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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형 장수기업 키우려면? - 부채와 위기까지 대물림 받을 책임감 절실 

재산 상속-기업 상속 구분 해야 … 까다로운 상속제도 완화 필요 


▎오른쪽 부터 상보그룹 김상근 회장, 하림그룹 김홍국 회장, 산업정책연구원 이윤철 이사장, 한국가족기업연구소 김선화 소장, 명문장수기업센터 윤성철 센터장.
한국에서도 기업의 지속가능성·영속성이 중요한 가치로 떠오르고 있다. 장수기업으로 가는 지름길은 없을까? 지난 11월 20일 서울 마포의 한국중견기업연합회 대회의실에서 이 주제를 놓고 이야기를 나눴다. 한국중견기업연합회에는 한국형 장수기업을 연구하는 명문장수기업센터와 관련 전문 학회가 있다. 참석자는 상보그룹 김상근 회장, 하림그룹 김홍국 회장, 산업정책연구원 이윤철 이사장, 한국가족기업연구소 김선화 소장, 명문장수기업센터 윤성철 센터장 등이다.

사회: 장수기업이 경제에 어떤 도움이 되나?


▎우리와 같은 업력을 가진 회사가 얼마나 있는지 조사해봤더니 우리가 전체의 2%에 들어가더라. 한국 산업의 역사가 짧다 해도 이렇게나 적나 싶었다. -김상근
김상근: 27세에 창업해 이제 65세다. 창립 38주년 기념식 때 전체 산업에서 우리와 같은 업력을 가진 회사가 얼마나 있는지 조사해봤다. 조사 결과 전체의 2%에 들어가더라. 아무리 한국 산업의 역사가 짧다 해도 30년 정도 넘은 회사 수가 이렇게나 적나 싶었다. 그만큼 한국의 산업 기반이 미약하다는 얘기다. 산업이 약하니 한국 경제가 약한 거다. 장수기업이 늘어나면 우리산업과 경제에 큰 힘이 될 것이다. 강한 기업이 살아남는다기보다 살아남은 기업이 강한 거다. 그렇게 강한 기업이 30%만 차지해도 한국 경제는 어떤 역풍 속에서도 강건할 거라고 본다. 후손에게 물려줄 수 있는 튼튼한 경제를 만들어주기 위해서 장수기업이 늘어나야 한다.

김선화: 국내 통계를 보면 창업 뒤 5년 생존율이 30%가 안 된다. 기업이 장수하면 고용 안정성과 부가가치가 창출된다. 30년 된 기업은 세금도 많이 내고 고용창출 효과도 높다. 이런 기업이 산업 전반에 많아야 경제가 안정된다.


▎외국 가문은 어릴 때부터 스튜어드십을 가르친다. 이는 ‘책임의 대물림’이다. 자신이 잘못하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김선화
이윤철: 1960~70년대는 정부가 기업에 시장 진입의 기회를 줬다. 그때는 그걸 선점한 사람이 시장을 차지할 수 있었다. 기업의 영속성은 그다지 고민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배경에서 대기업이 나왔고 그들이 경제를 이끌어왔다. 그러나 각종 위기를 겪으면서 대기업만으론 경제를 지탱하기 어렵다는 걸 절실히 느끼고 있다. 벤처기업이 중소기업으로, 중소기업이 중견기업으로,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커나가는 선순환 생태계가 없으면 경제의 고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중견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해야 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중견기업을 장수기업으로 만드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반기업 정서 탓에 중견기업의 장수기업화를 자칫 기업 봐주기 정책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보면 장수기업은 모든 국민들에게 도움이 되는 기업 형태가 될 수 있다. 안정적 고용 외에도 확고한 기업윤리 확립 차원에서도 장점이 있다.

사회: 한국에 장수기업이 왜 적은가?


