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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 | 박보미의 ‘도시미술 산책’ ② 줄리안 오피 ‘군중(crowd)’ -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과 나 

정교함과 단순함의 절묘한 조화 돋보여 … 외로운 현대인의 위안거리 


‘군중(crowd)’: 서울스퀘어 미디어캔버스 LED벽에 설치, 7800×9900cm, 2009, 줄리안 오피
서울역. 수많은 사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걸어갑니다. 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무리 지었다가 흩어지고, 또 다른 사람들이 어디론가 열심히 갑니다. 북적이며 걷는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도 보입니다. 서울역 앞에 자리 잡은 국내 최대 오피스 빌딩 중 하나인 서울스퀘어(옛 대우센터빌딩) 벽면을 물들이는 작품 속 사람들입니다. 끊임없이 걷는 이들은 아티스트 줄리안 오피의 ‘군중(crowd)’입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반복되는 단순한 이미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 부산히 먹이를 찾는 비둘기들, 뭔지 모를 꾸러미를 든 아주머니, 행상에서 인스턴트 커피를 파는 할머니. 하릴없이 행인을 바라보는 허름한 노숙자들. 하루에도 수천 명의 사람들이 수억만개의 이야기를 담고 이 거리를 통과합니다. 수많은 당신과 내가 서울역을 스쳐갑니다. 가만히 보니 오피의 작품 속 저 가방 든 남자는 전 회사 동료를 닮았습니다. 우아하게 걷는 저 여자는 대학 동창을 떠올리게 하네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매일 반복되는 단순한 이미지인 데도 신기하게 질리지 않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동그란 머리에 몸통과 팔 다리를 흔들며 걷는 이 낙서 같은 작품 이 요즘은 앤디 워홀보다 인기를 누립니다. 얼마 전까지 다녔던 회사 로비 벽면에도 줄리안 오피의 한 여자가 하염없이 걷고 있었습니다. 그녀도 역시 동그란 머리만 있 지 얼굴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매일 아침 출근길 만나는 그녀는 매일 묘하게 달라 보였습니다. 어느 날은 봄바람에 들뜬 아가씨처럼 보였다가, 어느 날은 타성에 젖은 직장인처럼 무기력해 보였습니다. 또 어떤 날은 인간에게 무한한 노동만을 요구하는 산업사회의 표상처럼 보여 괜히 얄미워 보였지요.

첫 직장생활을 했던 여의도에서 제겐 회사 사람들 모두가 비슷한 직장인 무리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들의 얼굴이 복잡해지기 시작했습니다. 크고 작은 일을 함께 겪으면서 익명의 얼굴들이 각자 고유하고 사적인 사연을 가진 캐릭터들로 느껴지게 된 것입니다. 마치 고스톱 초보가 룰을 잘 모를 땐 담담하지만, 슬슬 판이 돌아가는 모양새를 읽기 시작하면 기뻤다 화 났다 몰입하듯 말이죠.

저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회사에 적응할수록 생존 방법을 조금씩 깨달았지만, 대신 마음의 평화는 잃었습니 다. 가끔 직장 생활이 너무 힘들어질 때면 이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어떨 땐 사람이든 일이든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요. 회사 생활에 지칠 때면 그냥 숨고만 싶었습니다. 아는 사람을 모른다고도 하고 싶고, 다가가 챙겨주고 싶은 마음을 참을 때도 있었습니다. 이 기적인 이유로 말이죠. 가까워지면 피곤하고 저 사람의 모든 이야기를 감당할 자신도 없었으니까요.

혹시 줄리안 오피도 알았을까요? 바쁜 서울 하늘 아래에선 서로 응시하는 것이 예의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래서 오피는 사람들의 표정을 비우고 그저 빈 동그라미로 남겨 둔 것인지도 모릅니다. 도시 속 군중들은 우연히 눈이 마주치면 서로 시선을 피합니다. 방심한 타인의 민낯에 새겨진 이야기에 가슴을 열기엔 우린 너무 바쁘니까요. 네, 그러니까 수없이 마주치는 인간들의 세월을 담은 주름과 혈관, 얼룩덜룩한 피부색이 담고 있는 암시 따위를 일일이 파악하며 살기엔 우린 너무 피곤 합니다.

