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ver Story

장수기업으로 가는 길 ‘코치(COACH)’-기술 전승(Hand down technique) - 새로운 기계보다 숙련된 기술자를 대접 

오너처럼 직원도 3대째 한솥밥 … ‘듀얼시스템’으로 전문 인력 채용 


▎1. 독일 필기구 제조업체 파버카스텔은 2010년 창립 250주년을 맞았다. 독일 스테인 파버카스텔 본사 직원들이 이를 기념해 특별한 사진을 남겼다. 2. 지난해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 창립 100주년을 맞아 열린 사진전에서 요제프 슈타웁 사장(사진 왼쪽)과 직원들이 창립 당시 사진을 감상하고 있다. 3.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의 독일 본사 공장.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서쪽으로 약 85km 떨어진 바트크로이츠나흐는 인구 4만8000여명이 사는 소도시다. 이 조용한 도시 한가운데는 커다란 렌즈 모형을 중심으로 한 로터리가 있다. 이 지역을 대표하는 기업인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Schneider Kreuznach)’ 본사가 바로 이곳에 있다. 1913년 설립이후 줄곧 지역의 터줏대감 역할을 해온 이 기업은 주로 카메라·망원경·현미경 등에 들어가는 각종 렌즈를 개발·제작한다.

이 회사의 렌즈는 미국 항공우주국(NASA)의 각종 장비에 들어갈 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자랑한다. 렌즈뿐 아니라 정밀한 가공이 필요한 유리 제품도 이 회사의 주력 생산품이다. 이 회사에서 다루는 20㎚(나노미터) 두께의 렌즈를 정밀하게 측정할 기계를 구할 수 없어 직접 제작한다. 렌즈를 고정할 미세한 금속 가공제품도 손수 만든다. 지방 소도시에 있는 작은 기업이지만 초정밀 렌즈와 관련된 모든 제품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을 자랑해 독일의 대표적인 ‘히든챔피언’으로 꼽힌다.

직원도 3대째 한 회사에서 근무


▎1. 1904년 세계 최초로 발명된 파이퍼 배큐움의 석유 공기펌프. 2. 독일 아우크스부르크의 에르하르트라이머 본사 전경.
히든챔피언은 독일 경영학자 헤르만 지몬이 제시한 개념이다. 대중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지만 각 분야에서 세계 시장 점유율 1~3위를 차지하는 강소기업을 뜻한다. 이에 해당하는 히든챔피언은 전 세계 2700여개로 추산되는데, 그중 절반가량인 1300여 기업이 독일 기업이다. 이들 대부분이 제조 업종이다. 바바라 촐만 한독상공회의소 사무총장은 “독일 제조업은 장인정신과 기술력을 중시하는 히든챔피언이 받치고 있다”고 “기술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오랜 경험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홍국 하림그룹 회장 역시 “독일을 보면 제조업은 적어도 3대를 거쳐야 히든챔피언이 될 수 있다”며 “제조업은 하루아침에 기술력이 극대화 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대를 거쳐 기술력을 전승한 기업이 많은 독일에는 유난히 경쟁력 있는 장수기업이 많다.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 역시 오랜 세월 오직 ‘한 우물’만 파왔다.

지난해 2월 설립 100주년을 맞은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에서는 이를 기념하기 위한 사진전이 열렸다. 1913년 30여명의 직원이 회사 인근 감자 밭에 앉아 찍은 흑백사진이 이 회사의 첫번째 단체 사진이었다. 오래된 사진을 감상하던 직원들이 갑자기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요제프 슈타웁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 사장(CEO)은 “행사장 곳곳에서 ‘우리 할아버지가 여기 계시네’ ‘이 분은 우리 증조할아버지셔’라는 말이 들려왔다”며 “기업 창립기념식이 마치 가족 행사 같은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고 회상했다.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에서 30년 넘게 광학디자이너로 근무하는 우도 샤우스(59)씨 가족은 3대째 이 회사에 몸 담고 있다. 샤우스씨가 1976년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에 입사했을 때 그의 아버지 에리히 샤우스(87)씨는 표준화부서장으로 활약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1947년 자재설계자로 입사한지 꼭 30년째 되던 해 입사한 그는 아버지와 나란히 출퇴근하는 생활이 늘 즐거웠다고 회상했다. 샤우스씨는 “아버지가 회사에서 능력을 인정받는 모습을 보며 이미 오래 전부터 이곳을 내 미래의 직장으로 생각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한 회사에서 쌓은 장인정신은 2010년 샤우스씨의 딸 안네마리 베텔(30)씨가 홍보부에 입사하며 이제 3대로 이어지게 됐다.

