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장수기업으로 가는 길 ‘코치(COACH)’-건전한 오너십(Ownership - ‘내 핏줄 아니면…’이란 집착 버려라 

‘장수기업=가족기업’ 공식은 없어 … 소유의 영속성보다 존속의 영속성에 무게 


▎1. 1570년 문을 연 영국 종 제작회사 화이트차펠 벨 파운드리의 정문. 2. 화이트차펠 벨 파운드리는 직원 수가 25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지만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녀갔을 정도로 영국에선 널리 알려진 장수기업이다. 3. 영국의 상징 빅 벤(Big Ben). 15분에 한번씩 울리는 이 시계탑의 종은 화이트차펠 벨 파운드리가 1858년 만들었다.
프랑스 파리 북쪽에 위치한 르 고엑스(LE GOUEIX)는 직원 수가 50명에 불과한 작은 회사다. 전동 드릴이나 배관등 에너지 관련 설비를 유통하는 게 주 사업이다. 작다고 허투루 보면 안 된다. 매출이 2000만 유로(약 275억원)에 달하고, 파리뿐만 아니라 프랑스 전역에 유통망을 보유하고 있는 강소기업이다. 프랑스의 세계적인 수처리 회사인 베올리아도 이 회사의 고객이다. 1862년 처음 문을 열었으니 150년이 넘은 장수기업이다.

동시에 가족기업이다. 프랑소아 꽁땅 회장이 처가의 사업을 물려받아 5대째 경영하고 있다. 지분은 꽁땅 회장과 그의 아내가 100% 소유하고 있다. 그에겐 3명의 자녀가 있지만 르 고엑스와 전혀 무관한 일을 한다. 알짜 회사를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느냐마는 꽁땅 회장은 “자녀들이 원치 않는 다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잘라 말한다.

“상속이나 경영 승계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지만 그건 말 그대로 여러 경우의 수 중에 하나죠. 억지로 시킬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가업 승계 문제는 전적으로 그들이 선택할 문제입니다. 한다고 하더라도 능력이 없으면 넘겨 줄 수 없습니다. 제 주위엔 좋은 경영 성과를 내는 경영자들이 매우 많습니다. 이들에게 회사를 넘기는 것도 좋은 방법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누가 소유하느냐보다 누가 기업을 존속할 수 있게 하느냐가 훨씬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이죠.”

여러 가문이 번갈아 경영하는 가족기업 많아

알려진 대로 유럽 지역엔 장수기업이 매우 많다. 장수의 기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정확한 숫자는 달라지겠지만 200년 이상의 역사를 가진 기업만 유럽 내에 약 4000여개다. 독일이 1563개로 가장 많고, 프랑스가 331개로 그 다음이다. 장수기업 경영자들의 모임도 활발하다. 영국 기업이 중심이 된 ‘300년 클럽(Tercentenarians Club)’과 프랑스 장수 중견기업 모임인 ‘소코다(Socoda)’ 등이 대표적이다. 유럽과 일본 등 세계 각국의 200년 이상의 장수기업 경영자 모임인 ‘레 제노키앙(Les Henokiens)’도 잘 알려져 있다.

