 한층 저렴한 패션 브랜드를 말한다. 실제로 지난해 롯데백화점 MVG(VIP) 고객 중 아울렛을 이용하는 고객이 전년 대비 50% 증가했고, 컨템포러리 상품군 매출은 불황에도 20% 이상 늘었다.

삼성패션연구소는 ‘2012년 패션산업 10대 이슈와 2013년 전망’ 보고서에서 ‘지속된 불황으로 적은 돈으로 최상의 만족을 느끼려는 효율적 소비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지만, 항상 저렴한 제품을 찾는 것이 아니라 관심 있는 고가의 프리미엄 제품도 선뜻 구매하는 가치소비 성향이 나타났다’고 분석했다.

이를테면 미샤와 더페이스샵 등 중저가 화장품을 쓰면서도 유독 향수는 명품을 고집하고, 옷은 온라인몰이나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에서 구입하지만 액세서리나 가방·정보기술(IT)기기 등 특정 품목에는 돈 쓰는 것을 아끼지 않는 것이다.

서브스크립션·큐레이션 서비스 각광

공인노무사 김중기(37)씨는 알뜰파이지만 태블릿 PC와 서류·소지품을 넣는 가방은 값비싼 명품이나 고급품을 고집한다. 그는 “이너 제품은 유니클로나 자라 등에서 3만~4만 원대에 구입하지만 자켓·신발·가방은 품질이나 선호도 때문에 명품을 찾는다”며 “브랜드 있는 명품 가방을 쓰면 튼튼하고 기능도 좋고, 오래 쓸 수 있으며 만족감도 크다”고 말했다. ‘샤넬 가방에 유니클로 티셔츠’로 대변되는 혼합 소비 양상이다.

가치소비는 최근 늘어나는 중고명품 판매에서도 확인된다. G마켓에 따르면 지난해 중고 속옷 판매는 전년 대비 24% 늘어났다. 속옷은 구매했다가 반품을 못한 제품이 중고 시장에 흘러나온다. 여행용 가방(747%), 귀걸이(720%), 중고 휴대전화(583%), 교육용 완구(169%) 등 다양한 중고 제품의 매출이 크게 늘었다. 네이버 중고상품 판매 카페인 ‘중고 나라’의 회원수는 1000만 명을 훌쩍 넘는다. 중고가구 전문 대형매장엔 주말이면 수백 명씩 손님이 몰리고, 교보문고와 알라딘의 중고서점 클릭 수가 늘었다.

가치소비는 저성장 속에서 탄생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소‘ 비의 새 물결이 마케팅을 바꾼다’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 장기 추세 경제 성장률은 1970~1980년대 10%, 1990년대 외환위기 이후 5%대를 지나, 금융위기 이후 3% 후반대로 하락했다. 고성장 시대의 풍요롭고 낙관적인 소비패턴이 사라지고 개인이 추구하는 가치와 가격이 적합한지를 따지는 가치소비 트렌드가 정착하게 됐다는 것이 연구소의 설명이다.

이동훈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저성장이 지속되자 아껴 쓰고, 바르게 쓰며, 똑똑하게 쓰는 소비현상이 확산되고 있다”며 “소비자는 소비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케팅 과정에 참여하고, 사회 이슈에 민감하게 반응하며, 나만의 스타일을 주도하는 신(新)소비자로 변신했다”고 설명했다.

명품을 구입할 수 있는 채널이 늘어난 것도 가치소비를 가능케 했다. 아울렛과 온라인 쇼핑몰이 명품을 취급하면서 백화점이나 면세점에 한정됐던 판매 루트가 훨씬 다양해졌다. 특히 온라인 시장의 성장이 눈에 띈다. 병행수입이나 구매대행을 통해 들어온 상품부터 중고 명품까지 조금이라도 저렴하게 명품을 구매하고자 하는 소비자들이 온라인쇼핑몰로 눈을 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11번가에 따르면 샤넬·에르메스·루이비통·까르띠에 등 수입 럭셔리 브랜드 매출은 2년 새 215% 증가했다. 소비자들은 이전처럼 고가의 명품만을 찾기보다는 낮은 가격으로 좋은 물품을 구매하기 위해 다양한 창구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김나경 LG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은 “고가의 자전거나 아웃도어 제품 등 자신이 가치 있다고 생각하는 분야에는 지금도 아낌없이 돈을 쓰는 사람이 적지 않다”며 “특히 여가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고 있어 취미와 스포츠, 힐링과 관련해 가치소비 양상이 뚜렷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가치소비가 늘면서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신유통 파생상품’도 속속 등장했다. 바쁜 싱글족을 겨냥해 생활용품·화장품 등을 정기간행물처럼 배송해주는 ‘서브스크립션 서비스’, 전문가가 엄선한 소량의 상품을 온라인에서 판매하는 ‘큐레이션 커머스’ 등 새로운 개념의 유통 채널이 떠올랐다.

소비자는 발품을 팔 필요 없이 매달 약 1만~2만원대 이용료만 내면 매장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60~80% 싼값에 다양한 새

1183호 (2013.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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