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3D 디자이너 키우고 원료도 직접 개발 

국내 3D 프린터 기업은 지금 

이창균·박성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캐리마·로킷·에이팀의 창업 사례 가격 경쟁력 갖추는 데 초점

▎3D 프린터 업계 경영자들. 왼쪽부터 이병극 캐리마 대표, 유석환 로킷 대표, 고산 에이팀 대표.



“6~7년 사업하면서 번 돈 170억원을 다 쏟아 부었습니다. 은행에서 대출까지 받았죠. 죽겠다며 한강다리에도 몇 번 올라갔습니다. 한번은 다리 난간에서 눈물을 쏟는데 그 속에 딸 아이 얼굴이 비치더군요. 좌절하고 다시 열심히 연구하고를 반복해 지금까지 왔습니다.” 8월 27일 오후 서울 염창동의 캐리마 공장. 제품을 꺼내 보이는 이병극(59) 캐리마 대표의 목소리엔 복잡한 감정이 담겼다.

그는 1986년부터 컬러사진을 현상하는 제품을 만들어 판매했다. 대학에서 전기전자학을 전공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광학기술을 배웠다. 그가 만든 사진 현상기는 고품질과 저렴한 가격으로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꽤 많은 돈도 벌었다. 하지만 1990년대로 접어들자 일본·독일 등지에서 디지털 카메라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대표는 조만간 필름사진 시장이 없어질 것으로 보고 디지털 광학기술로 눈을 돌렸다. 디지털 데이터를 분석해 인화하는 프린터를 만들었다. 한 대당 1500만원이 넘는 고가였지만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이도 오래 가지 못했다. 중국에서 값싼 복제품이 등장했다. 이 대표는 “중국에서 주최하는 기술박람회에 몇 번 참석해 제품을 선보였더니 수개월 만에 복제품이 나오고 500만원 정도에 팔리기 시작했다”고 회상했다.

다시 한 번 결단의 순간이 왔다. 디지털 광학기술을 3D로 구현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당시로선 이름도 생소했던 3D 프린터 개발에 들어갔다. 국내에선 몇몇 기업이 도전장을 던졌다가 실패한 분야다. 주변에서 모두가 말렸지만 자신감을 가졌다. 저가 중국 제품에 한번 당하고 나니 남들이 흉내 낼 수 없는 기술력을 가진 제품을 개발해야겠다는 오기가 생겼다.

복잡하게 색깔을 분리하는 기술이 필요가 없어 일반 사진 현상기보다 더 쉽게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5년간 연구개발에 50억원을 투자했다. 이 대표의 확신이 증명되기까지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별다른 매출 없이 꼬박 6년을 버텼다. 최근에는 조금씩 결과물이 나오고 있다. 지난해 처음으로 7억원의 매출을 올렸고, 올해는 15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매출 거의 없이 6년 버텨 결실

캐리마의 3D 프린터 ‘마스터 플러스’는 DLP(Digital Light Processign), 즉 디지털 광학기술 방식이다. 특수시트 위에 액상플라스틱 등 다섯 가지 소재를 자동으로 주입해 얇은 막을 만든 다음 그것을 쌓아 올린다. 100㎛(1㎛는 100만분의 1m)까지 얇은 막을 쌓아 정교한 작업이 가능하다.

또 각진 덩어리를 깎거나 틀을 만들어 채우는 방식과 달리 얇은 층을 쌓기 때문에 제품의 속을 비울 수 있다. 비는 속만큼 원료비를 절감할 수 있어 경제적이다. 한 대당 가격은 크기에 따라 4000만~6000만원. 비슷한 사양인 외국 제품의 절반 수준이다.

원료는 직접 연구·개발했다. 20여 종의 물질을 결합하고 연구를 거듭한 끝에 5가지 원료를 개발했다. 어떤 것을 넣느냐에 따라 고무처럼 말랑한 제품, 딱딱한 제품, 왁스처럼 녹는 제품, 반투명의 제품 등이 만들어진다. 현재 캐리마가 생산하는 원료의 가격은 g당 300원 정도다. 종이컵 부피 만한 제품을 생산하는 데는 200g 정도가 필요하다. 캐리마의 3D 프린터는 건축물이나 기계부품 제작 외에 의료용으로도 쓰인다. 치과에서 임플란트나 틀니를 만드는 데 적합하다.

