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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창업 생태계, 무엇이 문제인가] “PT 잘해야 창업지원금 받는 이상한 나라” 

스타트업 선별·지원 시스템 허술 … 글로벌 진출, 액셀러레이터 활성화 방안 시급 


▎일러스트:중앙포토
벤처·창업 시장에서는 10억 달러 이상의 가치를 가진 소프트웨어 스타트업을 ‘유니콘 기업’이라고 부른다. 미국 벤처 캐피털 회사 카우보이벤처스의 설립자 에일린 리가 지난 2013년 처음 사용한 용어로, 비상장임에도 많은 투자가 몰리는 희귀 기업을 상상 속 동물인 유니콘에 빗댄 표현이다. 2003년부터 2014년까지 11년간 생겨난 유니콘 기업은 전 세계적으로 113개. 국적별로는 미국이 69개, 중국 15개, 인도 7개 등이며, 한국은 소셜커머스 업체인 쿠팡(17위, 50억 달러)과 종합 모바일서비스 기업 옐로모바일(106위, 10억 달러) 단 두 곳에 불과하다. 짧게는 창조경제 정책이 시행된 지 3년, 길게는 IT열풍이 몰아치기 시작한 지난 16년간 일군 성과치고는 초라하다.

현재 한국 정부는 어느 때보다 청년 창업을 강하게 추진하고 있다. 기획재정부와 미래창조과학부·중소기업청 등 정부 부처를 중심으로 각 지방자치단체들과 각종 유관기관들이 창업 전쟁을 선포, 막대한 예산과 지원책을 쏟아붓고 있다. 2013~2015년 3년간 투입된 예산만 21조5615억원. 유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의 돈을 쏟아부었음에도, 창조경제의 온기를 느끼는 국민은 많지 않다. 매년 하반기만 되면 여러 연구기관들이 ‘내년에는 성과가 가시화할 것’이라는 내용의 보고서를 쏟아내지만, 체감되지 않는 전망으로 전락해버리고 만다.

5분 PT로 사업성 평가 ‘끝’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지는 세계 장기 불황 속에 미국·영국·핀란드·중국 등 많은 나라들은 지식·청년·창업 경제를 전면에 내세우며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한국 창업 시장은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고도 이렇다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창업 시스템이나 제도·정책에 결함이 있다는 얘기다. 예산 타령을 하기 전에, 고장난 지점을 찾아 해결책을 모색하는 한편, 참고할 만한 해외의 제도는 없는지 점검하는 일이 먼저다.

전문가들은 국내 창업지원제도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정부의 정책방향과 실제로 예산을 집행하는 기관 간에 인식 차이라고 말한다. 정부는 미국·이스라엘처럼 부가가치 창출효과가 큰 IT·지식서비스 등 기술 분야의 창업이 이뤄지길 희망하고 있다. 39세 미만 청년이거나 창업 아이템이 IT서비스일 경우 창업 가산점을 부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창업지원금을 집행하는 유관기관들은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 분야보다는 제조업을 선호하는 경향이 짙다는 것이 현장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유는 단순하다. 서비스 분야는 실체를 눈으로 확인할 수 없으나, 제조업은 실물을 제조·판매하기 때문에 자금 지원에 부담이 적다는 것이다.

