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아이 2명 중 1명 조부모 손에 자라 

지금은 황혼육아 시대 

김성희·허정연 이코노미스트 기자
경제적 부담에 아예 3대가 함께 살기도 노년층 위한 유아용품·육아강좌 봇물



통계청에 따르면 맞벌이 가정의 영·유아 두 명 중 한 명은 할머니·할아버지 손에서 자란다. 은퇴 후 삶의 여유를 즐겨야 할 노년층이 ‘황혼육아’에 매달리는 것이다. 손주를 보는것은 물론 즐겁다. 하지만 1주일에 5일 이상, 하루 평균 9시간 이상 아이를 돌본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특히 최근에는 경제적 이유로 맞벌이에 나선 부부가 늘면서 조부모 육아가 늘었다.

집값은 뛰고 교육비를 비롯한 생활비 부담이 커진 탓이다. 이런 이유로 ‘스크럼족(결혼 이후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와 함께 사는 성인)’이 늘었다. 황혼육아 증가로 육아 관련 산업지도 역시 달라졌다. 육아 용품과 서비스 소비층이 엄마에서 할머니로 바뀌면서다. 관련 기업들은 노년층 맞춤형 육아용품을 내놓거나 육아관련 이벤트·강좌도 자주 연다.


#1. 경기도 일산에 사는 김희숙(가명·61)씨는 7살짜리와 5살짜리 손자 두 명을 돌본다. 원래 김씨는 손자를 키울 생각이 없었다. 주변 사람들에게도 “손자 봐주지 말아야 한다. 요즘 세상에 늙어서 누가 애 보고 있느냐”며 큰 소리를 쳤다. 그러나 맞벌이를 하는 며느리가 입덧으로 고생해 잠깐 보살피기 위해 8년 전 부산에서 올라온 게 화근이었다.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아이를 돌봐달라고 하는데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결국 3년 만 키워주기로 마음 먹었다.

‘남의 손에서 자라는 것보단 내 손주 내가 키우는 게 낫겠지’라는 생각에서다. 그러는 사이 둘째 손자가 태어나고 며느리가 일을 그만두지 못하면서 육아는 고스란히 김씨 몫이 됐다. 남편과도 생이별 했다. 두 아이를 돌보느라 부산에 내려갈 여유가 없다. 한 달에 한 두 번씩 남편이 올라와야 얼굴을 볼 수 있다. 명절에도 부산에 내려 가지 않고 아들 집에서 지낸다.

김씨는 “내 손자들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키우고 있긴 하지만 아이들 돌보랴 살림까지 하랴 체력이 부친다”고 하소연 했다. 그는 이어 “돈 벌겠다는데 부모가 자식을 위해 이 정도의 희생을 감수해야지 별 수 있겠느냐”고 하면서도 “언제까지 아이들을 키워야 할지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2. 전북 전주시에 사는 신상채(62)씨는 아침마다 한바탕 전쟁을 치른다. 두 손녀 휘수(4)·유수(1)의 어린이 집 등교를 도맡아하기 때문이다. 함께 살던 아들 내외가 두 달 전 분가하면서 그는 더 바빠졌다. 오전 7시20분, 걸어서 20분 거리의 아들 집을 찾아 잠에 취한 손녀들을 업고 온다. 아이들을 얼르고 달래 세수 시키고 옷 갈아 입힌다.

밥 몇 술을 떠먹인 후 9시에 어린이 집 차량이오면 그제서야 숨을 돌린다. 전북경찰청 전주북부서장(현 전주덕진경찰서)을 지낸 그는 2009년 퇴직과 동시에 태어난 첫 손녀의 육아를 전담했다. 첫 손녀가 태어난 지 두 돌이 되던 무렵, 며느리까지 직장생활을 시작하자 손녀는 온전히 신씨 부부의 몫이 됐다. 올해 3월, 둘째 손녀가 태어나면서부터는 두 배로 바빠졌다.

그래도 신씨는 틈틈이 쓴 육아일기를 책으로 출간할 정도로 열의가 넘치는 할아버지다. 아내는 30년 만에 일선에서 물러난 신씨와 함께 느긋한 노후생활을 꿈꿨지만 아이들에 묶여 긴 여행은 꿈도 못 꾼다. 신씨는 “손자들 키워줘도 나중에 아무 소용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이 맞벌이 안 하고 먹고 살기가 쉽나”라며 “몸이 힘들긴 해도 손녀들 재롱을 보면 ‘그래도 내가 키워야지’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했다.

이처럼 할머니·할아버지가 손주를 키우는 이른바 ‘황혼육아’가 급증했다. 평생 애를 두 번 키우는 셈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으로 510만 맞벌이 가구 중 조부모가 손주 육아를 맡은 가구가 절반(250만 가구)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맞벌이 가정의 영·유아 두 명 중 한 명은 할머니·할아버지 손에 자라는 셈이다.