이 회사에서 샤우스씨 가족처럼 2~3대가 함께 일하는 풍경은 결코 낯설지 않다. 매년 창립기념식에서 근속연수 50년을 넘긴 직원들에게 공로상을 수상하는 일도 예사다. 새로 임명된 CEO보다 회사를 훨씬 잘 아는 직원이 적지 않다. 이 회사 오너인 만다만 가문은 현재 2대째 경영에 참여하고 있고, 현재 3세대가 경영수업 중이다. 회사와 직원이 대를 거쳐 함께 성장한 것이다.

역사가 긴 만큼 위기도 많았다. 최대 위기는 아날로그 카메라에서 디지털 카메라로 전환되는 시기였다. 1990년대 들어 디지털 카메라가 보급되기 시작하며 긴 세월 아날로그 카메라에 맞춰 제작하던 렌즈를 모두 디지털 카메라에 맞춰야 했다. 위기를 기회로 만든 건 직원들의 장인정신이었다. 슈타웁 사장은 “고객이 원하는 대로 제품을 변화시키는 건 제조사로서 당연한 임무인 동시에 크나큰 도전이기도 하다”며 “위기가 찾아올 때마다 직원들도 함께 변화했다”고 설명했다. 누구보다 회사에 대해 잘 아는 숙련된 기술자들이 신제품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고, 회사는 이에 필요한 인력은 충원한다. 이 과정에서 직원을 해고 하는 일은 극히 드물다.

“때로는 오랜 경험이 새로운 기계보다 더 힘을 발휘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 회사가 히든챔피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오랜 기간 충성을 바친 직원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분야에서만큼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지닌 장인인 동시에 회사의 성공과 실패를 다 알고 있는 산증인이기도 합니다. 우리 회사에선 직업 교육에 필요한 시간을 최소 3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신입 직원이 기술을 익히고, 제대로 쓸 수 있게 되기까지는 적어도 10년이 걸리죠.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해서 고용이 불안정해진다면 어떤 직원들이 회사를 믿고 기술을 이어 받겠습니까?”

한우물 파고 무리한 확장은 피해


▎독일 뉘른베르크 뷰러모터 본사 내 소음 측정 실험실.
슈나이더 크로이츠나흐에는 최근 새로운 직원이 들어왔다. 인도 출신의 소프트웨어 기술자다. 기존 렌즈로만 부족한 부분을 소프트웨어를 통해 보정하는 사업에 진출했다. 기존 직원들은 제조업에선 강하지만 소프트웨어를 담당하긴 역부족이었다. 예를 들면 스마트폰 카메라에는 5~6개의 렌즈가 들어가는데 이 모든 렌즈를 최상급으로 만들기에는 비용이 많이 발생한다. 회사 기술자들은 가격 대비 성능이 좋은 렌즈를 쓰되 부족한 기능은 소프트웨어를 통해 보정하자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이 아이디어를 바탕으로 회사는 소프트웨어 기술자를 채용해 사업군을 넓혀가고 있다.

