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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와의 대화 |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 애널리스트 신순규] 남다른 눈으로 세상을 본다면 

월가 최초 시각장애인 CFA ... “정보 홍수 속 진짜 볼 건 따로 있어” 


▎사진:전민규 기자
미국 뉴저지주에 사는 신순규(48)씨는 매일 오전 6시 30분 통근 기차를 타고 시코커스역으로 간다. 역에 내리면 다시 몇 층을 계단으로 오르내려 다른 기차로 갈아탄다. 그렇게 또 한번 기차에 몸을 실으면 얼마 지나지 않아 뉴욕의 중심부 펜역에 다다른다. 뉴욕 근교와 미국 전역을 잇는 기차가 정신없이 오가는 큰 역을 빠져나와 직장이 있는 월가(街)에 도착하면 시계는 어느새 8시를 가리킨다. 브리핑 준비를 하고 회의를 주재하는 것으로 신씨의 평범한 하루가 시작된다.

그는 미국 최대 프라이빗 뱅크(개인 주주가 책임지는 은행)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에서 공인재무분석사(CFA)로 일한다. 미국 각 주(州)의 지방채에서부터 제과·화학·유통 등 수많은 글로벌 기업의 주식을 사고 팔며 600억 달러의 자산을 관리하는 것이 주된 업무다. 세계적인 투자은행 JP모건에서 애널리스트 일을 시작하던 때가 1994년이니 월가 생활도 벌써 21년째 접어들었다. 얼핏 그는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한국인의 전형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인생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순규야, 올해는 앵두가 참 예쁘게 열렸지?” 아홉 살이 되던 해 어느 봄날, 마당에 나간 어머니가 말했다. 툇마루에 앉은 그는 눈을 비볐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소리를 따라 앵두나무 앞에 쪼그리고 앉았다. 그제서야 분홍빛 점들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어린 그에게는 작은 비밀이 하나 있었다. 언제부턴가 눈앞에 검은 꽃잎이 찰싹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병명은 녹내장과 망막박리. 부모는 어린 아들의 병을 고치기 위해 스무 번이 넘는 수술을 감행했다. 수술이 끝나고 눈을 가린 붕대를 풀면 언제나 어머니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런데 생애 마지막 수술을 받은 그 날, 언제나처럼 어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보이진 않았다. 붕대를 풀었는데도 작은 빛조차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1급 시각장애인이 됐다. 자전 에세이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은 그 후 삶에 관한 이야기다. 저서 출간에 맞춰 서울에 온 그를 10월 28일 만났다.


“제 인생에서 시험을 치르지 않고 1급을 딴 건 아마 장애가 유일할 거예요.” 그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하자 부드러운 곡선이던 눈매가 반달 모양이 됐다. 서울맹학교에 입학한 신씨는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을) 안마사로 살 게 할 순 없다”던 어머니의 의지 때문이었다. 그 덕분에 시각장애학생 중창단의 피아노 반주자로 미국 순회공연에 따라나설 수 있었다. 당시 그의 연주를 눈여겨본 한 선교사의 도움으로 열다섯 살에 홀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더 큰 세상을 ‘보기’위해서였다. 그러나 스스로 피아노에 재능이 없다고 여긴 그는 하버드대와 매사추세츠공대(MIT)에 진학해 의사와 교수의 길을 걷고자 했다. 그런데 슬며시 오기가 났다. 장애가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찾는 게 먼저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연히 시각장애인 가운데 금융권, 그것도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된 그는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다.

“미국에서 직장을 구하는 일도 한국과 똑같이 힘들었어요. 전화 인터뷰를 할 때는 분명히 긍정적이었는데 시각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나면 태도가 돌변했죠. 당시 저를 채용한 JP모건 인사담당자는 첫 면접 때 이렇게 말했어요. 장애는 최종합격자 후보에 오르고 나서 고민해도 늦지 않다고요. 일단 내가 회사에 적합한 인재라는 판단이 들면 그때 가서 어떤 방식으로 업무를 지원하면 될지 생각해보자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신씨는 JP모건에 첫 직장을 얻었다. 애널리스트로 일하면서도 시각장애인 최초로 ‘금융 분야의 최종 자격증’이라고 불리는 CFA 자격증을 땄다. 그의 사무실 책상 위엔 모니터 없이 점자 키보드만 놓였다. 화면으로 그래프나 수치를 보는 대신 손으로 읽는다. 막대한 양의 정보를 파악하기에 한계가 있진 않을까.

“한 기업의 가치를 평가하는 데 그렇게 많은 정보는 필요 없어요. 사람들은 쏟아지는 뉴스와 루머, SNS(소셜네트워킹서비스) 같은 것에 눈이 멀어 판단력이 흐려지곤 하죠. 반면 저는 홍수처럼 쏟아지는 정보를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꼭 필요한 정보만 파악해 장기적으로 투자하는 편이에요. 금리가 올랐다고, 환율이 내렸다고, 대통령이 바뀌었다고 팔아야 할 기업의 주식이라면 아예 사지 않는 게 낫죠.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일이 천직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저서 제목처럼 그는 ‘눈 감으면 보이는 것들’이 따로 있다고 했다. 그는 “일상에서 우리는 넘치는 정보에 파묻혀 진짜 소중한 것을 놓치고 쓸데없는 데 시간을 낭비하거나 감정을 상하곤 한다”며 “정작 봐야 할 것은 아이들의 맑은 눈빛이나 엄마의 애틋한 표정, 외로움으로 어두워진 배우자의 얼굴빛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 책을) 장애인의 역경 극복기가 아닌 세상을 보는 눈이 좀 남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봐달라”고 덧붙였다. 그는 현재 시각장애 학생들에게 녹음 교과서를 제작·제공하는 ‘러닝 앨라이’ 이사, 한국의 보육원 아이들을 돕는 야나(YANA) 선교회 이사장으로도 활동 중이다. 잠자리에 들기 전 아이들에게 책 읽어주는 일을 거르지 않는 자상한 아버지기도 하다. 아내와 열 살 난 아들, 지난해 입양한 열네 살 딸과 뉴욕 근교에서 살고 있다.

- 허정연 기자 hur.jungyeon@joins.com

1309호 (2015.1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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