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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1960년대가 자동차 디자인 황금기자동차 매니어를 제외한 일반 소비자는 자동차 앞면의 그릴을 보지 않고서는 브랜드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전면부가 비슷해졌다. 몇 년 전 한국과 유럽의 일반 소비자를 대상으로 신차 디자인 선호도 조사를 할 때 참관한 경험이다. 당시 시판 중이던 몇몇 자동차에 브랜드와 모델 이름을 없애고 모두 똑같은 그릴로 교체한 뒤 브랜드를 구별할 수 있는가를 알아보는 실험을 했다. 그런데 예상보다 더 많은 수의 사람들이 어느 브랜드의 차량인지를 구별하지 못했다. 그만큼 안전과 환경 규제로 인해 디자인의 독창성이 줄었다는 것을 입증한 셈이다.친환경 규제에 맞춰 새로운 자동차를 개발해야 하는 회사들은 기존 자동차 디자인에 내연 기관을 바꿔 출시하는, 이른바 디자인의 ‘틀린 그림 찾기식’ 신차를 앞다퉈 내놨다. 새로운 동력기술에 치중한 나머지 외관상 바뀐 것은 ‘에코’나 ‘하이브리드’라는 문구가 추가되거나 헤드램프 일부가 친환경 느낌을 주는 ‘블루 컬러 라이팅’으로 교체된 게 전부였다.이런 상황은 자동차 디자이너에게 새로운 도전을 강요했다. 새로운 타입이나 세그먼트의 신차 디자인을 해야 하는 당위성이다. 기아 쏘울이나 레이, GM의 올란도와 같은 차들이 여기에 속한다. 필자가 한국 GM에서 올란도 디자인을 개발할 때 GM 전 상품총괄 부회장인 밥 루츠는 최종 디자인 결정 단계에서 두 가지 안을 놓고 현재의 올란도를 선택했다. 각종 규제로 남들과 비슷하게 생긴 차를 GM이 만들 필요가 없다는 명확한 판단 아래 만든 다목적 자동차(MPV)이지만 스포츠형 다목적 차량 (SUV) 같은 크로스오버 타입을 택한 것이다. 밥 루츠의 결정은 신차 디자인이 정체된 상태에서 디자이너에게 막강한 구원투수 나 다름없었다. 지금도 필자가 그를 존경하는 이유다.기술의 발전이나 전파 속도는 어느 회사나 비슷하다. 이런 현 상은 전자제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최근 중국의 화웨이라는 스마트폰 업체가 국내에 신제품을 출시했다. 삼성과 LG가 국내 스마트폰 시장을 장악하는 상황에서 어떤 변화가 있을지 궁금했다. 놀라운 것은 화웨이의 스마트폰 기술이 삼성·LG와 비교 해서 뒤처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디자인도 국내 기업 제품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고 가격 경쟁력까지 갖췄다.대부분 자동차 회사도 해당 국가에 따라 차이는 있지만 대략 10년 정도의 무상 서비스(워런티)를 제공한다. 소비자가 자동차를 선택할 때 고려하는 연비 역시 동급차량의 경우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점점 기술력의 차이가 좁혀지는 상황에서 디자인의 차별화는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때로는 사회 체제의 변화도 디자인의 발전에 영향을 준다. 자유시장 경제가 동유럽이나 구(舊)소련, 중국 등에 도입되면서 자동차를 포함한 모든 산업재의 수요와 공급이 늘어났다.
사회 체제 변화도 디자인 발전에 영향 필자가 영국 디자인회사 IAD에서 근무했던 1993년, 체코의 자동차 회사인 스코다(SKODA)로 파견돼 프로젝트를 했을 때다. 스코다는 세계에서 가장 역사가 오래된 자동차 회사 중 하나로 당시 독일 폴크스바겐이 인수한 직후였다. 디자인 스튜디오에서 일을 시작하기 전 필자는 스코다의 박물관에 가봤다. 그곳에서 받은 충격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수십 년 동안 잠들어 있던 정말 아름다운 디자인의 차들이 전시돼 있었다. 체코가 공산주의 체제로 극심한 변화를 겪는 동안 이렇다 할 신차가 없었던 스코다는 ‘프라하의 봄’ 이후 새로운 신차 디자인을 준비했다. 폴크스바겐의 소형차인 폴로 차체(A04)를 이용한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강화된 안전 규제로 신차 모델은 과거의 아름다운 스코 다를 재현할 수 없었다.사회가 만들어내는 각종 규제는 필수 불가결이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기술은 삶의 질을 높여준다. 다만 이러한 이유들로 디자인의 영역을 좁히는 건 타협이 될 수 없다. 디자이너가 시대 흐름에 맞춘 해결책을 제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