프랑크푸르트 인근 아쓸라에 지역의 ‘파이퍼 배큐움(Pfeiffer Vacuum)’ 역시 대표적인 히든챔피언이다. 1890년 창업 이후 120년 간 진공 기술을 연구해 관련 분야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자랑한다. 반도체나 디스플레이 제품을 다룰 때 진공상태에서 이뤄지기 때문에 반도체 산업에서는 진공기계가 필수다. 이 회사 매출의 15%가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에서 창출 될 만큼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특히 이 회사의 주력 제품인 터보펌프는 1958년 개발된 이후 수년 간 세계 점유율 1위를 고수하고 있다. 1996년 독일 기업으로는 처음으로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하기도 했다. 만프레드 벤더 파이퍼 배큐움 사장은 “가장 잘하는 분야에 집중한 것이 장수한 비결”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파이퍼 배큐움의 매출은 4억872만 유로(약 5650억원)다. 매년 매출의 5% 이상을 연구개발(R&D)에 투자한다. 벤더 사장은 “우리는 기술력 없이는 살아남을 수 없다”며 “제품을 개발하는데 그치지 않고 경쟁력을 유지하기 위해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투자의 다른 한 축은 뛰어난 직원들을 키우는 일이다. 회사 직원의 90% 이상이 진공펌프 생산관련 직업교육을 이수한 전문가들이다.

세계적으로 2300명의 직원 중 본사에 채용된 인원은 650명 남짓. 이들 대부분이 인근 대학 출신이다. 직원을 채용하는 방식은 ‘듀얼시스템(Duales Studium)’으로 불리는 직업교육훈련 시스템을 통해서다. 국내에도 ‘일학습병행제’라는 이름으로 도입된 독일의 듀얼시스템은 말 그대로 일터와 학교 모두에서 직업교육을 실시하는 이원화 교육시스템이다. 학교와 직장에서 각각 이론과 실무를 동시에 익힌다.

독일 학생들은 일반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이 같은 시스템을 거친다. 독일에서 듀얼시스템에 참여한 기업은 48만개에 이른다. 전체 기업의 30%에 이를 정도로 활성화돼 있다. 대한상공회의소는 “독일에서는 듀얼시스템 과정을 수료한 훈련생의 60% 이상이 해당 기업에 채용된다”며 “듀얼시스템을 통해 기업은 숙련된 인재를 기르고, 구직자는 채용에 따른 불확실성을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듀얼시스템은 독일 내 실업률을 낮출 뿐 아니라 신입직원의 이직률을 낮추는데도 효과적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파이퍼 배큐움은 가족승계 기업이 아니다. 창업자인 아토 파이퍼가 자녀가 없던 탓이다. 그가 물러난 후 스위스 기업에 매각돼 운영하다가 1996년 상장한 후 전문경영인 체제를 이어오고 있다. 경영구조는 달라졌지만 진공 분야에 대한 장인정신은 흔들림이 없었다. 벤더 사장은 “매일 조금씩 더 발전해야 한다”면서도 “진공기술과 관련되지 않은 사업으로의 확장은 생각해본적이 없다”고 말했다. 탄탄한 자금력을 자랑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은 금물이라는 게 이들의 설명이다.

120년이 넘는 역사 동안 이 기업이 가장 공격적인 M&A를 한것은 2010년경이다. 그전까지는 오직 진공펌프 제조에만 집중했다면 2010년 프랑스 알카텔의 진공기술 사업부를 인수하며 진공실 설비로까지 분야를 넓혔다. 같은 해 진공부품 기업을 인수해 파이퍼 배큐움의 전통적인 기술에 새로운 방식을 덧입혔다. 긴 역사 동안 사업군을 확장한 것은 이 두 번의 사례가 전부일 정도로 보수적인 경영을 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와 한국 등에 생산공장을 두고 중국·대만·싱가포르 등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며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고 있지만 본사는 120년 전 그대로 독일 아쓸라에 두고 있다. 벤더 사장은 “진공기술은 고도의 기술을 다루는 만큼 장인정신이 필요하다”며 “훌륭한 기술자들이 오랜 세월 이곳을 터전으로 삼고 있고, 그들의 기술을 배우기 위해 인재들이 몰려 굳이 대도시로 갈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설명했다.