서비스 분야 창업자들에 대한 높은 문턱은 일반적으로 프레젠테이션(PT) 형태로 실시되는 사업심사에서 잘 나타난다. IT·기술 분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제공하는 탓에 제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사업심사를 통과하기 어렵다. 복잡한 기술 구조와 수익모델을 10~12페이지 분량의 문서에 담아 5분 동안 설명해 심사위원들의 동의를 끌어내는 일은 무척 어려운 일이다. 뉴스 종합솔루션 앱 개발을 위해 올 초 지자체 창업지원심사에 지원했다 낙방한 김성미 씨는 “앱의 시스템 설명과 수익 모델 설명을 시작하는 순간 심사위원들의 관심이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며 “아이템의 사업성과 창의성보다는 시각적 효과에 기댄 PT에 대한 호응이 높았다”고 말한다. 실제로 떡 온라인 판매를 아이템으로 선정한 한 창업준비생은 한복 차림으로 코믹한 PT를 펼쳐 결국 8000만원의 창업지원금을 챙겨 취업준비생들 사이에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콘텐트 산업을 다루는 기관들도 상황은 크게 다르지 않다. 확실하게 돈을 벌 아이템이나 캐릭터를 확보하지 않으면 자금 지원에 인색하다. 지난해 한 벤처 게임 개발사가 퍼즐게임을 개발, 콘텐츠진흥원에 자금지원을 신청했다가 ‘뽀로로 같은 캐릭터를 확보하지 않으면 지원을 줄 수 없다’며 면박을 받은 사례도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는 기관들의 교육도 PT에 초점이 맞춰 있다. 기업 재무와 홍보, 수익모델 창출에 대한 연구보다는 당장 심사에서 통과하기 위한 포장 기법부터 가르치는 것이다. 중소기업진흥공단의 경우 올 초 지원사업 1차 서류심사 통과자들을 대상으로 청년창업사관학교에서 이틀간 교육을 벌였는데, PT자료 작성과 발표 교육을 한 것이 전부였다. 중진공은 당시 1차 서류전형 역시 심사가 아닌 선착순으로 선발하면서 적잖은 뒷말도 남겼다. 이 때문에 민간 창업 컨설팅 회사들도 창업자들에게 사업 설명의 질을 높이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강렬하게 보여줄 수 있는 아이디어를 마련할 것을 주문한다. 이런 분위기는 결국 청년들의 창업 의지를 꺾는 한편, 실험적이고 도전적인 아이템보다는 쉽고 빠른 창업을 유도하는 등 창업의 질적 저하를 야기한다는 지적이다. 사물인터넷 관련 창업을 준비 중인 김승진 씨는 “창업지원을 받을 때면 소상공인, 영세창업으로 인식하는 분위기가 있어 제대로 된 상담을 받을 수 없다”고 토로한다. 이와 관련해 정유신 서강대 경영학부 교수는 “현재 벤처 분야에 자금이 넘치지만, 마땅한 수익 모델이 없어 고민”이라며 “궁극적으로 좋은 기업들이 생기고, 똑똑한 사람들이 창업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야 한다”고 당부했다.

창업시장의 미꾸라지 ‘헌터’ 기승


물론 IT·기술 서비스 분야에 대한 자금 지원이 인색한 것은 단지 사업성을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만은 아니다. 창업할 의사가 없음에도 지원금 사냥에 나서는 ‘먹튀’ 창업 준비생들도 창업 생태계를 흐리고 있다. 창업시장에서는 이런 창업준비생들을 일컬어 ‘헌터’라고 부른다. 소위 헌터들은 요즘 들어 창업 예산이 많이 풀린 점을 노리고 팀, 혹은 점 조직 단위로 활동하며 유관기관들의 창업지원금을 노린다. 이들은 향후 실사에 대비해 일부 설비가 마련된 사무실을 임대해 눈속임한다. 일부 조직의 경우 10억~20억원 규모의 중소기업 지원 자금을 얻기 위해 1~2년간의 준비기간을 갖기도 한다. 유관기관들로서는 이런 헌터들을 솎아내기 위해서 창업준비생들의 비전보다는 실현가능성과 자금 회수 가능성을 먼저 따진다고 한다. 한 창업 컨설턴트는 “시장이 혼탁해져 진정성 있는 창업준비생들이 제대로 꿈을 펼칠 기회가 꺾였다”며 “이 때문에 지원받은 돈을 남기지 않고 다 써야 손해가 아니라는 현실적인 조언을 할 때가 많다”고 말했다. 부가가치 창출 효과가 큰 기술창업을 육성해 기회형 창업 비중(21%)을 끌어올린다는 정부의 목표가 실현되지 않는 이유다.