얼굴을 빈 동그라미로만 만든 이유는…

줄리안 오피의 사람들은 차갑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묘한 상쾌함도 느끼게 합니다. 오피 특유의 단순성 때문입니다. 오피는 인물과 함께 풍경도 다뤘습니다. 풍경화에 도 역시 세세한 디테일은 과감히 생략했습니다. 보자마자 삶의 고단함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생활의 흔적, 예를 들면 길가에 뒹구는 쓰레기나, 조잡한 낙서, 작은 돌멩이 따위는 그림에서 찾아볼 수 없습니다.

좀 비현실적이지만, 또한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어디서 본 듯한 익숙함을 느끼는지도 모릅니다. 줄리안 오피는 사람의 뇌가 사진과 달리 사물을 온전히 객관적으로 인지하는 것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래서 간단히 생략하는 표현방법이 두뇌의 입장에서 보면 더 ‘리얼(real) 한 것’이라고요. 그럴까요? 우리는 스스로 ‘잘’본다고 믿었을 뿐, 사실은 ‘제대로’ 보지 못했던 걸까요? 실험 삼아 거울 없이 제 얼굴을 ‘오피’식으로 떠올려 봤습니다. 흠, 쉽지는 않네요. 아주 잘 알고 있는 얼굴이라고 생각했는 데 점점 확신이 없어집니다. 내가 어떻게 생겼더라?

결국 거울을 봅니다. 아, 손질할 때를 놓친 앞머리, 낮은 코, 땀구멍, 잡티, 각진 턱, 입술 주름 따위가 크게 확대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옵니다. 단순화고 뭐고 속부터 쓰립니다. 온갖 사적인 감정이 머릿속을 장악합니다. 적어도 스스로의 얼굴을 객관적으로 인지하긴 어렵단 사실은 증명되었습니다. 그래도 뭐, 어쩔 수 없지요. 어차피 ‘사물의 생김새’는 주관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니까요.

복잡한 건 네 마음뿐일지도

새삼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머릿속으로 보는 김 과장님과 당신이 보는 김 과장님은 같을 확률이 희박하다는 겁니다. 저와 당신의 머릿속이 다르니까요. 동일 인물이니까 똑같이 보일 거라는 것도 사실 믿지 못할 전제였네요. 엄청나게 단순해 보이는 오피의 인물들 이 지루하지 않은 건 누가 언제 보느냐에 따라 매번 달라지는 빈 표정 속에 비밀이 있습니다.

또 한 가지, 오피의 작품은 단순해 보여도 어떤 면에서 매우 정교합니다. 자세히 보면 관절의 움직임, 팔다리 흔들림의 각도 같은 게 철저하게 계산되어 있습니다. 정교함과 단순함이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덕분에 우리들이 볼 때 군중들의 움직임이 매우 자연스럽게 보이는 겁니다. 쓸데없는 과한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 으면서도 생동감이 느껴지는 존재. 생각해보면, 피곤하지만 외로운 도시인의 고독에 이보다 더 적당한 친구가 있을까요. 오피의 군중들은, 우리에게 필요 이상으로 가까이 다가와 귀찮게 하지 않으면서 사뿐사뿐 함께 걷습니다. 조용히, 경쾌하고도 산뜻하게.

글쎄요. 아직도 어떤 것이 정답인지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어설프게 한 사람에게 다가가서 너를 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가장 위험할 수 있습니다. 살짝 어긋난 마음이 오해와 미움을 싹트게 하고, 결국 섣부른 판단이었음을 깨닫게 될 때면 이미 돌이키기 어려울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마주 서서 속눈썹 개수까지 헤아릴 수 있을 만큼 눈을 맞추고 저 아래까지 마음을 열면, 오히려 단순해질 지도 모르죠.