▎제조 기술은 적어도 3세대 이상을 거쳐야 전문화될 수 있다. 기술을 축적하려면 장수기업이 돼야 유리한데, 세제로 영속성을 뒷받침해야 한다. -김홍국
김홍국: 제조 기술은 적어도 3세대 이상을 거쳐야 전문화될 수 있다. 기술을 축적하려면 장수기업이 돼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세제가 영속성을 뒷받침해야 한다. 독일을 보면 상속세로 받는 세수보다 기업을 유지시켜서 받는 법인세수 규모가 더 크다. 또 청년실업이나 경제력 집중 문제를 해소하는 데도 이런 세제가 도움이 된다. 국가가 상속세를 받는 것은 단기적으로는 세수증대로 보이지만 장기적으로는 손해가 될 수 있다. 상속세 문제 부터 해결하는 것이 장수기업을 키우는 관건이다.

김선화: 해외 여러 장수기업은 가족이 경영권을 승계한다. 창업자의 경영철학이나 가치를 가족 내에서 전수하는 게 쉽기 때문이다. 또 가족기업들은 멀리 보고 투자하기 마련이어서 대체로 좋은 성과를 낸다. 전문경영인은 자신의 임기를 먼저 생각하지만, 오너는 다음 세대까지 보고 투자한다. 하지만 한국의 현행상속세 제도로는 미래 계획을 세우기 어렵다. 상속세에 발목이 묶여 미래 지향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


▎장수기업은 내재적 역량과 재무 안정성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기대와 역할이 맞아야 장수기업이 될 수 있다. -윤성철
이윤철: 상속세 이야기를 하면서 주의할 점이 있다. 상속세 제도를 공론화하면 사회에서 거부감을 가질 수 있다. 애초 목적은 건전한 경제 시스템 구축인데, 기업 오너 일가를 위한 특혜로 볼 수 있다는 의미다.

김홍국: 대부분 유럽 사람들은 가업상속 기업이 아니면 경쟁력을 갖기 어렵다고 본다. 부의 대물림이 아니라 기술의 대물림을 중요 가치로 본다. 기업 철학과 영속성으로 가치를 만드는 데 장수기업은 그것으로 사회에 기여한다고 생각한다.

사회: 경영 승계를 부담스러워 하진 않는가?

김상근: 기업 승계는 부의 승계가 아니라 기술의 승계가 돼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보여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몇 십 년 일군 기업을 주니까 부만 넘어가는 걸로 보일 뿐이다. 요즘 사업가의 가장 큰 고민은 오히려 자녀가 승계를 받지 않으려 한다는 거다. 일본의 중소·중견기업을 보면 기업인 자녀들이 기업을 안받으려고 해서 걱정한다. 그래서 어렵게 일군 회사를 인수·합병(M&A)시장에 내놓고 있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프리마켓에서는 다각화보다는 전문화가 유리하다. 다각화라 하더라도 전문 다각화가 효과적이다. 그게 아니면 성공률이 떨어진다. -이윤철
자식 세대가 경영을 안 하려고 한다. ‘내가 왜 사업을 하느냐’고 반발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부의 대물림이라고들 하지만 실제론 거대한 채무의 대물림이기도 하다. 부채도 일정하지 않아 물려받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투자하기도 어렵다. 후계자는 다시 돈을 빌려 신사업을 만들어 선대의 채무를 벌어서 갚는 걸 반복해야 한다. 승계는 부채도 떠안는 것이라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다. 내 아들도 회사에서 10년째 근무 중이다. 지금도 ‘이 어려운걸 자식한테까지 줘야 할까’라는 생각마저 든다. 자식도 그런 생각을 할 법하다. 만약 사업을 잘못하면 한 순간에 아버지가 모은 재산을 날릴 수도 있다. 직장생활과 비교하면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이윤철: 가업상속은 위험의 대물림, 리스크에 대한 대물림이다. 가업승계는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부보다는 부담과 위험이 더 크다.

김선화: 미국에서는 승계를 논할 때 ‘스튜어드십(stewardship, 청지기)’을 자주 언급한다. 후계자는 선대로부터 기업을 받아서 다음 후계자에 물려줄 책임자라는 마음가짐을 의미한다. 외국 가문은 자녀가 어릴 때부터 스튜어드십을 가르친다. 이는 ‘책임의 대물림’이다. 자신이 잘못하면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후계자는 이를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일로 생각한다. 그래서 장수기업이 되려면 그 가족이 명문가가 돼야 한다. 자신의 후손에게는 더 큰 파이를 물려줘야 한다는 생각을 대대로 이어주는 것이다.