관건은 헌터와 같은 허수를 걸러내, 어떻게 창업지원금을 적재적소에 넣어 주느냐다. 이 문제의 해결 방안은 핀란드의 기술 지원혁신청 테께스(Tekes)에서 찾을 수 있다. 테케스는 매년 수천억원의 예산을 집행하는데, 자금 지원 절차와 지원 프로그램 등을 모두 투명하게 공개한다. 그리고 최종 선정된 회사의 상호와 지원 대상에 꼽힌 이유를 설명하는 것은 물론, 각 분야별 심사위원들의 평가 점수, 항목별 평가 등의 내용도 외부 열람을 허용한다. 더불어 ‘마일스톤’ 제도 등을 도입해 스타트업의 자생력과 투명성 제고를 꾀하고 있다. 마일스톤은 테케스가 창업자금의 75%만 지원하며, 나머지 25%는 민간 투자자가 참여하도록 하는 제도다. 민간 투자자를 자금지원 심사에 참여시켜 더욱 엄정한 잣대와 다양한 시각으로 평가하겠다는 것이다. 스타트업들은 민간 투자자들로부터 합격점을 받아야 테께스의 추가 지원금을 받을 수 있다. 마르요 일마리 스타트업 디렉터는 “정해진 기업의 숫자를 채우거나, 억지로 예산을 모두 소화하기 위한 지원은 없다”며 “모자라면 더 찾고, 남으면 이월해 다른 기업을 돕는다”고 말한다. 이밖에 창조형 창업이 힘을 받을 수 있도록 ‘기술배심원제’나 ‘자율선언제’ 도입, 과학정책과 기술사업화를 조정할 수 있는 컨트롤 타워 도입 등도 제도적 보완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한국의 내수 시장이 작고 글로벌화가 부진하다는 점도 IT·기술 서비스 창업이 어려운 이유 중 하나다. 이들 분야는 인터넷·모바일 공간에서 제공되는 대중서비스이기 때문에 국경과 인종을 가리지 않는다. 다만 개발한 나라의 국력과 문화적 전파력이 담보되지 않는 이상 확장력을 갖기 어렵다. 싸이월드와 페이스북, 카카오택시와 우버를 대표적인 사례로 꼽을 수 있다. 배후 수요가 5000만 명에 불과한 한국 시장만을 노리고 창업을 시작하기에는 유인이 떨어진다. 국내에서 압도적인 시장 지배력을 가진 카카오톡보다 전 세계적으로 넓은 사용자층을 확보한 네이버의 라인이 더욱 높은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글로벌화가 담보되지 않은 스타트업은 반쪽 짜리로 전락할 가능성이 크다. 모바일 커뮤니티 기업에 다니는 프로그래머 장대석 씨는 “국내 기술 시장은 규모가 작아 창업 후 매각 등 엑시트할 수 있는 경로가 많지 않다”며 “이 때문에 미국이나 독일에서 스타트업을 염두에 둔 개발자들도 적지 않다”고 말했다.