임영주 아이에듀케어센터장은 “퇴근시간을 배려해주는 보육시설이 부족한 데다 아직도 남보다는 가족의 도움을 받고 싶어하기 때문에 아이 양육을 부모에게 의지하는 자녀가 많다”고 말했다.


처가가 친가보다 손주 더 떠맡아

그렇다면 아이 양육을 부모 중 누구에게 더 많이 맡길까. 육아정책연구소가 지난해 7월 생후 36개월 미만 영아를 둔 여성 1000명을 조사한 결과, 양육자의 53.8%가 외조부모에게 맡기는 것으로 나타났다.

친조부모는 34.2%로 외조부모가 친조부모보다 1.6배 높게 나타났다. 경기도 가족여성연구원에 따르면 양육 시간은 1주일에 5일 이상, 하루 평균 9~11시간이었다. 자식들로부터 받는 용돈은 한 달 평균 30만원 수준에 불과했다.

조부모에 아이를 맡기는 이유 중 하나는 육아 도우미나 보육기관보다는 가족이기 때문에 믿고 맡길 수 있다는 것이다. 육아와 가사를 병행하는 워킹맘들은 이른 출근과 늦은 퇴근 때문에 생기는 보육 공백도 조부모가 채워주기 때문에 일하는 부모 입장에서는 부담을 덜 수 있다.

서문희 육아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맞벌이 부부라면 경제적으로 부담을 줄이고 마음 놓고 일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며 “최근에는 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30~40대의 젊은 세대의 부모 의존도가 높아지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결혼 이후에도 경제적인 이유로 부모와 함께 사는 ‘스크럼족(Scrum 族)’이 늘고 있다. 서울시가 6월 발표한 ‘통계로 본 서울의 가족구조’에 따르면 2010년 현재 가구주인 부모와 동거하는 30~49세 성인은 48만4663명으로, 2000년의 25만3244명보다 91.4% 증가했다.

이들 중 상당수는 어린 시절처럼 지금도 부모의 보호와 양육을 받고 있는 셈이다. 60세 이상 부모를 상대로 자녀와의 동거 이유를 물은 결과 “손주 양육 등 자녀의 가사를 돕기 위해서(10.5%)”라는 대답이 “자녀가 경제적인 이유 등으로 독립생활이 불가능해서(29%)”라는 대답 다음으로 많았다.


▎서울 강남구보육정보·육아지원센터는 8월 31일 손주를 양육하는 조부모를 상대로 ‘좋은 조부모 되기’수업을 열었다.



예비 조부모 상대 육아교실 인기

서울 돈암동에 사는 성미연(60)씨는 5년 전부터 딸 부부와 함께 산다. 결혼할 때 구한 딸 부부의 신혼집 주인이 전세금을 한꺼번에 5000만원이나 올려달라고 요구하자, 이를 감당할 수 없게 된 딸 부부가 아예 짐을 싸 들고 부모 집으로 들어와 버렸다. 맞벌이하는 딸을 대신해 청소와 빨래·식사준비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올해 초등학교에 입학한 손자를 돌보는 것도 온전히 할머니 몫이 됐다. 딸 내외는 분가할 생각도 없다. 맞벌이를 하고 있지만 분가를 하면 아이를 돌봐줄 도우미 비용과 식비 등 생활비 지출이 너무 커서다. 부부 중 한 사람의 월급은 고스란히 허공으로 날아가는 것이다.

여기에 아파트 대출금까지 내야 하니 남는 게 없다. 전셋값이 치솟는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엄두도 못 낸다. 성미연씨의 딸 김은지(37)씨는 “아무리 친정이어도 남편과 아이와 함께 사는 게 마음 편치는 않지만 일단 집값 걱정할 필요 없고 생활비도 줄어드니까 돈 모으기에는 좋다”고 말했다.

성씨도 “자식이니 나가라고 할수도 없고, 다 늙어서 내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려니 몸과 마음이 피곤하다”고 한숨지었다. 육아정책연구소에 따르면 0∼5세 육아에 들어가는 비용은 월 평균 118만522원에 달한다. 서문희 선임연구위원은 “결혼한 뒤 독립했다가 경제적 곤란, 자녀 양육의 어려움 같은 현실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 부모와의 동거”라고 말했다.

조부모 육아가 늘면서 최근 유아용품 업체에서는 노년층의 편의를 돕는 제품을 잇따라 내놨다. 온도 센서를 내장한 젖병까지 나왔다. 각 지자체도 육아교실을 열고 있다. ‘황혼육아’ 시대의 새로운 풍속도다. 조부모들도 달라진 육아 환경에 맞게 육아법을 배운다. 예비 할머니·할아버지 상대의 육아 교실도 인기다.