윤성철: 장수기업은 내재적 역량과 재무 안정성만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적 기대와 역할이 맞아야 장수기업이 될 수 있다. 장수기업들은 사회적으로 보면 일자리와 기술, 책임도 대물림 한다. 이 부분을 얼마나 잘할 수 있느냐가 장수기업의 관건이다. 무조건 오래 됐다고 다 좋은 기업은 아니다. 이를 담보 할 수 있는 건 기업과 가문이 명문으로 가려는 공통된 의지가 있어야 한다. 그래서 명문기업이 장수기업으로 가는 필요충분조건이다.

사회: 상속세 외에도 다른 어려운 점이 있다면.

김홍국: 대표적인 것이 차별 규제다. 규제 측면에서 보면 정부는 중소기업을 크게 도와준다. 하지만 중견기업이 되면 규제를 많이 받게 된다. 각종 규제가 늘어나니 기업이 성장하는데 부담이 된다. 기업이 커질수록 규제를 더 받는 제도는 한국이 세계에서 유일하다. 커지면 규제가 붙으니까 기업이 크지 못하고 영속성을 갖기 어렵다. 성장사다리를 놓는다는 말은 많지만 실상 제도는 정반대다.

사회: 어떻게 승계하는 것이 바람직할까?

김선화: 어릴 때 승계에 대한 부담을 주면 도망가게 마련이다. 자녀가 어릴 때는 기업의 가치와 기업하는 것에 대한 보람에 대해 얘기해줘야 한다. 그러면 나중에 자라서 가문을 위해서, 아버지가 이룩한 정신을 위해서 일하게 된다. 다른 일 하다가도 결국엔 회사로 돌아오게 된다. 어떤 기업은 3세를 위해 모임을 만들고 교육시킨다. 기업가 정신을 어릴 때부터 키우는 것이다. 3세들은 훗날 이를 자연스레 책임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김상근: 내 아들의 경우도 유학하고 왔을 때 회사로 들어와 일하라고 했다. 아들은 자신의 일을 하고 싶다며 외국에 있는 컨설팅 회사에 취직했다. 하지만 6년 전 금융위기로 회사가 파생 상품인 키코 탓에 손해를 많이 보자 외국 회사에 사표를 내고 돌아오더라. 가업을 바로 잇지 않는다고 해서 가업에 대한 책임의식까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김선화: 그렇게 책임감으로 돌아오는데 세금이나 승계 환경이 안 좋으니까 잘 돌아오지 않는 거다.

이윤철: 내가 2세라면 아버지가 재산을 모두 정리해서 그냥 내게 줬으면 좋겠다(웃음). 누구든 책임 질 것도 없이 현금만 많이 받고 싶을 거다. 달리 말해, 그래서 그런 일반적인 상속과 책임을 떠안는 기업 승계는 분명히 구분돼야 한다.

김홍국: 프랑스에서는 가업을 받을 때는 상속세를 이연 시켜준다. 결과적으로는 하나도 안 내는 경우도 많다. 재산만 넘겨받을 때 내는 상속세보다 가업을 승계를 할 때 내는 부담이 훨씬적다. 그렇게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사회: 기업가 입장에서 볼 때 장수기업이 기업의 사회적 역할을 더 잘 수행할 수 있다고 보나?

김홍국: 기업이 번 재산은 나라를 통해 분배된다. 사회적 기업 얘기를 많이 하지만 경제적 가치를 못 만들면 사‘ 회적 기업’이 아니다. 특히 각종 지원을 받아서 연명하는 기업은 사회적 기업이 아니다. 가치를 만드는 기업이 진짜 사회적 기업이다. 모든 기업은 궁극적으로는 자기 소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김상근: 오랜 역사를 이어가는 장수기업이라면 이미 사회적 역할을 하고 있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김홍국: 사회적 가치를 만들고 그런 역할을 하지 않으면 시장이 그냥 놔두지 않는다. 소비자가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다. 반사회적인 짓을 한 회사는 오래갈 수 없다. 당장은 비리를 감출 순 있지만 결국 들통나게 된다. 이와 달리 사회적 역할에 충실한 회사는 커지면 커질수록 사회적 분배량도 커진다.