기술 회수시장 육성 필요

이는 이스라엘에서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이스라엘은 인구가 770만 명 밖에 되지 않는 작은 나라지만, 세계 최대의 스타트업 생산 기지 중 하나다. 창업에 있어 이스라엘 정부의 가장 큰 역할은 거미줄처럼 얽힌 글로벌 네트워크를 이용해 자국의 경쟁력 있는 스타트업을 미국 등 해외로 진출시킨다는 점이다. 현재 미국 나스닥에 상장한 이스라엘 기업은 총 87개이며, 지난해 스타트업 인수·합병(M&A) 규모만도 150억 달러(약 16조 원)에 달한다. 사용자 참여형 네비게이션 앱을 개발한 이스라엘의 웨이즈는 구글에 1조2000억원에 팔린 데 비해 ‘김기사’의 매각가는 20분의 1 수준인 630억원. 글로벌 네트워크의 중요성을 잘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스라엘은 티바이스(tvibes) 같은 수많은 스타트업들이 새로운 창업과 매각 작업을 반복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물론 이스라엘의 글로벌 네트워크가 단기간에 구축된 것은 아니다. 정부 수립 초기부터 정치·외교적으로 가까운 미국·영국 등과 긴밀한 경제협력·지원을 가졌으며, 장기간 쌓인 신뢰관계가 비즈니스로도 이어졌다. 이 과정에서 정부 주도의 여러 사업에 우방국을 끌어들였다는 점은 참고할 만 하다. 예컨대 요즈마펀드 출범 초기 이스라엘 정부는 미국과 영국의 투자자들에게 적극적인 구애의 손길을 뻗는가 하면, 오는 12월 판교에 문을 열 요즈마캠퍼스에도 미국과 영국의 벤처캐피탈을 동참시켰다. 향후 글로벌 네트워크를 마련하기 위한 일종의 노림수다. 이 같은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스타트업의 해외 판로를 개척할 수 있다. 한국은 이스라엘과는 여건에 차이가 있지만, 일본·인도네시아·태국 등을 세계로 나가기 위한 징검다리 시장으로 활용할 수 있다. 또 대기업들이 회수시장으로서의 역할을 발휘할 수도 있다. 이민화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은 “아무리 창조적인 결과가 나와도 이를 받아줄 시장이 없으면 무용지물”이라며 “이스라엘의 기술을 미국이 소화해주는 것처럼 한국은 대기업이 글로벌화의 가교, 혹은 시장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액셀러레이터 부재…창업 중간에 끊기는 사다리

아울러 이스라엘 정부가 스타트업의 완성도 높은 상품 개발을 지원하기 위해 도로·항만·기상 등 모든 정보를 공개하고 있다는 점도 본받을 만 하다. 과거 국내 네비게이션 회사들이 지도를 만들기 위해 모든 도로를 일일이 측량한 데 비해 이스라엘은 행정당국이 ‘교통 서비스의 질을 올리겠다’며 스타트업들에게 모든 정보를 열어줬다. 특히 최근 들어서는 빅데이터의 경제적 가치와 활용도가 갈수록 커짐에 따라 이들 기업에 대한 집중적인 육성책도 필요하다는 분석이다.

국내 창업시장의 또 다른 문제점으로 창업 가속화 단계에 필요한 액셀러레이터 시스템 부재를 꼽을 수 있다. 뚜렷한 실적이나 실물이 없는 초기 단계의 스타트업은 정부가 직접 지원하기 어려운 영역. 수도 많고 종류도 다양한 스타트업 아이디어를 정부가 전부 평가하기에는 인력도, 전문성도 부족한 것이 현실이다. 영국 등 창업 선진국의 경우 이런 역할을 창업보육 프로그램이 시장 안에서 해결할 수 있도록 생태계를 갖췄다. 민간의 여러 창업보육 프로그램이 정부의 지원이 원활히 이뤄질 수 있도록 심사위원 역할을 한다. 국내에도 몇몇 성공한 벤처 1세대나 대기업이 운영하는 프로그램이 있지만, 어떤 액셀러레이터가 내게 적합한 지 정보가 부족한 실정이다. 대학의 인큐베이터 프로그램도 적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정부·민간 부문의 인큐베이터는 많지만, 정작 청년창업의 핵심인 대학들은 창업지원에 인색하다. 정부·기업과의 연계 없이 개별적으로 운영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이마저 학부생 대상의 홍보성 이벤트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 교내 석·박사의 수준 높은 기술을 활용하는 해외 대학의 인큐베이터와는 거리가 멀다. 이에 따라 전문가들은 잠재 액셀러레이터인 성공한 벤처 1세대, 대기업, 대학을 유인할 수 있는 체계가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 김유경·박성민·함승민 기자 kim.yukyoung@joins.com

이 기사는 한국언론진흥재단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309호 (20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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