박보미 - 문화예술 기업 ‘봄봄(vomvom)’ 디렉터. 홍익대 회화과를 졸업하고 국제디자인대학교대학원 (IDAS)에서 미디어디자인을 공부했다. 영화미술, 전시기획, 큐레이팅, 미술칼럼 등 다양한 분야에 서 아트디렉터로 활동 중이다.
그런 상념 속에 어지럽게 휘청이며 서울역에서 버스를 기다리다 보면, 오피의 군상들이 우아하게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타인이지만 매우 낯익은 그들을 바라봅니다. 군상들은 제게 이렇게 말합니다. 뭘 그렇게 고민해? 어쩌면 복잡한 건 네 마음속인지도 몰라. 단순하게 바라보라고. 어때, 너도 우리처럼 걸어보렴. 가볍고 산뜻하게, 우아하게! 마침 윤상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이어폰에서 흘러나옵니다. ‘잠깐 동안 멈춰 서서 머리 위 하늘을 봐. 우리 지친 마음 조금은 쉴 수 있게 하잖아. 한걸음 더 천천히 간다 해도 그리 늦는 것은 아냐. 이 세상도 사람들 얘기처럼 복잡하지만은 않아.’

줄리안 오피

- 1958년 영국 출신의 팝아티스트. 영국 골드스미스칼리지를 졸업 했다. 서울을 비롯해 영국·독일·스위스 등 전 세계에서 전시될 정 도로 인기가 많은 작가다. 회화, 디자인, 조각, 미디어아트 등의 표 현방식으로 인물이나 풍경을 단순하게 표현하는 픽토그램 스타일 이 유명하다. 최근 신사동의 걷는 사람들을 주제로 한 작품이 프 랑스 파리의 시티즌엠호텔에 전시됐다. 영국예술위원회, 런던 브 리티시미술관, 피츠버그의 카네기미술관, 스페인 발렌시아의 아 이반현대미술관, 런던 테이트 컬렉션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작품 감상할 수 있는 곳: 서울 중구 남대문로5가 541 서울스퀘어

서울스퀘어빌딩은 저녁 8시부터 11시까지 매 시각마다 10분씩 서울스퀘어 정면 벽면을 미디어 캔버스로 활용해 작품을 선보인다. 오피의 작품뿐만 아니라 크리스마스, 새해, 월드컵, 한글날 등 각종 기념일이나 행사를 기념해 미디어 아트 기획전이 열리기도 한다. 서울스퀘어는 과거 대우그룹의 대우센터빌딩이었다. 2007년 모건스탠리가 1조원에 가까운 돈을 들여 매입한 뒤 리노베이션하는 과정에서 외관에 미디어 파사드를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모건스탠리는 가나아트센터에 미디어 파사드 설치를 일임했고, 가나아트센터는 모건스탠리와 서울시 등과 상의해 줄리안 오피 ‘군중’을 최종 선정했다.

오피의 작품은 건물 4층부터 23층에 설치된 4만2000개의 발광다이오드(LED)를 통해 나타난다. 단일 미디어 파사드로는 세계 최대 규모다. 무려 30억원이 투입된 LED 전구는 효성의 계열사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 제품이다.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는 디스플레이와 조명시스템용 LED를 생산하는 LED 응용분야 전문기업. 서울스퀘어 미디어파사드 설계도 갤럭시아일렉트로닉스가 담당했다.

서울스퀘어에서 줄리안 오피의 작품은 상설전시 된다. 다만 향후 서울스퀘어 소유주가 바뀔 경우 전시 일정이 바뀔 여지는 있다. 현재 서울스퀘어 소유주는 케이알원기업구조조정부동산투자회사라는 리츠회사로, 모건스탠리PE(AHI Holding B.V)가 대주주다. 10월 중엔 매주 월·수·금 저녁 8시부터 8시 10분까지, 9시부터 9시 10분까지, 10시부터 10시 10분까지, 그리고 11시부터 11시 10분까지 줄리안 오피의 ‘군중’이 디스플레이될 예정이다. 자세한 시간표는 서울스퀘어 홈페이지(http://www.seoulsquare.com) 참조.



1258호 (2014.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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