사회: 꼭 가족기업이어야 하나? 전문경영인을 통해 승계가 이뤄져도 얼마든지 장수기업이 될 수 있지 않나?

김홍국: 가족기업이 성공률이 높다. 가족기업이 아닌 경우는 주인이 없는 기업을 만들자는 것이다. 그건 힘들다. 물론 주인이 없는 기업이 잘 될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비중이 작다. 협동조합을 감성적으로는 좋게 생각하지만 실제 열매를 맺기는 어렵다. 협동조합은 시장에서 경쟁력이 떨어지면 효과가 없는거다. 그래서 많은 협동조합이 사라졌다. 주인의식이 확고해야 기업이 발전하는 데 유리하다. 한 건실한 회사가 있었다. 자녀들이 ‘나는 아버지처럼 할 자신이 없다’며 모두 승계를 포기했다. 그 회사는 결국 매각됐는데 참 안타까웠다.

이윤철: 기업 역사가 짧은 한국 기업은 관점을 달리해서 봐야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는 초기 기업이 형성될 때 대부분 가족기업 형태였다. 그런 뒤 대기업이 되면서 전문경영인 등이 도입됐다. 상대적으로 초기 기업 형성기에 놓인 한국에 당장 적용하기는 어렵다. 토양을 만들기도 전에 앞선 제도를 적용하는 꼴이다.

김선화: 기업을 가족이나 지주회사가 관리하면 성과가 좋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런 면에서 기왕이면 가족이 경영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하지만 가족경영이 무조건 좋은 것은 아니다. 후계자가 기꺼이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기업을 파는 것이 자신과 사회를 위해 바른 선택이다.

김홍국: 책임감은 선각을 의미한다. 주인이 없으면 다수결로 경영하게 된다. 여러 의견을 모으는 거다. 이를 일반적으로는 좋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실제 기업 현장은 그렇지 않다. 기업은 선각자가 논리를 가지고 보이지 않은 걸 보는 혜안이 필요하다. 다수결만으론 좌우할 수 없는 가치다. 책임 지지 않는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에 기업의 미래를 맡길 수 없다. 기업가의 혜안을 인정해야 한다.

사회: 장수기업이 성장하면 다각화를 모색해야 할까, 한우물을 파야 할까?

이윤철: 학계에서는 나름의 결론을 내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이윤철: 학계에서는 나름의 결론을 내고 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인도도 정부가 시장에 기회를 줬다. 이럴 때는 다각화가 유리하다. 한국의 재벌 기업처럼 정부가 기회를 줄 때는 이를 따라가는 것이 생존율이 높다. 하지만 지금처럼 정부가 손을 뗀 프리마켓에서는 다각화보다는 전문화가 유리하다. 다각화라 하더라도 전문 다각화가 효과적이다. 그게 아니면 성공률이 떨어진다. 지금 중견기업이 장수기업이 되려면 전문화 돼야 한다.

김선화: 보통 장수기업들을 보면 주로 ‘한우물 경영’을 선호한다. 실제 명품 브랜드 10개 중 9개가 가족 경영을 한다. 한우물 경영을 이어가야 명품이 만들기 쉽다는 의미다.

김상근: 기업의 모습은 시대변화에 따라 달라지게 마련이다. 격동하는 변화에 잘 적응하는 것이 무엇인지 경영자가 판단하는데 따르면 된다. 그게 한우물이든 다각화든 환경에 잘 적응하면 된다.

이윤철:장수기업이 한 영역만 고수하면 혁신할 수 없다.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설사인 콩고구미는 결국 매각됐다. 사찰 보수만 하는 기업인데 일감이 떨어지니 망할 수밖에 없다. 영속하면서도 그 영역에서 또 다른 혁신이 늘 필요하다.

김선화: 장수기업의 공통된 특징은 온고지신이다. 옛 것을 지키고 새롭게 발전시켜야 한다. 창업정신이나 경영원칙 등 옛 것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대부분 명문기업도 창업가치를 지켜왔다며 자랑한다. 그러면서 계속 혁신해야 한다. 혁신만 하면 정신이 훼손돼서, 반대로 정신만 갖고 있으면 시대흐름에 밀려 망할 수 있다.

1265호 (2014.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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