8월 31일 서울 강남구보육정보·육아지원센터에서는 아이들을 키우는 조부모상대의 ‘존경 받는 조부모 되기’ 수업이 열렸다. 오전 10시부터 시작된 수업에는 20여명의 할머니·할아버지가 자리를 꽉 메웠다. 이날 수업은 ‘지혜로운 조부모의 역할’ ‘달라진 양육방법’ ‘손주양육 10가지 팁’ 등의 내용으로 수업이 진행됐다.

박주영 강남구보육정보·육아지원센터장은 “최근에는 할머니뿐 아니라 할아버지의 참여도 늘었다”며 “2010년부터 매년 1~2회에 걸쳐 조부모 육아교실을 연다”고 말했다. 앞으로 수업 회수를 더 늘려나갈 계획이다. 이날 수업에 참석한 배광숙(58)씨는 “지금 5살짜리 손자와 3살짜리 손녀를 키우고 있는데 내 자식을 키웠을 때랑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며 “이왕 손주 키우는 거 지금 시대에 맞게 제대로 알고 키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수업을 듣게 됐다”고 말했다.

손자·손녀를 키우기 위해 적극적으로 배움을 선택하기도 한다. 서울 목동에 사는 김문숙(57)씨는 올 초부터 구청에서 운영하는 노인대학에서 영어를 배우기 시작했다. 알파벳도 잘 몰랐던 그가 영어 공부를 하기로 결심한 것은 세 살 배기 손자 때문이다. 곧 유치원에 들어가서 영어를 배울 손자에게 완벽하지는 않아도 기본적인 것은 가르치고 싶어서다. 노인대학 영어교실에 나오는 할아버지·할머니들도 손자·손녀들과 영어 대화를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고 했다.

김씨는 “요즘 모임에 나가면 친구들 사이에서도 손자·손녀 교육이 화제”라며 “여기서 교재 정보를 귀띔 받은 뒤 책을 사주고 있다”고 말했다. 박주영 강남구보육정보·육아지원센터장은 “조부모들이 처음에는 억지로 육아를 맡아도 ‘이왕 하는 거 잘 해보겠다’는 의지가 높아지고 있다”며 “앞으로 이들을 지원하는 다양한 프로그램이 많이 생겨날 것”이라고 말했다.

‘조부모-손주 관계 전문가’ 미래 유망 직업으로

손주 육아가 늘면서 대형 서점에서도 모두 육아 서적이 많이 팔린다. YES24에 따르면 지난해 60대가 가장 많이 읽은 책 중에 베스트셀러 1위는 ‘삐뽀삐뽀 119 소아과’, 2위는 ‘삐뽀삐뽀 119 이유식’이었다. 현직 소아과 의사가 영·유아의 응급 상황과 이유식 등에 대해 백과사전 식으로 풀어 쓴 책이다.

육아용품 시장 소비층도 엄마에서 할머니로 바뀌면서 홈쇼핑업체들도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TV 앞에 많이 앉는 평일 오전 시간대에 영·유아용 교육용품을 배치하고 있다. GS샵 관계자는 “최근 영유아 교구재를 구입하는 50, 60대 고객이 늘고 있다”며 “이런 점을 고려해서 영유아용 교육상품 방송에 쓸 자막은 노인들의 시력을 배려해 평소보다 크게 만든다”고 말했다.

할머니들의 육아 노동을 국가가 인정하고 지원하는 제도도 생겼다. 서울 강남구는 9월부터 손주를 돌보는 친·외조부모에게 시간당 6000원씩 최대 24만원을 지급하는 ‘손주 돌보미 사업’을 시범 운영한다. 지원 대상은 막내가 만 3개월 이상∼15개월 미만인 두 자녀 이상의 맞벌이 가정으로 아동과 아동의 부모·조부모가 모두 강남구에 거주해야 한다. 신연희 강남구청장은 “중장년 일자리를 창출하면서 동시에 영유아가 조부모로부터 무한 돌봄을 받을 수 있는 환경이 보장될 수 있다” 말했다.

최근에는 ‘조부모 손주관계 전문가’라는 용어도 등장했다. 한국고용정보원이 지난해 발표한 ‘10년 후 미래 유망직업’에는 ‘새롭게 부상할 직업’ 17가지에 이 직업이 포함됐다. 김한준 한국고용정보원 연구위원은 “조부모와 손주는 어릴 때부터 같이 생활하면 1·3세대간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어 고령자와 젊은 사람들의 세대간 갈등을 완화하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1204호 (2013.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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