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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보루 백색가전에 희망 

침체 시달리는 日 가전업계 

TV·스마트폰 판매 부진, 내수 점유율 하락 … 해외 시장에서 활로

▎TV 판매 부진으로 고전하는 일본 가전업계는 내년 소비세 인상 전 세탁기·냉장고 판매량이 늘어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일본 가전시장에서 평면TV 붐은 지나갔다. 하지만 세탁기·냉장고·청소기 등 이른바 ‘백색가전’은 꾸준히 팔린다. 게다가 일본은 내년 4월 소비세 인상을 앞뒀다. 가전 업계에서는 백색가전을 미리 장만하려는 수요가 늘 것으로 기대한다. 일부 가전판매점에서는 지난해보다 냉장고와 세탁기 출하량을 1.5배로 늘려달라고 요청하기도 한다. 백색가전 판매 증가는 지난해 7월 아날로그방송 종료 후 TV판매 부진으로 줄곧 침체기를 겪어온 일본 가전시장에 오랜만에 활기를 불어넣고 있다.

‘스마트 가전’ 유행

가전 업체에게 백색가전은 안정적인 사업 분야다. 컴퓨터나 디지털카메라의 경우 인터넷 통신판매에 주도권을 빼앗겨 가격 경쟁이 치열하다. 그러나 냉장고·세탁기·에어컨과 같은 가전제품은 별도의 설치 작업이 필요해 아직 대부분의 판매가 매장에서 이뤄진다. 일본 내수 시장이 포화상태이긴 하지만 일정한 제품 교체 주기가 있어 수요도 안정적이다. 해외 경쟁자에 밀려 평면TV에서 참패한 일본 가전 업체들도 백색가전에서는 착실히 수익을 올리고 있다.

TV·스마트폰·컴퓨터 등은 부품만 있으면 누구나 조립할 수 있다. 따라서 업체 입장에서는 차별화가 어렵다. 일본 업체는 가격 경쟁에서 한국·대만 브랜드에 밀리는 상황이다. 그러나 백색가전은 일본 업체의 강점인 조립 노하우가 필요한 수직 통합 모델이다. 이시와타리 도시바 홈플라이언스 사장은 “세탁기는 설계대로 조립해도 복잡한 생산기술 때문에 작동하지 않을 정도로 까다롭다”며 “그만큼 백색가전의 시장 진입장벽이 높다”고 말했다.

일본 가전 업체 사이에서는 지난해부터 스마트폰과 연계한 스마트 가전이 유행이다. 가전제품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가정내 전력 사용량을 쉽게 관리하는 HEMS(Home Energy Management System) 보급이 계기다. 신축 주택·아파트에 HEMS 도입이 추진되고 있어 앞으로 백색가전도 인터넷 접속이 기본이 될 전망이다. 관리뿐 아니라 에어컨·조명·온수기 등의 원격 조작도 가능하다. 가전 업계는 이 외에도 색다른 부가가치 서비스를 만드는데 고심 중이다.

일본 가전 업계의 선두인 파나소닉의 경우 ‘이제 스마트 기능이 없는 가전은 빗자루 수준’이라는 말을 할 정도로 스마트 가전에 적극적이다. 특히 에어컨이 호평을 받는다. 외출을 해도 스마트폰으로 귀가 전에 냉난방을 작동시킬 수 있다. 조리법에 맞춰 음식 재료를 준비해두면 스마트폰으로 오븐을 미리 작동시켜 요리를 완성시킨다. 도시바는 냉장고가 야심작이다. 카메라를 냉장고 내에 설치해 장을 보면서 필요한 물건을 확인하도록 고안했다.

샤프의 세탁기는 클라우드 서비스로 일기예보를 확인해 ‘비가 올 것 같습니다. 오늘 빨래는 건조까지 하는 게 좋습니다’라고 제안한다. 일부 업체에서는 냉장고가 식자재 재고를 파악해 메뉴를 제안하거나 식품의 유통기한을 알려주는 기능도 개발 중이다.