산업 자동화 장비 생산업체인 ‘에르하르트라이머(Erhardt+Leimer)’에도 듀얼시스템을 통해 70여명의 교육생들이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 인근 아우크스부르크 대학 출신이다. 회사는 지역 대학과 연계해 학부 과정은 물론 석사 과정을 거친 인력을 적극적으로 채용한다. 이외에도 중국·베트남 등지에서 온 기술자도 있다. 이 회사는 섬유·제지·필름·타이어 코드 등에 쓰이는 웹 가이드 장비로 유명하다.

글로벌 금융위기 때도 연간 매출의 10% R&D 투자


▎파버카스텔 본사 공장에서 한 직원이 색연필 검수 작업을 하고 있다.
사업 확장에 다소 소극적인 다른 히든챔피언들과 달리 이 회사는 적극적인 R&D 투자로 매년 라인업을 추가했다. 에르하르트라이머는 연간 매출의 10%가량을 R&D 비용으로 쓴다. 제조업에만 초점을 맞추던 과거와 달리 애플리케이션 개발 등 소프트웨어 분야가 중요해지면서 투자 비중은 점차 늘어나는 추세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여파로 고전할 때에도 R&D 투자비용은 오히려 늘렸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볼프강 메르켈에르하르트라이머 최고운영책임자(COO)는 “이전에는 밀려드는 주문량을 맞추기 바빠 새로운 시도를 할 기회가 부족했는데 경기가 어려워지니 역으로 연구개발에 투자할 여유가 생겼다”며 “경제 위기 때 보수적으로 변하는 대신 도전적으로 시장을 개척했고, 경기가 회복된 다음 더 많은 주문을 받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1960년대부터 구축한 탄탄한 글로벌 네트워크도 힘을 발휘했다. 지난해에는 한국에도 지사를 설립할 만큼 글로벌 시장공략에 적극적이다. 메르켈 COO는 “독일뿐 아니라 전 세계 시장에서 다양한 피드백을 받고 있다”며 “한 분야에서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여러 분야로 기술을 넓혀나가는 시도가 우리 회사의 경쟁력이 됐다”고 설명했다.

‘뷰러모터(Buhler Motor)’ 역시 미국·멕시코·중국 등 6개국에 지사를 둔 글로벌 강소기업이다. 모터 기술력으로 연간 2억 1000만 유로(약 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기업이지만 정작 독일 뉘른베르크 본사는 조용한 주택가에 자리해있다. 주변이 온통 가정집뿐인 동네에 회사가 들어선 모습이 지금은 낯설지만 1928년 회사가 이 자리에 들어설 때만 해도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뷰러모터의 역사는 그보다 오래된 1855년부터 시작됐다. 이 회사의 창립자인 아돌프와 칼 하인리히 뷰러 형제는 동업자를 만나 장난감 사업에 뛰어든다. 형제는 장난감 자동차나 기관차를 만들어 팔았는데 실제 자동차처럼 모터와 기어가 필요했다. 그들은 관련 기술을 연구해 정교한 장난감을 만들었고, 곧 주변 장난감 회사들로부터 모터와 각종 부품을 사고 싶다는 주문이 밀려들었다. 2차 세계 대전이 1939년 발발하자 장난감 산업도 자연스레 쇠퇴했고, 뷰러모터 역시 위기를 맞았다. 형제는 장난감 부품을 만들던 기술을 발전시켜 자동차 부품회사로 변신을 꾀했다. 그로부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뷰러모터는 자동차 부품을 비롯한 각종 산업용 부품을 생산하는 기업으로 성장했다. 아우디·GM·포르쉐·폴크스바겐 등이 모두 뷰러모터의 고객사다. 페터 무어 뷰러모터 사장은 “변화했기에 살아남았다”며 “끊임없는 기술 개발이 뒷받침되지 않았다면 우린 여전히 작은 장난감 회사에 머물렀을 것”이라고 말했다.