이들 장수기업의 상당수는 가족기업이다. 가족기업은 특정 가족이 회사를 소유한 동시에 가족 구성원이 경영에 참여하는 경우와 소유만 하고 있는 경우로 분류할 수 있다. 유럽 내에선 이탈리아가 가족기업 비중이 가장 크다. 2012년 기준으로 이탈리아 전체 기업 중 무려 72%가 가족기업이다. 국내총생산(GDP)의 80%, 고용의 75%를 책임진다. 물론 작은 기업이나 소규모 사업일수록 가족기업 비중이 크지만 매출 5000만 유로(약 700억원) 이상의 중·대기업도 7320곳 중 58%(4249곳)가 가족기업이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 있다. 위에서 말한 통계는 현 시점에서 가족이 경영을 하고 있다는 의미지, 특정 가문이 계속에서 대를 이어 사업을 해왔다는 의미는 아니다. 수백년 동안 변함없이 한 가문이 회사를 소유해 온 곳도 있지만 대다수는 시대를 거치면서 주인이 계속 바뀌었다. 장수기업 중 가족기업 비중이 크고, 가족 구성원이 함께 경영하는 사례가 많은 게 사실이지만 회사를 특정 가문이 계속해서 소유해온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세계적인 관광도시 런던엔 상징물이 많지만 그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 중 하나가 바로 빅 벤(Big Ben, 웨스트민스터궁전 북쪽 끝에 있는 시계탑 또는 거기에 달린 큰 종)이다. 1834년 웨스트민스터궁전이 화재로 소실된 뒤 복구하는 과정에서 지어진 빅 벤의 4면에는 세계에서 가장 큰 자명종 시계가 달려 있다. 정확히 15분에 한 번씩 시간을 알리는데 이 거대한 종을 만든 회사는 화이트차펠 벨 파운드리(WHITECHAPEL BELL FOUNDRY)다. 런던 동쪽 화이트차펠 지역에 위치한 작은 회사(직원 25명)지만 앞서 말한 ‘300년 클럽’에 이름을 올린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종 제작회사다. 출발점은 1420년, 공식적으로 회사가 문을 연건 1570년이다. 400년을 훌쩍 넘었다.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다녀갔을 정도로 영국 내에선 널리 알려진 장수기업이다.

이 회사는 현재 휴즈(Hughes) 가문이 100% 소유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 긴 세월을 한 가문이 이끌어온 건 아니다. 화이트차벨 벨 파운드리는 현재 대표를 맡고 있는 앨런 휴즈의 할아버지인 아서 휴즈가 1904년 인수했다. 가문으로 따지면 휴즈 가문이 6번째 주인이다. 주인은 수 차례 바뀌었지만 종을 만드는 특유의 기술력은 그대로 이어지고 있다. 2012년 런던올림픽 오프닝 벨을 디자인할 만큼 높은 품질을 인정받는 화이트차벨 벨 파운드리는 지금도 3년 정도의 주문 물량을 확보하고 있을 정도로 명성이 높다.

1997년부터 회사를 이끌어온데다 나이도 60대에 접어들었으니 슬슬 가업승계를 고민할 때도 됐지만 앨런 대표는 느긋하다. 그의 두 딸은 가업과 전혀 무관한 피아노와 마케팅을 전공했고, 아직까진 직업을 바꿀 생각이 없다. 앨런 대표 역시 강요할 생각이 없다.

“첫째는 피아니스트라 직업을 바꿀 가능성이 거의 없을 테고, 대형 수퍼체인 매니저 일을 하고 있는 둘째가 그나마 확률이 높네요. 어렸을 때 직장 경험을 쌓지 못하고, 이 일에만 매진한 걸 후회하는 저로서는 둘째가 다른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사업에 도전하겠다면 당연히 환영해야죠.”

그는 딸이 승계 의사를 전하면 전적으로 돕겠다는 뜻을 밝히면서도 검증 역시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아무리 가족이라도 능력 없는 사람에게 사업을 물려줄 순 없죠. 종 제작은 끈기와 기다림이 중요한 일입니다. 주문부터 설계, 시안, 제작, 설치까지 길게는 10년 이상 걸리기도 하죠. 이일을 사랑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그런 의지와 능력이 있는지에 대한 검증은 딸이라도 피해갈 수 없죠. 딸도 증조할아버지 때부터 해온 이 일의 가치를 분명히 알고 있겠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그의 몫이겠죠.”

자식에게 승계 강요하지 않아


▎일본 쌀과자 생산업체 아미다이케 다이코쿠의 3대가 한 자리에 모였다. 이 회사엔 전임 사장이 만 60세가 되면 은퇴하고, 아들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있다.
가족기업이 많은 유럽에선 의외로 ‘반드시 내 자식이 사업을 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덜하다. 오히려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는 분위기가 자발적인 승계를 유도하고, 혹 여의치 않은 경우라면 가업을 다른 가문에게 이양하는 일도 흔하다. 일본 나라시에 있는 장수기업 나카가와 마사시치 쇼텐의 나카가와 준 사장은 “자녀에게 가업 승계에 대한 부담을 줄여줘야 한다”고 지적한다.

