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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한국인의 삶을 바꾼 히트상품② 명량 - 희생과 소통의 리더십에 목 말랐다 

불통에 자기 밥그릇 챙기기 바쁜 정치권에 신물 … 서점가까지 이순신 신드롬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의 수군은 12척의 배로 일본 전함 330척을 물리쳤다. 신화나 영화에 나오는 가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말 그대로 실제 일어난 일, ‘역사’다. 그런데 이게 가능하기나 한 일인가? 영화 <명량>은 이 질문을 출발점으로 삼았다. 비디오 카메라가 없던 시절, 명량해전에 관한 이야기는 구전과 누군가의 서술에 의해서만 묘사된다. 교과서나 역사서에 나오니 ‘실제 그런 일이 있었구나’ ‘이순신 장군이 대단한 일을 해냈다’ 정도로만 과거의 일을 기억한다. 궁금하긴 한데 달리 알 방법도 없다. 영화는 대중의 이런 갈증을 꽤나 속시원하게 풀어준다. 영화가 개봉한 후 일부는 사실과 다르다는 역사학자들의 코멘트가 있었다. 적어도 지금까지 명량해전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 중에서는 가장 사실적이고 그럴 듯하게 당시의 모습을 재현했다.

메가폰을 잡은 김한민 감독은 역사학자를 포함한 수많은 전문가와 함께 417년 전 벌어진 명량해전을 연구했다. 당시의 날씨와 조류, 명량 지역의 지형과 지물을 공부했고, 조선군과 일본군의 무기 체제와 당시 해상 전투 방식도 밀도 있게 조사했다. <최종병기 활>에서 빛을 발한 김 감독 특유의 연출 능력에 고증이 더해져 실감나는 장면이 탄생할 수 있었다.

영화는 개봉과 동시에 놀라운 성공가도를 달렸다. 그야말로 파죽지세였다. 개봉일에만 68만2700명의 관객이 입장해 개봉일 최다 관객(종전 <군도:민란의 시대> 55만명)과 평일 최다 관객(종전 <광해, 왕이 된 남자> 67만명) 기록을 단숨에 깨뜨렸다. 이후 한동안은 매일이 기록 행진이었다. 자신의 기록을 스스로 깨뜨리는 식으로 새로운 기록을 써나갔다. <트랜스포머3>가 가지고 있던 일일 최다 관객 기록도 갈아치웠다. 개봉 12일째를 맞는 8월 10일 1000만 관객 돌파에 성공했다. <괴물>과 <도둑들>이 개봉 22일 만에 해낸 일을 명량은 단 12일 만에 해냈다.

최단 기간 1000만 관객 돌파


<명량>의 최종 누적 관객수는 1761만1073명이다. 역대 가장 많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전체 국민의 약 3분의 1이 <명량>을 봤다는 뜻이다. 2010년 아바타가 세운 1330만 관객 기록을 훌쩍 뛰어넘었다. 국내 영화 입장권 수익으로만 1357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현재 미국·중국 등 국외에 개봉해 그 기세를 이어가고 있다. 올 한해 영화계를 ‘명량을 위한, 명량에 의한, 명량의 해’로 요약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작품이 성공을 거두자 많은 미디어·연구원·증권사 등은 흥행요인을 분석하기에 바빴다. 국내 영화 중 보기 드물게 완성도 높은 전쟁신을 담았다. 국민들에게 오랫동안 인기를 누리고 있는 이순신이라는 역사 속 인물을 끄집어 낸 것도 흥행에 큰 몫을 했다. 어린이부터 중·장년층까지 폭넓은 연령층이 흥미를 가질 만한 콘텐트라는 장점도 있었다. 여기에 영화를 개봉한 시기가 성수기에 해당하는 여름방학 중이었다는 점, 당시 뚜렷한 경쟁 영화가 없었다는 점이 <명량>의 상승세에 힘을 보탰다. 더러는 ‘일본과 대결구도로 꾸리고, 애국심을 자극하는 민족주의 코드를 담아 비정상적인 흥행가도를 달렸다’고 분석하는 이도 있다.

여러 분석이 엇갈리는 가운데 공통적으로 지목하는 단어가 있다. ‘리더십’이다. 영화 <명량>은 답답하고 어두운 지금의 사회상을 역사에 잘 투영했고, 그 위기를 극복하는 리더십을 보여줘 대중에게 카타르시스를 줬다는 것이다. 실제 영화를 보다 보면 올 한 해 한국에서 벌어진 많은 사건이 오버랩된다. 여객선이 침몰해 304명(실종 9명)의 희생자를 낸 세월호 참사, 윤일병 사건으로 불리는 군 가혹행위 등 올 한 해는 유독 사건사고가 많았다. 사고가 일어난 자체는 물론이고 그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정부에 실망하는 국민들이 많았다. 누군가에게 책임을 떠 넘기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싸웠던 정치권도 국민들에게 질타를 받았다.

영화 속 이순신은 달랐다. 세월호가 가라앉은 것만큼이나 우울하고 어려운 상황이 극중에 펼쳐진다. 이순신 장군은 전면에 나서 위기를 돌파한다. 그 과정에서 국민(백성)들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병사들에게 나가서 싸우라고 명령하지 않고, 자신이 먼저 나서 싸우는 모습을 보여 병사들이 자발적으로 싸우도록 만들었다. 지금 한국에 가장 필요한 리더십을 보여준 것이다. 김한민 감독 역시 ‘이순신 리더십이 대중의 욕구를 충족시켰다’는 점을 <명량>의 최대 성공 요인으로 꼽는다.

성공 이유야 어떻든 <명량>은 올 한 해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꿔놓았다. 영화 속 명대사가 광고나 코미디, 드라마 등 다양한 장르에서 확대 재생산되며 국민의 삶 속에 파고 들었다. “아직 신에게는 12척에 배가 남아 있사옵니다”는 이순신의 대사는 모두가 어렵고 힘들다고만 하는 일을 어떻게든 되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담겨 많은 국민에게 사랑을 받았다. 이미 잘 알려진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는 대사도 국민들의 마음에 큰 울림이 됐다.

이순신 레고 시리즈도 제작


영화에 감동을 받은 사람들은 이순신을 자신의 삶에 좀 더 가까이 하기 위해 더 많은 콘텐트를 요구했다. 올 한 해 서점가에 ‘이순신 열풍’이 분 이유다. 출판사들은 <명량> <그러나 이순신이 있었다> 등 대중의 수요를 노린 책을 발 빠르게 출간했다. 2001년에 나온 김훈의 소설 <칼의 노래>가 다시금 베스트셀러 순위에 이름을 올렸다. <난중일기>와 같은 역사서를 다시 찾는 사람도 늘었다.

어린이들 사이에서도 이순신 신드롬이 이어졌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난중일기> <만화, 칼의 노래> 등 어린이들을 겨냥한 책 출간이 늘었다. 이순신에 대한 어린이들의 순수한 마음이 외국 기업에까지 전해진 사례도 있었다. <명량>을 감명 깊게 본 한 초등학생이 교육용 완구로 유명한 레고(LEGO) 본사에 영어 손편지를 보낸 것. ‘이순신 장군을 주제로 한 레고 시리즈를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많은 레고 매니어들이 비슷한 요청을 레고 본사에 전했다. 레고 측은 “거북선 시리즈 제작을 기획 중”이라며 대중의 요구에 화답했다.

1266호 (2014.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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