개인의 치아 형태에 맞는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 보석을 디자인할 수도 있다. 캐리마는 지금까지 매출의 60% 이상을 해외에서 올렸다. 일본을 비롯한 20여개국에 수출했다. 이 대표는 “순수 우리 기술로 국내에서 생산하다 보니 유지비가 외산보다 적게 든다는 게 또 한 가지 장점”이라고 덧붙였다.

“3D 프린터가 찻잔 속 태풍처럼 흐지부지될 기술이냐, 3차 산업혁명을 이끌 기술이냐를 놓고 말들이 많습니다. 사실 처음 창업하고 6개월 전까지는 저도 긴가민가했었죠. 이후로 후자라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8월 28일 오후 서울 가산디지털단지에서 만난 유석환(56) 로킷 대표 또한 시장 전망에 긍정적이었다.

이유를 묻자 이병극 대표처럼 외산에 우위를 점할 수 있는 가격 경쟁력 때문이란 답변이 돌아왔다. 로킷은 특허가 만료된 FDM(Fused Deposition Modeling) 기술을 써서 데스크톱 3D 프린터인 ‘에디슨(3DISON)’을 만들어 3월부터 시판했다. 한 대당 170만원선으로 비슷한 사양의 외산(1500만~2000만원대)보다 저렴하다.

선도자가 돼야 살아남는다

생계형 창업은 아니었다. 유석환 대표는 요즘 잘 나가는 바이 오업체 셀트리온의 창립 멤버로 셀트리온헬스케어 CEO를 역임한 경영전문가다. 대우자동차·타이코인터내셔널을 거쳤다. 자동차·보안시스템·바이오 같은 다양한 분야를 섭렵한 그의 눈에 들어온 건 3D 프린터였다.

산업에서 디자인의 중요성이 갈수록 커지는 데다 정보기술(IT) 분야의 차세대 기술로 3D 프린터 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었다. 틈틈이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 논문을 읽고 벤처 창업을 구상했다. 원천기술의 흐름을 읽으면 나아갈 방향이 보일 것으로 생각했다. 지난해 초에 10억원을 출자해 회사를 차리고 연구 인력을 모았다.

창업 이후 1년 6개월여 쉴 새 없이 일하면서 그가 찾은 해답은 ‘선도자(First Mover)’가 돼야 살아남는다는 것. 셀트리온 시절 유수의 대기업보다 한발 앞서 바이오 분야를 개척하며 깨달았던 것이기도 했다. 관건인 가격 경쟁력의 비결은 원료였다. 해외에서 비싸게 들여오는 대신에 자체 개발해 중국에서 주문자상표부착 생산(OEM) 방식으로 생산했다.

원료는 옥수수가 원소재인 폴리락트산(PLA)을 쓴다. 아크릴로니트릴·부타디엔·스티렌 공중합체 수지(ABS)는 원료로 잘못 들일 경우 녹으면서 인체에 유해한 미립자가 방출될 수 있다고 판단해 배제했다. 유 대표는 “초기의 시행착오를 극복하고 품질이 안정화 단계”라고 말했다.



제품 구입하면 주식 2주 나눠줘

로킷은 3D 프린터로 하드웨어·소프트웨어·재료·디자인 등의 분야에서 18개의 특허를 보유했다. 해외의 우수 기술을 적극 벤치마킹하는 한편 독자적인 기술로 경쟁력을 확보한다는 목표다. 유 대표가 중시하는 또 하나는 디자인이다. 3D 프린터 시장이 커지면 3D 디자이너의 중요성이 커질 것으로 보고 투자에 나섰다.

로킷 제품 한 대당 1만원씩의 수익을 모아 디자이너들을 지원하는 펀드를 조성했다. 역발상으로 직원과 소비자에 대한 투자에도 돈을 아끼지 않는다. 직원들에게 회사 주식의 30~40%를 나눠주겠다고 선언하자 ‘월화수목금금금’을 불사할 만큼 사기가 올랐다. 170만원짜리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에겐 주식 2주를 준다. 소비자가 믿고 다음 제품을 구매하게 하는 것도 다른 의미의 투자란 믿음 때문이다.