모든 기업이 스마트 가전에 긍정적이지는 않다. 히타치제작소는 스마트 가전 개발에 신중하다. 히타치어플라이언스의 가네코 상무는 “누구나 사용하기 편리한 제품이 진정한 의미의 스마트 가전”이라고 말했다. 유행에 좌우되지 않는 제품으로 가전제품 교체 수요를 잡는다는 전략이다. 미츠비시전기도 부가기능보다는 본질적인 기능을 추구하는 전략을 유지할 방침이다.

분명 지금의 스마트 가전은 2%가 부족하다. 스마트폰을 통해 냉장고 문의 개폐 횟수를 확인하거나 세탁기의 세제 잔량을 확인할 수 있지만 실효성은 의문이다. 파나소닉은 스마트 가전을 출시한지 1년이 지났지만 구매자 중 전용 애플리케이션에 등록한 사람은 10%뿐이다. 매일 사용하는 이용자는 더욱 적다. 도시바의 카메라 부착 냉장고도 한국 업체에서 이미 시도했지만 큰 효과를 보진 못했다. 매장에서도 스마트 가전에 대한 반응은 신통치 않다.

단순한 기능 추가 경쟁에 대한 비판도 제기된다. TV만큼은 아니지만 백색가전도 출시 후 1년이 지나면 ‘구모델’로 취급돼 헐값 신세를 면치 못한다. 가격 하락을 피하기 위해 업체들은 아주 약간의 기능만 추가한 비슷한 제품을 1년에 한 차례씩 새로 출시한다. 업계에서는 “소비전력에서 몇 와트 차이를 내거나 세탁시간을 몇 분 줄이는 수준의 변화는 소비자를 무시하는 처사”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적지 않다.

다카타 아키라 쟈파넷다카타 사장은 “일본 업체들이 가격 유지를 위해 기능을 늘리고 있다”며 “그만큼 싸게 팔려는 노력은 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백색가전 기술자들도 “단순히 기능만 늘려 조작을 복잡하게 만드는 게 고객에게 이득일지 의문”이라고 말한다.

해외 업체 일본 시장 조금씩 잠식

일본 업체가 다기능화에 빠져있는 동안 해외 업체는 조금씩 일본 시장을 잠식했다. 올해 일본 청소기 매출에서 로봇청소기 ‘룸마’, 다이슨의 스틱형 클리너, 이불클리너 ‘레이코프’ 등 해외 브랜드가 톱3를 점했다. 이들은 혁신적이고 개성이 돋보이는 기능에 주력하며 새로운 수요를 창출하는데 성공했다.

톰 고든 보덤재팬 대표는 “고가 제품이 잘 팔리는 일본 시장은 해외 업체에게 매력적인 시장”이라고 말했다. 다른 시장에서 백색가전은 보통 단순하고 저렴한 제품이 많이 팔린다. 이에 비해 일본은 기능이나 성능을 따지는 경향이 있다. 다른 곳에서는 거들떠보지 않는 6만엔(61만원)짜리 청소기가 척척 팔리니 해외 업체들이 군침을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수년 전까지 일본 가전 시장에 해외 제품은 다이슨 청소기가 전부였다. 그런데 어느새 ‘쿠로후네(黑船)가 맹위를 떨치고 있다. 쿠로후네는 큰 충격을 가져온 외산 제품을 일본 개항기의 서양 무역선에 빗대 일컫는 말이다. 해외 업체들은 능숙한 마케팅으로 제품의 특징을 알기 쉽게 전달한다. 해외 브랜드의 진출로 일본 청소기 시장은 커지고 있다. 냉장고·세탁기도 같은 양상으로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일본 업체에게는 아마존을 필두로 한 인터넷 판매 확대도 골치다. 현재 인터넷 판매는 컴퓨터·카메라·조리용 가전 중심이다. 그러나 전체 가전제품으로 확대되는 건 시간 문제다. 한 백색가전 인터넷 판매업자는 “외부 업자를 고용하면 (인터넷 판매의 단점으로 지적된) 가정 내 설치도 가능하다”고 말한다. 실제로 이 인터넷 판매 업체는 에어컨을 싸게 사들여 개인에게 팔고, 소비자가 원할 경우 설치 업자를 소개해준다.