뷰러 일가가 5대째 경영을 계속하면서 변치 않는 점은 기술개발에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회사는 한해 매출의 약 8% 규모인 1500만 유로(약 207억원)를 연간 R&D비용으로 쓴다.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력을 갖기 위해선 기술력 개발만이 살 길”이라는 것이 무어 사장의 설명이다. 뷰러모터는 고객사의 특성에 맞게 제품을 제작하는 방식을 내세운다. 고객사가 아무리 까다로운 주문을 해도 그에 맞는 제품을 내놓을 수 있다는 자신감이다. 무어 사장은 “기업이 오래도록 살아남았다는 것은 그만큼 오랫동안 지속된 신뢰 관계가 있다는 것”이라며 “신뢰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기술 개발을 소홀히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독일에서 만난 장수기업들은 한결같이 “오랜 기업의 역사가 곧 우리의 기술력을 증명한다”라고 입을 모았다. 역사가 곧 브랜드라는 것이다. 세계적인 필기구 브랜드로 알려진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이 대표적인 예다. 1761년 독일 스테인의 오두막집에서 연필을 만들어 팔기 시작한 이 회사는 이제 120개국에서 한 해 1조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6각 모양 연필의 원조가 바로 이 회사다. 파버카스텔은 150여년 전 동그란 연필이 굴러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6각 연필을 고안했고, 연필심 형태 역시 16경 도로 만들어 국제표준으로 만들었다. 한 회사의 제품 혁신이 전 세계 제품의 표준이 된 것이다.

파버카스텔 “역사가 곧 브랜드”

7500여명의 직원이 연간 20억개에 달하는 연필을 생산하는 이 기업의 제조 공장은 유럽을 비롯해 미주·아시아 등 세계 전역에 퍼져있다. 그럼에도 본사는 여전히 처음 오두막이 지어진 작은마을에 두고 있다. 이곳에는 총 745명의 직원이 근무한다. 2011년 창사 250년 기념식이 열린 파버카스텔 성을 비롯해 생산공장은 마치 이 회사의 역사를 그대로 보여주는 거대한 박물관 같다. 이런 덕에 파버카스텔 본사는 한 해 1만4000명의 방문객을 들이는 지역 명소로 자리 잡았다. 공장 안내를 맡은 지크프리트블롭 박사는 “20여년 전 뉘른베르크 대학 교수 주도로 건물 외벽에 알록달록한 색을 입히는 등 작은 변화가 있었지만 내부는 100여년 전과 비교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파버카스텔은 사명에서도 알 수 있듯 결혼으로 맺어진 두 가문이 경영하는 가족기업이다. 1978년부터 현재까지 회사를 이끄는 안톤 볼프강 그라폰 파버카스텔 회장은 8세대로, 현재 그의 아들이 가업을 잇기 위해 경영수업을 받고 있다. 산드라 수파 홍보담당자는 “가족승계의 장점은 단기적인 수익보다는 장기적인 관점에서 투자를 한다는 것”이라며 “꾸준한 투자로 기술 개발을 했기에 지속적으로 성장하는 기업이 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김선화 한국가족기업연구소장은 “창업자의 경영철학이나 가치를 가족 내에서 전수하는 게 쉽기 때문에 히든챔피언의 대부분이 가족경영을 고수한다”며 “가족경영은 다음 세대까지 보고 투자하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좋은 성과를 내는 경우가 많다”고 설명했다. 김 소장은 “100년, 200년이 넘은 장수기업들의 또 다른 특징은 한우물 경영을 한다는 건데 실제 명품 브랜드 10개 중 9개가 가족경영이자 한우물 경영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파버카스텔 역시 200년 넘게 한우물 경영으로 명품 브랜드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독일 내에서도 최장수 기업으로 꼽히지만 파버카스텔의 혁신은 계속된다. 이 회사가 2000년 내놓은 연필 제품인 ‘그립 2001’은 출시와 동시에 5개국의 국제 디자인상을 휩쓸었다. 이 제품은 흑연과 점토 등 순수 자연재료를 이용한데다 친환경 수성페인트로 제작했다. 친환경적인 제품은 파버카스텔의 미래 전략이기도 하다. 나무를 주재료로 하는 사업인 만큼 매해 2만 그루의 나무를 심어 소비량 이상의 나무를 키우고 있다. 수파 홍보담당자는 “장수기업으로서 기술력을 발전시키는 것만큼 중요한 게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것이라는 경영철학을 이어오고 있다”고 설명했다. 안톤 볼프강 파버카스텔 회장은 “평범한 일을 비범하게 잘하려는 노력과 책임감있는 기업가 정신이 파버카스텔이 수세기 동안 존재할 수 있었던 비결”이라며 “우리는 수년 간의 경험을 가치 있게 여기는 한편 새로운 아이디어를 더해 더 좋은 제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한다”고 말했다. 지난해 파버카스텔의 매출은 전년 대비 20% 상승했다. 연필 한 자루로 일궈낸 이 기업의 가치는 세월이 갈수록 더 빛나고 있다.