그가 점치는 3D 프린터의 미래는 밝다. “제조업의 근간이 일반 금형일 땐 수억 원을 투자해도 100개의 아이디어 중 1~2개만 살아남았죠. 만일 3D 프린터 시장이 단돈 몇 백만 원으로 쇠까지 만들 만큼 형성되면 놀라운 혁명이 일어날 겁니다. 원료비도 10분의 1 수준까지 떨어진다면 일반 소비자가 제조업을 하고 부가가치를 창출해도 놀라운 일이 아니겠죠. 지금은 기술에 한계가 있지만 언젠가는 꼭 그런 날이 올 겁니다.”

앞으로 가격 인하를 이끌 열쇠는 내년에 만료되는 SLS(Selective Laser Sintering) 특허와 진일보할 소재 기술이다. “세계적인 노력의 결과로 해마다 소재 기술이 발전 중입니다. 기술의 발전이 곧 가격 경쟁력을 만들죠.”

유 대표는 중소기업·벤처 생태계의 활성화에 대한 고민도 드러냈다. 그는 “3D 프린터 시대에 중소기업의 제품 개발 기간을 90%까지 줄일 수 있다는 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며 “지금까지는 대기업이 대량 생산으로 100만개를 만들 때 (중소기업은) 1만개 만들기도 힘들었는데 3D 프린터 시대엔 중소기업의 경쟁력이 한층 높아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로킷의 다음 목표는 세계 시장에서 2017년까지 가정용 데스크톱 3D 프린터 1위에 오르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올 8월부터 중국과 일본·러시아·호주 등 6개국에 프린터 견본을 보내 수출 가능성을 타진 중이다.

최근 언론의 주목을 받은 독특한 이력의 창업자도 있다. 2007년 한국 최초 우주인으로 선발된 고산(37) 타이드인스티튜트 대표다. 타이드인스티튜트는 예비 창업자의 기술창업을 지원하는 비영리 법인이다. 고 대표는 이 법인을 운영하는 한편 올 4월에 3D 프린터 제조 벤처기업 ‘에이팀’을 창업해 활동 중이다. 8월 29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운상가에서 만난 고 대표는 “10월 말 시판을 목표로 3D 프린터를 제작 중”이라고 말했다.

가격 경쟁력이 뛰어난 FDM 방식으로 델타 암(Delta Arm) 디자인을 시도했다. 원료는 아직 자체 제작하지 않았지만 앞으로 제작할 계획이다. 고 대표는 “가정용·보급형 3D 프린터가 200만~300만원 사이라면 미국이나 일본·유럽에서 가격 경쟁력이 충분하다”며 “제품에 일체형 스캐너를 추가하는 방법도 고려 중”이라고 설명했다.

그가 3D 프린터 창업에 뛰어든 것도 3차 산업혁명을 일으킬 기술이라는 판단 때문이다. 고 대표는 “벤치마킹 대상이었던 메이커봇의 3D 프린터를 세계 시장에서 이기는 게 꿈”이라고 덧붙였다.

이처럼 벤처 중심으로 3D 프린터 붐이 조성됐지만 아직 국내 대기업들은 시장 진출에 미온적이다. 삼성전자와 LG전자는 3D 프린터 신사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지만 지금껏 움직임은 없다. 진출하더라도 위험성이 있는 직접 생산보다는 연계사업 위주로 전개할 것을 검토한 것으로 전해졌다. 가격 인하나 일상화가 충분히 진행되기 전까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한다는 판단이다.

우주인에서 3D 사업가로 변신한 고산

3D 프린터 시장이라고 해서 프린터기기만 있는 것은 아니다. 소재(원료)나 관련 서비스 산업도 관심을 모은다. 3D 프린터용 원료분야 창업을 구상하는 김성균(45)씨는 “3D 프린터가 앞으로 유망할 것으로 보고 원료 공부에 나섰다”며 “국내에서 제작된 3D 프린터를 보니 기대보다 품질이 다소 아쉬웠지만 중국 같은 경우 원료에 대한 신뢰감이 저조한 시장인 만큼 잘하면 좋은 결과가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에서 전산학을 전공했고 사회에선 금융업에 종사했다. 무관한 분야인 소재에 관심을 갖게 할 만큼 3D 프린터는 매력적이었다. 대전에서 자립형 사립 고등학교를 다니는 김성훈(17)군은 “박람회에서 3D 프린터를 실제로 보고 기술력에 충격을 받았다”며 “진로를 관련 분야로 바꾼 친구들도 생겼다”고 전했다.

OEM(Original Equipment Manufacturing) 주문자가 요구하는 제품과 상표명으로 완제품을 생산하는 방식.

1203호 (2013.0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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