지금까지 가전업체들은 매장에서의 매출을 늘리기 위해 판매 장려금이나 판매원 파견 등의 전략을 썼다. 그러나 인터넷 판매에서는 댓글이나 가격이 상품 결정 과정에서 중시된다. 매장 직원의 교묘한 ‘세일즈 토크’로 지갑을 열기 어렵다. 미츠비시전기 관계자는 “기본 가전제품은 인터넷에서 싸게 사고, 특색 있는 고가 제품은 매장에서 사는 양극화 구조가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인터넷 판매와 궁합이 맞는 것이 저가에 단순한 기능으로 특화된 가전제품이다. 이른바 ‘제너릭 가전’이라 불린다. 제너릭은 특허 기한이 지난 의약품을 복제해 만든 싼 의약품을 일컫는 말이다. 제너릭 가전은 이처럼 기본 성능은 비슷하면서도 가격이 싼 제품을 뜻한다. 최근 이 시장에 중견 업체들이 속속 뛰어들고 있다. 지금까지 제너릭 가전 시장은 독신 생활자 등 젊은층이 주요 소비자였다. 최근에는 단순한 조작에 매력을 느끼는 노년층까지 흡수하고 있다.

해외 업체의 성장과 인터넷 판매 확산, 제너릭 가전이라는 새로운 라이벌의 등장으로 일본 가전 업체는 어려움을 면치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가전의 왕’인 TV가 부진을 면치 못하고 짐짝이 돼버린 지금 백색가전은 일본 가전 업체의 마지막 보루다. 미츠비시전기가 올 가을 마케팅 비용을 전년 대비 10배로 늘리는 등 일본 대형 가전 업체들도 대책 마련이 고심 중이다.

일본에서의 성장을 기대하기 어려워진 일본 가전 업체가 주목하는 건 해외시장 개척이다. 특히 아시아 신흥국에 주력하고 있다. 동아시아국가연합(ASEAN)의 경우 각 가정에 백색가전이 충분히 보급돼 있지 않다. 샤프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인도네시아의 냉장고 보급률은 약 40%다. 에어컨과 세탁기는 10%대인 곳도 있다. 세계 수요 중 대부분을 신흥국이 차지한다.

국가별 백색가전 점유율은 통계 방식에 따라 차이가 있어 일률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하지만 유로모니터의 조사에 따르면 세탁기·냉장고·에어컨 등 3가지 주력 상품의 점유율은 중국의 하이얼, 한국의 삼성·LG가 앞선다. 일본 업체의 진출은 제한적이다.

일본 가전 업계 관계자는 “품질이나 성능은 괜찮은데 가격이 문제”라고 털어놨다. 일본 업계의 고민이 담긴 말이다. 일본 가전의 강점은 경쟁이 치열한 자국 시장에서 단련된 품질이다. 하지만 높은 가격이 발목을 잡는다. 수출할 때는 운송비까지 붙어 경쟁력이 더 떨어진다. 지역의 생활방식에 따라 가전의 사용방식도 다르다. 이에 따라 현지생산에 대한 고민도 커졌다.

일본 가전업체들은 현지생산 확대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 파나소닉은 지난해부터 신흥국시장에 투자하고 있다. 인도·브라질·베트남에 잇따라 냉장고·세탁기 공장을 신설했다. 올 여름 슬로베니아의 대형 가전 업체인 고렌예(Gorenje)와 제휴하고 유럽 현지생산에 착수했다. 도시바는 지난해 인도네시아 공장을 가동했다.

히타치도 태국 공장의 증산을 계획 중이다. 저가 제품공급을 위해 생산위탁처를 활용하기도 한다. 샤프는 2009년부터 특별팀을 만들어 위탁처 발굴에 주력하고 있다.




비싼 가격이 일본 가전 발목 잡아

현지생산으로 가격을 내리는 것뿐만 아니라 생활방식에 맞춘 제품 생산도 과제다. 백색가전은 다른 제품과는 달리 각국의 생활 방식에 맞추는 것이 특징이다. 가네코 토모미치 히타치 상무는 “몇 년 전까지는 일본 가전제품을 전압만 바꿔서 팔면 된다고 여겼지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생각”이라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일본 가전 업체가 시도하는 것이 현지 연구다. 파나소닉은 중국·인도 등 13개국에 ‘생활연구소’를 설치했다. 각국에서 가정방문을 통해 가전제품에 대한 요구를 데이터화한다. 이를 상품 기획에 활용한다.