독일의 장수기업 - 탄탄한 기술력으로 승부하는 히든챔피언이 주축


독일은 회사 역사가 200년 이상 되는 초장수기업이 800개가 넘는 나라다. 장수기업이 많기로 유명한 일본 못지 않다. 독일 경제일간지 ‘한델스블라트’에 따르면 독일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기업은 1530년 설립된 단추제조업체 프림이다. 단순 금속가공 제품에 들어가는 기술을 발전시켜 전자부품과 회로기판 등 품목을 다각화해 꾸준히 성장하고 있다.

이밖에 와인잔 제조업체 포슁어(1568), 수제화 제조업체 에드마이어(1596)를 비롯해 독일에서 가장 오래된 민간 은행인 베렌베르크방크(1590), 대형 제약회사 머크(1688) 등 다양한 업종의 장수기업이 활약하고 있다. 한델스블라트는 “전문화로 기술 차별화를 꾀하면서 시대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한 기업들이 수백년째 수명을 이어가고 있다”고 분석했다. 머크처럼 초우량기업도 일부 있지만 독일 장수기업은 대부분 탄탄한 기술력을 지닌 중소업체가 많다. 독일 각 지역에 흩어져 특화된 기술로 세계 시장 점유율 1~3위를 기록하는 ‘히든챔피언’이 독일 장수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한다. 히든챔피언의 3분의 1이 100년 이상의 역사를 자랑한다. 제조업의 특성상 꾸준히 기술을 익히고 전승해야 발전하기 때문이다.

체계화된 마이스터 제도를 통해 우수기술을 확보하고, 인력 양성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도 독일 장수기업의 특징이다. 회사 내 훈련 시스템과 복지제도가 우수해 근로자 중에서도 3대가 같이 근무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학교에서는 이론 교육을, 회사에서는 실무 교육을 동시에 받는 듀얼시스템은 이미 독일 내에 정착된 제도다. 독일 내 48만개에 달하는 기업이 듀얼시스템에 참여해 인재를 교육·채용한다.

무리한 사업 확장에는 소극적인 반면 연구개발(R&D)에 대한 투자는 아끼지 않는 점도 특징이다. 현지 취재 중 만난 히든챔피언들은 일반적으로 한해 매출액의 5~10%를 R&D 비용으로 쓴다고 밝혔다. 듀얼시스템으로 산·학·연 협력체계가 공고해 R&D를 할 때도 다양한 국립연구소, 대학이 협력해 기술을 개발한다. 지역을 기반으로 기업을 경영하지만 글로벌 시장 공략에는 적극적이다. 유럽 전역은 물론 아시아·미국 등 해외 현지법인과 판매지사를 둔 기업이 적지 않다. 그러면서도 지역사회와 신뢰를 중시해 각종 사회공헌 활동을 펼치는 모습은 독일의 장수기업들이 오래 살아남은 비결이다.

1265호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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