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미술시장은 올해도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올 초 새 정부의 경기부양 기대와 더불어 해외 미술시장의 약진이라는 호재가 작용할지 관심을 모았지만 역부족이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줄곧 어려웠던 미국 경매시장은 올 들어 최고가 낙찰 기록을 갈아치웠다.유럽은 물론 중국·홍콩 등 아시아 시장도 살아난 가운데 국내 시장만은 예외였다. 이런 미술시장에 뜻밖의 변수가 등장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다. 그의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해 검찰이 압류한 미술품 600여점이 경매에 나오자 시장이 모처럼 활기를 띠고 있다. 우리와 달리 호황을 이어가는 해외 미술품 경매시장의 동향도 짚어봤다.12월 11일 서울 강남구 신사동 K옥션에서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장남 전재국의 미술품 컬렉션 경매가 열렸다. ‘전재국 컬렉션 경매’에는 전두환 미납 추징금 환수를 위해 검찰이 압류한 미술품 600여점 중 80점이 나왔다. 이날 오후 3시. 경매 시작까지 1시간 남짓 남았지만 K옥션 앞은 이미 북새통이었다.발렛 파킹을 돕는 청년 대여섯 명이, 밀려드는 고급 승용차들 사이로 분주히 뛰어다녔다. 차에서 내린 김재순(62)씨는 “올해 두세 번 이곳을 찾았지만 이렇게 혼잡한 걸 본 적이 없다”며 “(경매) 좀 한다 하는 사람들은 다 온 것 같다”고 말했다.대중의 관심은 프리뷰 행사부터 예견됐다. 이번 경매에 앞서 진행한 12일 간의 프리뷰에도 평소의 3배인 1500여명(누적 인원)이 몰렸다. 이상규 K옥션 대표는 “프리뷰 행사는 경매 낙찰률을 가늠하는 척도인데 주말 방문객의 경우 호황기 때 수치를 웃돌 정도로 많았다”며 “고객들로부터 문의 전화와 질문이 쏟아져 별도로 특별 설명회 자리를 두 차례 마련했을 만큼 관심이 컸다”고 말했다.“경매 좀 한다는 사람 다 왔다”응찰객 대다수는 중장년층이었다. 평상시 구매 여력이 없는 젊은 고객이 자리를 메우던 것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부인과 함께 경매장을 찾은 김진수(58)씨는 “뉴스에서 많이 나오길래 어떤 작품이 있나 궁금해서 나왔다”며 “전 대통령 일가가 갖고 있던 것이라고 하니 관심이 더 간다”고 말했다.강형자(52)씨는 거래에 참여하기 위해 즉석에서 연회비 10만원을 내고 회원 가입을 했다. 그는 “작품 가격이 실제 가치보다 다소 낮게 책정됐다고 들었다”며 “현재는 소장용으로 구입하려 하지만 추후에 가치가 더 높아질 거란 기대심리도 있다”고 말했다.전에 없던 인파가 몰리며 예약된 350석은 동이 났고 추가로 마련한 200여석의 좌석은 물론 프레스석까지 빈 자리를 찾기 어려웠다. 이런 관심은 낙찰로 대거 이어졌다. 가장 고가에 낙찰된 작품은 김환기의 ‘24-ⅤⅢ-65 South East’였다. 이 작품은 치열한 경합 끝에 익명의 전화 응찰자에게 5억5000만원에 팔렸다. 김환기의 또 다른 작품 ‘무제’ 역시 애초 추정가인 4500만~1억원을 넘긴 1억1500만원에 낙찰됐다.가장 치열한 경합이 붙은 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이었다. 서산대사의 시를 적은 것으로 전재국씨가 1992년 결혼 선물로 받은 작품이다. ‘눈 덮인 들판을 걸어갈 때 모름지기 발걸음을 어지럽히지 말라. 오늘 내가 걸어간 발자국이 뒤에 오는 사람의 이정표가 될지니’라는 내용이다. 낮은 추정가인 200만원의 12배 수준인 2300만원에 팔렸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서예작품인 ‘고진감래’도 낮은 추정가인 100만원의 10배 수준인 1100만원에 낙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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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황의 늪’에서 터진 환호성경매장 분위기 역시 뜨거웠다. 