“아버지가 승계를 바란 적이 없고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가업은 제가 선택할 수 있는 여러 직장 중 하나일 뿐이었죠. 처음엔 전혀 관심이 없었어요. 대기업 전자회사를 다니다 가업을 잇겠다고 결심했을 때도 개인이 역량을 발휘하기 힘든 큰 회사에 염증을 느꼈기 때문이었죠. 시대가 많이 변했어요. 핏줄에 연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옛날부터 삼베로 수공예품을 만들어온 나카가와 마사시치쇼텐은 1819년부터 일본 장수 백화점 미스코시에 납품하기 시작했다. 최근엔 일본 공예품(선물류)을 주로 생산하며 도쿄와 나라 백화점 등에 직영점을 운영하고 있다. 현재는 13대 나카가와 준 사장이 운영 중이다. 그는 일본 전통 문화 계승자로 일본 방송에도 자주 소개되는 유명 인사다. 전통 문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그가 부모 세대로부터 승계의 압박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이색적으로 들린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장은 “죽을 힘을 다해서 일군 기업이라고 승계에 대한 과도한 부담을 주면 자녀가 도망가게 마련”이라며 “어릴 때부터 일의 가치에 대해 스스로 체득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기업가 정신을 키워주면 나중엔 이를 자연스레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고 지적했다.

가족기업의 형태를 유지하면서도 가문을 바꿔가며 기업의 전통을 이어온 사례는 또 있다. 7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이탈리아 조명회사 바로비에 앤 토소(Barovier&Toso)는 1900년대 초반 합병을 선택했다. 경영 상황이 어려워져 그랬던 게 아니다. 오히려 가장 잘 나갈 때 내린 결정이었다. 바로비에 앤 토소는 1200년대 안토니오 바로비에가 베니스 인근 무라노섬에서 유리를 만드는 장인으로 일하면서 출발한 회사다. 현재 19대손이 가업을 이어가고 있다. 아직도 무라노섬을 떠나지 않은 점, 입으로 불어 유리를 가공하는 전통 기법을 활용하는 점 또한 지금까지 그대로다.

바로비에는 20차례 정도의 크고 작은 전쟁을 겪으면서도 독자적인 공예 기술을 후세에 전승했고, 시대에 맞는 다양한 제품을 내놓아 사랑을 받아왔다. 초창기엔 컵이나 접시를 주로 만들었고, 지금은 고급 샹들리에 등 조명기구를 주로 생산한다. 루비이통·까르티에 매장과 매리어트·하얏트 등 특급 호텔의 인테리어 제품으로 사용될 만큼 세계적인 명품으로 꼽힌다.

이 회사에 토소(Toso)라는 이름이 더해진 건 1936년이다. 당시 회사를 이끌던 에르콜 바로비에가 정부의 명예기사 훈장을 받을 만큼 중흥기였지만 그는 사업 영역을 확대하기 위해 토소가문과 합병을 결정했다. 유리뿐만 아니라 크리스탈·자개 등으로 제품군을 확대하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회사의 미래를 위해 가문의 혈통이나 순수한 역사를 포기한 것이다. 지금도 두 가문은 공동으로 경영을 이끌고 있다.