파나소닉 관계자는 “파나소닉의 점유율이 낮은 이유는 상품력 때문”이라며 “점유율을 올리기 위해 생활연구소를 중심으로 상품을 새로 기획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가네코 상무는 “인도에서는 ‘뚱뚱하면 부자(fat is rich)’라는 인식 때문에 배가 나온 부유층이 많다”며 “냉장고 채소칸이 하단에 위치해 채소를 꺼내기 위해 구부려 앉아야 하는 번거로움을 없애기 위해 채소칸이 가운데에 있는 냉장고를 출시했더니 2배 가까운 가격에 팔렸다”고 사례를 들었다.

대형 백색가전뿐 아니라 미용·조리용 중소형 가전제품도 해외 수요를 조사 중이다. 예를 들어 유럽에서는 가전이 가구의 하나로 여겨져 디자인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에 파나소닉은 디자인을 중시한 고가의 에스프레소 머신을 유럽시장에 투입하고 있다.

샤프도 현지인들을 조사하는 ‘생활 소프트세터’를 말레이시아에 설치했다. 이와 더불어 애프터서비스에도 주력하고 있다. 2011년부터 인도네시아를 중심으로 ‘이동 서비스스테이션’을 투입했다. 전용 버스로 지방을 돌며 샤프의 가전제품을 무상으로 수리해준다. 부품 교환이 필요한 경우 절반 가격으로 제공한다.

디스플레이 사업에서 손해를 본 샤프에 백색가전은 주요 수입원이다. 1970년대 일찌감치 뛰어든 인도네시아 시장은 친숙도가 높다. 인도네시아의 주요 백색가전 3종의 점유율 모두 샤프가 1위를 차지하고 있다. 향후 인도네시아 외 국가에 진출할 계획이다. 후지모토 노보루 샤프 상무는 “2016년까지 ASEAN 매출 3000억엔이 목표”라고 말했다. 이는 지난해 매출의 2배 수준이다.

상품 개발만으로는 부족하다. 오래 사용하는 백색가전은 브랜드 의존도가 크다. 파나소닉 관계자는 “인도에서는 볼륨존(많이 팔리는 가격대) 상품부터 투입하지 않으면 그 브랜드는 알려지지 않지만, 반면 유럽에서는 고소득층 소비자를 상대로 고기능 상품부터 투입한다”고 설명했다.

같은 선진국이라도 환경문제에 민감한 유럽시장과 비교적 덜한 미국시장에서의 브랜드 전략도 차이가 있다. 이 관계자는 “미국에서는 에너지절약 성능이 좋은 고가 제품은 잘 팔리지 않는다”며 “조리가전이나 미용가전을 중심으로 브랜드를 침투시키고 있다”고 말했다.

해외 지역별 3가지 유형 제품 개발

히타치는 지역별로 제품 개발을 3가지로 분류한다. 첫째 완전한 ‘메이드 인 재팬’ 상품이다. 일본 제품에서 전압만 교체한 것이다. 독자성을 드러내지 않는 대만에서 잘 팔린다. 둘째는 ‘재팬 퀄리티’ 상품이다. 일본 가전의 품질은 유지하되 현지 요구에 맞춰 만든 제품이다. 홍콩·상해 등 중국 대도시가 주 판매처다. 셋째 유형의 지역에서는 기초 설계 외 전체적으로 현지에 맞춰 제품을 다시 만든다.

이처럼 일본 업체들이 가격·기능·브랜드 세 방향에서 동남아 시장에서 공세에 나서고 있지만 수익에 도움이 될 때까지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게 업계의 관측이다. 신흥국 시장은 저가 제품의 비중이 크다. 그만큼 수익성이 낮다. 선진국의 경우 유럽의 보쉬·필립스 등 현지 브랜드가 강세다. 일본 가전업체들은 국가별 수익을 따로 공개하지 않는다. 가전 업계 애널리스트는 “B2C(기업-소비자 거래) 백색가전 이익률은 5~6%가 한계”라며 “중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거의 적자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 일본 경제 주간지 주간동양경제 특약

1216호 (2013.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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