김종학의 ‘밤풍경’은 현장과 서면·전화 응찰자의 치열한 경합 끝에 낮은 추정가(1500만원)의 3배 수준인 4400만원에 낙찰됐다. 이외에도 총 80점 중 20여 점이 경합을 거쳐 주인을 찾았다. 응찰객 사이에서 여러 차례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졌다. 아깝게 작품을 놓친 이들 사이에선 아쉬움의 탄식이 뒤섞여 나오기도 했다. 2008년 이후 현재까지 불황의 늪을 헤매던 미술경매 시장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광경이었다.최종 결과는 더 놀라웠다. 낙찰률 100%, ‘완판’이었다. 낙찰총액 25억7000만원으로 집계됐다. 애초 낮은 추정가 기준으로 예상했던 17억원 규모를 훨씬 웃돌았다. 최근 경매 낙찰률이 평균 70%대라는 점에서 봤을 때 100% 판매는 쉽지 않은 결과다. 이상규 대표는 경매 전날 “낙찰률 90%를 넘기는 것이 목표”라고 말했었다.이 대표는 “대개 유명인의 컬렉션은 시장가보다 더 높은 가격을 책정하는데, 이번엔 추징금 환수가 목적임으로 프리미엄이 붙지 않은 가격을 책정한 때문인 것 같다”며 “검찰 압류품인 만큼 추후 거래 내역이 드러나지 않을까 우려하는 고객들이 많았는데 이들을 안심시키는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이날 경매로 얻은 수익 25억7000만원 중 경매회사 수수료를 제외한 약 25억원이 국고에 귀속된다.2003년에 열린 전 전 대통령 재산 경매에선 일부 지인들이 경매에 대거 참여해 낙찰품을 전 전 대통령에게 돌려준 적이 있다. 이번에도 전 전 대통령의 측근이 작품을 구입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 대표는 “그분들은 돈이 없는 것으로 안다. 그분들이 참여했더라면 (낙찰총액이) 더 올랐을 것”이라며 “긍정적으로 봐 주셨으면 한다”고 일축했다.첫 경매 결과에 미술업계 관계자들은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이날 두 작품을 낙찰 받은 한 응찰객은 “이번에 우수한 작품들이 많이 나오기도 했지만 몇 년 새 이렇게 분위기가 달아오른 적이 없었다”며 “이번을 계기로 미술시장이 다시 살아날 거라 기대한다”고 말했다.서울 시내에서 화랑을 운영하는 업계 관계자는 “전재국씨가 미술품에 대한 남다른 안목을 가진 데다가 구입 당시 전문가들의 추천을 받아 수집한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미 한번 검증된 작품이라는 점, 스토리(전 전 일가가 소유했다)가 있다는 점에서 콜렉터들의 관심을 끌었다”고 말했다.이상규 대표는 “전재국씨가 애초 미술관 개관을 염두하고 작품을 모은 덕분에 작품성이 높은 작품이 합리적인 가격대에 판매됐다”며 “경매가 열린 계기는 상서롭지 않았지만 대중의 관심이 커진 만큼 새로운 콜렉터들이 늘어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경매는 3월까지 몇 차례 더 열릴 예정이다. K옥션과 서울 옥션 양대 경매사가 압류 미술품 600여점을 절반씩 나눠서 위탁받은 때문이다.다음 경매는 12월 18일 서울옥션 평창동 본사에서 오후 3시부터 ‘전(前) 대통령 소장품’이라는 이름으로 진행된다. 서울옥션이 경매에 부칠 압류 미술품은 155점. 80점을 판매한 K옥션에 비해 2배에 가까운 규모다. 총예상 낙찰액은 30억~40억원 규모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연희동집 거실에 걸려 있던 이대원의 ‘농원’이 최고가(예상액 2억5000만~4억5000만원)로 꼽힌다.겸재 정선의 ‘계상아회도(溪上雅會圖)’, 현재 심사정의 산수화 등 16점이 모인 ‘조선시대 화첩’은 낱장으로 경매된다. 최윤석 서울옥션 이사는 “화첩의 경우 후대의 누군가가 모은 것으로 별도의 발문 등이 없다. 추징금 환수가 목적이므로 나눠 팔아 시장의 진입 장벽을 낮추기로 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