장수기업이라고 무조건 가족이 직접 경영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최근엔 소유와 경영을 분리해 전문가에 경영을 맡기는 곳도 많다. 이익 분배에 따른 가족 간 분쟁 심화, 가족 구성원을 우선시하는 인사제도 등 가족경영의 단점이 부각되면서다. 독일 렌즈회사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는 지난해 창립 100주년을 맞은 장수기업이다. 1980년대 초 만다만 가문이 회사를 인수해 100% 소유하고 있는 가족기업인데 경영은 철저히 전문경영인에게 맡긴다. 한번 고용하면 10년 이상 회사를 경영한다. 실적이 나쁘다고 1~2년마다 CEO를 바꾸는 한국 기업과 다른 점이다. 오너가 미래 전략 등에 대해 CEO에게 제안할 수 있지만 구체적인 지시를 내리는 건 일종의 금기다. 볼프강 젤처 슈나이더 CFO(최고재무책임자)는 “소유주인 만다만 가문은 1년에 한두 번 실적 등에 관한 보고를 받을 뿐 일체 경영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세계적인 렌즈 기술력을 보유한 슈나이더는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챔피언(기업 규모가 크지 않지만 해당 분야에서 세계 시장점유율 1~3위 내에 드는 강소기업)이다. 슈나이더와 같은 히든챔피언은 독일에만 1000개가 넘는다. 이들 중 상당수는 소유와 경영이 분리돼 있고, 가족이 직접 경영할 의사가 있더라도 보통은 다른 회사에서 경험을 쌓고, 능력을 인정받아야 CEO가 될 수 있다.

경영자가 물려줘야 할 건 부 아닌 가치

이런 변화는 가업승계가 활발한 일본에서도 관측된다. ‘소유와 경영의 일치’가 대다수 일본 가족기업의 오랜 전통이었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일본 오사카에 있는 아미다이케 다이코쿠(Amidaike Daikoku)는 1805년 설립된 쌀과자 생산업체다. 아미다이케 다이코쿠의 쌀과자는 일본 전역 백화점과 공항, 신칸센 등에서 판매되는 인기 상품이다. 한해 매출은 100억엔(약 940억원) 정도다. 현재 5대째인 할아버지가 회장, 6대 아버지가 사장을 맡고 있다. 7대인 아들(전무)이 곧 사장 자리를 이어받을 예정이다.

이 회사는 200년 넘게 고바야시 가문이 대를 이어 경영하고있다. 전임 사장이 만 60세가 되면 은퇴하고, 아들에게 물려주는 전통이 있지만 쇼헤이 전무는 “이런 전통이 아들까지 이어질지는 알 수 없다”고 말했다.

“내년이면 마흔 살이 되는데 결혼이 늦어 아들은 이제 겨우v두 살입니다. 제가 물러날 시점에 아들은 20대일 텐데 경영권을 물려주긴 어렵다고 봐야죠. 저는 제가 가업의 장점과 매력에v대해 잘 알고 있지만 아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오늘 오후에 신입사원 교육이 있는데 아마 이들 중에v8대 사장이 나오지 않을까요? 회사를 경영할 만한 인재가 있었으면 좋겠군요.”

기업의 장수 비결을 단순히 가족기업에서만 찾는 건 단견이다. 유럽과 일본의 많은 장수기업은 이처럼 소유의 영속성보다 존속의 영속성에 더 중점을 두고 있었다. 국내 기업이 장수의 꿈을 꾸고 있다면 가장 먼저 ‘내 핏줄에게 물려줘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야 할 지 모른다. 자질이 없는데 무턱대고 사업을 물려받았다가 자식 세대에서 회사가 없어지는 건 국가적으로도 엄청난 손실이다. 프랑소아 꽁땅 르 고엑스 회장은 기업가라면 좀 더 큰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저는 경영자가 유지하고 지켜가야 할 건 부(지분)이 아니라아주 오랫동안 축적된 기업의 가치(기술력)라고 생각합니다. 주인이 바뀌어도 이건 사라지지 않죠. 지금은 이 회사가 내 것이지만 시간을 길게 보면 저도 이 회사의 중간 관리자쯤 될 겁니다. 경제 생태계 안에서 기업은 사람처럼 태어나고, 죽습니다. 누구의 것이랄 게 없죠. 내 자식이 회사의 다음 주인이 돼서 나쁠 것 없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사회 전체적으로 보면 누가 주인이냐는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1265호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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