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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석의 ‘의예동률(醫藝同律)’] 옛날 먼 길 떠날 땐 침통이 필수품 

사관혈 자극하면 졸도·급체에 효과...침통에 우리의 멋과 낭만 담겨 


만약 여러분이나 가족이 오지 여행 중이나 비행기 안에서 갑자기 탈이 났다고 칩시다. 의료기나 약도 없고 주위에 의사도 없습니다. 응급처치라도 받으려면 앞으로도 여러 시간을 더 가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은 경혈(침자리)을 자극해 주는 겁니다.

옛날 사람들은 먼 길을 떠날 때 필수품으로 침통을 들고 다녔습니다. 지병이 있을 때는 물론이고 급성병이 나타날 때 유용한 도구가 바로 침입니다. 체했을 때 손가락을 따는 것도 침치료의 가장 기본적인 이론을 원용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침은 막힌 기와 혈의 흐름 뚫어줘

한의학에서 급성병으로 보는 대표적인 증세는 경풍(경기), 졸도, 중풍, 급체입니다. 이들 증세는 우리 몸안 경락의 기혈순환이 잘 되지 않거나 막혔을 때 생깁니다. 이를 풀어주면 위급상황에서 벗어나면서 정신이 들게 되는 것이지요. 이때의 키워드가 바로 사관혈(四關穴)입니다. 여기를 비비거나 눌러주는 것 만으로도 증세는 호전됩니다. 특히 제대로 침을 놓으면 효과는 훨씬 더 좋아 집니다.

여행을 많이 다니거나 병원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살고 있다면 사관혈 정도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관혈은 합곡과 태충이란 두 혈자리를 말합니다. 좌우 합쳐서 네 군데 밖에 안 됩니다. 찾기도 아주 쉽습니다. 합곡혈은 손가락을 벌렸을 때 엄지와 검지손가락 사이에서 골짜기처럼 움푹 들어간 부분입니다. 태충혈은 엄지발가락과 두 번째 발가락 사이 갈라지는 부분에서 발등쪽으로 2~3cm 떨어진 움푹 패인 곳에 있습니다. 손가락으로 살짝 눌러보면 혈관이 뛰는 것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합곡혈은 기를 풀어주고 태충혈을 혈을 풀어주는 경혈이기 때문에 앞서 말한 졸도나 급체에 효과가 뛰어납니다. 이들 혈자리를 자극해준 다음, 발을 따뜻하게 해주면 몸이 더욱 편안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이렇듯 침은 기와 혈의 흐름이 막힌 것을 뚫어주고 오장육부의 허실을 정상화 시켜줍니다. 이러한 치료의 주체는 인체 12경락과 365개의 경혈입니다. 이 중 적합한 경혈을 자극해서 병을 일으키는 나쁜 기운(邪氣)를 제거하고 인체의 방어기전(正氣)을 작동시켜 자연치유를 이끌어내는 것이 침치료의 목표입니다. 그러면 병이 나을 수 있다고 보는 것이지요.

사관혈 이외에도 침은 통증완화에 가장 큰 효과를 발휘합니다. 아프다는 것, 우리 몸에 어떤 증상이 있다는 것은 오장육부 어딘가에 있는 이상을 해결해달라는 몸의 호소이고 통증은 이를 나타내는 신호입니다. 병을 치료한다는 것은 이러한 몸의 호소와 신호를 파악하고 원하는 바를 알아내서 그것을 해결해주는 일입니다.

한의학에서는 침이 일차적인 해결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래서 일침이구삼약(一針二灸三藥)이란 말이 생겨났습니다. 병이 나면 우선 침으로 치료하고, 그래도 안 되면 뜸으로, 그 다음에 약을 쓰는 것이지요. 약을 구하기 어려웠던 100여 년 전에는 침치료가 민중의료의 대부분을 차지했고, 가장 효과 빠른 구급법이기도 했습니다.

한의학에서는 환자가 아무리 위중해도 관형찰색(觀形察色, 체형과 안색을 살핌)과 맥진(맥으로 몸의 상태를 진단함)을 통해 숨어있는 병증을 알아내고 환자와의 대화로 드러난 병증을 파악한 다음 치료에 필요한 경혈에 침을 놓습니다. 이렇듯 신중함과 소통이 침치료의 근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한의학에는 자랑할 거리가 많습니다. 누구나 알고 있는 허준의 [동의보감], 이제마의 [사상체질의학] 말고도 [사암침법(舍岩鍼法)] [태극침법(太極鍼法)] 등 독창적이고 우수한 침법이 많습니다. 이러한 침법은 유명한 한의학자가 아닌,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선비가 만들곤 했습니다. 사암침법은 그냥 사암도인(舍岩道人)이 만들었다고 하고 태극침법은 누가 만들었는지도 알려지지 않았습니다.

한방을 전공하지 않았더라도 대부분의 한학자들은 응급증세에 대한 대처법과 침치료법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습니다. 선비들은 물론이고 글 좀 읽은 사람들은 웬만한 침자리는 꿰고 있었습니다. 집에 침통 한두 개는 가지고 있었고요. 양반들은 부채에 끈을 매고 여기에 침통을 달고 다녔습니다. 침을 여러 개 넣어두고 필요할 때 쓰려고 한 것입니다. 부채를 쓰지 않을 때는 침통을 두루마기나 도포자락에 매달고 다녔습니다. 여인네들은 침통 모양으로 노리개를 만들어서 지니고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장식으로 매고 있다가 위급시에 꺼내 침을 놓았던 겁니다. 현재 전래되고 있는 침통을 보면 여인네들 것은 작고 예쁩니다.

침통은 전래품과 출토품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전래품은 가정에서 쓰던 것이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고, 출토품은 부장품, 오래된 사찰, 침몰된 배 등에서 나온 것입니다. 출토품은 백동, 상아나 호박 등으로 만든 것이 좀 남아있고 전래품으로는 거북등껍질로 만든 대모침통, 대나무나 대추나무로 만든 침통이 가장 흔합니다.

중국·일본 침통보다 단아하고 기품 있어

침통 중에는 침의 크기와 모양에 따라 섞이지 않도록 홈을 파놓고 녹슬지 않도록 공기구멍을 뚫어놓은 것도 있습니다. 침통은 보통은 원통형인데 간혹 사각 또는 6각형도 보입니다. 시대와 지방에 따라 재질과 문양, 모양이 제각기 달라진 겁니다.

우리나라의 침통은 생긴 모양이 중국이나 일본 것보다도 단아하고 기품이 있습니다. 가만히 뜯어보면 바깥에 새긴 조각과 문양 또한 무척이나 섬세하고 아름답습니다. 우리 문화의 멋과 낭만이 작은 침통에 오롯이 담겨 있습니다.

윤영석 - 경희대 한의과대학을 졸업했다. 한의학 박사. 경희대 한의과대학 외래교수로 후학을 양성하면서 7대째 가업을 계승해 춘원당한방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의학 관련 유물 1000여점을 모아 춘원당한방박물관도 세웠다. 저서로는 [갑상선 질환, 이렇게 고친다] [축농증·비염이 골치라고요?] 등이 있다.

1325호 (2016.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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