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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파문, 징벌적 손해보상제 도입되나] 옥시의 모국 영국에선 250년 전에 시행 

러시아·중국 등에서도 속속 채택... 집단소송제는 증권 분야에 제한적 도입 

조용탁 기자 ytcho@joongang.co.kr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들이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제 도입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5월 12일 검찰은 업무상 과실치사 등의 혐의로 옥시레킷벤키저(옥시)의 신현우 전 대표 등 4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청구했다. 업무상 과실치사와 가습기 살균제 제품이 인체에 무해하다는 허위광고를 한 혐의다. 2011년 정부가 가습기 살균제 유해성을 공식 발표한 후 5년 만에 제조사 대표와 관계자에 대한 사법적 책임을 묻기 시작한 것이다. 검찰 수사에 속도가 붙자 가습기 판매 기업과 관계자들은 초초한 심정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결과에 따라 관련자들은 형사와 민사상의 책임을 질 수 있다. 피해자들은 수사가 마무리되는 대로 손해배상 청구소송에 임할 계획이다. 이번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피해자는 15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 정부가 집계한 공식 사망자 수는 239명이다.

피해자들의 원성은 영국 기업 옥시에게로 향하는 중이다. 애경과 SK에 비해 더 많은 피해자를 냈다. 여기에 가습기 살균제가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파악했음에도 회사의 이익을 위해 이를 무시하고 제품을 판매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옥시 측은 기자회견을 열고 100억원 규모의 재단을 설립해 피해자 보상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민사재판 과정에서 피해자들과 합의도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이 눈 앞에 이익에 급급해 비윤리적인 행동을 했다는 책임론에서 벗어나긴 어렵다.

검찰 수사에 속도 붙어


이 사건을 계기로 한국에서도 집단소송과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법적인 처벌을 강화해 ‘제2의 옥시’ 사건을 미연에 방지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국에서 물의를 일으킨 옥시의 모국 영국은 1763년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가장 먼저 도입한 나라다. 당시 영국의 한 출판사가 정부의 무능을 비판하는 책을 인쇄했다. 이를 막기 위해 공무원들이 인쇄소를 압수수색했다. 출판사 사장은 이들이 영장을 보여주지 않고 수색을 진행하자 항의했다. 그리고 공무원들을 고소했다. 이들은 실제로 법원에 영장을 신청하지 않고 불법 수색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 법원은 재발 방지를 위하여 징벌적 손해배상이란 판결을 내렸다. 법원에서 정한 손해배상금 20파운드에 징벌적 배상금 1000파운드를 추가한 것이다.

징벌적 손해배상제가 영국에서 나온 배경엔 성문법보다 관습을 중시하는 영미식 사법 구조가 있다. 12세기 영국에서 노르망 왕조를 세운 월리엄 1세는 영국 각 지역의 관습법을 인정했다. 성문화된 법령을 강요하지 않고, 국왕 직속재판소를 설치해 공정한 심판을 받는 기회를 제공했다. 재판관은 일반 영국 국민의 관행을 판결에 참고했다. 배심원 제도의 시작이다. 영국식 사법 제도는 미국과 캐나다·호주·뉴질랜드에서 사용 중이다.

그 결과 징벌적 손해배상제처럼 법원이 특정 사안에 대해 판결을 내리고 벌금을 부과할 때, 배심원이 추가 벌금을 부과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영국식 법령을 도입한 미국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제의 다양한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중 하나가 맥도널드 커피 사건이다. 한 할머니가 맥도널드에서 49센트에 커피를 주문했다. 커피를 받아 자리로 이동하다 실수로 자신의 몸에 커피를 쏟았다. 심한 화상을 입은 노인은 맥도널드를 고소했다. 지난 10년 간 맥도널드에서 뜨거운 커피로 화상을 입은 사례가 700건에 달했지만 회사가 이를 알고도 같은 온도를 유지해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법원은 할머니의 손을 들어줬다. 법원은 손해배상금으로 16만 달러를 인정했다. 배심원은 추가로 맥도널드에 징벌적 손해배상금 170만 달러를 물렸다. 판사는 금액이 너무 높다며 이를 감액해 48만 달러로 벌금을 확정했다. 미국에선 징벌적 손해배상금의 규모를 법원이 정한 금액의 3배 수준으로 정한다. 결국 할머니가 64만 달러의 배상금을 받으며 소송이 마무리됐다.

한국은 대륙법계를 도입한 나라다. 독일·프랑스·일본의 사법제도가 대륙법계다. 구체적인 법안을 만들어 놓고 이를 적용하는 방식이다. 판사가 법률에 의거해 판결을 내리면 더 이상 추가적인 손해 배상이 어렵다. 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는 대륙법 채택 국가 사이에서도 조금씩 확산 중이다. 2008년 러시아는 2배수 징벌적 배상을 민법에 도입했다. 대만은 소비자보호법에 징벌적 배상을 적용한다. 중국에서도 불법행위법상 제조물책임조항에서 무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도입해 2010년 7월부터 이를 시행하고 있다.

최근 한국에선 징벌적 손해배상제와 집단소송제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번 옥시 사건처럼 책임을 물어야 하는 쪽의 불법 행위가 중대할 경우 실제로 입증된 손해액보다 훨씬 많은 금액을 배상하라는 것이다. 그래야 법위반자(기업)에 비해 사회적 약자인 피해자들의 대항력이 높아진다. 배상을 쉽게 받도록 법적인 지원을 해줄 경우 동일한 위법 행위가 반복되는 것을 예방할 수 있다. 옥시와 유사한 사건이 미국에서 벌어졌었다. 존슨앤존슨에서 제조한 베이비파우더를 사용한 여성이 난소암에 걸렸다. 그는 존슨앤존슨을 상대로 소송을 냈다. 법원은 회사 측이 징벌적 손해배상금 5000만 달러와 피해액이 입증된 손해배상금 500만 달러 등 총 5500만 달러를 물어야 한다고 판결했다.

한국의 집단소송제는 사문화된 상태

또 하나의 대안으로 집단 소송제가 있다. 기업의 잘못으로 인해 다수가 피해를 입었을 경우 피해자 일부가 소송을 제기해 이기면, 나머지 피해자들도 별도 소송없이 함께 피해를 구제받는 제도다. 집단소송은 ‘다수 당사자 소송’을 뜻한다. 판결의 효력이 소송 당사자뿐만 아니라 피해자 전체에게 미치는 소송이다. 지금 집단소송은 증권범죄 외의 분야에선 보장되지 않는다. 같은 피해를 입어도 직고소하지 않으면 보상을 못 받는다. 다수 당사자 소송만으로는 피해 구제가 불충분하다는 지적이 있다. 과거 카드사 고객정보 대량 유출 사건, 폴크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사건 등이 터질 때마다 집단소송제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이유다. 한국에서 집단소송제는 증권 분야만 제한적으로 도입됐다. 그나마 소송 남발 우려를 이유로 소송 조건이 까다로워 사실상 사문화된 상태다.

지금 국회에선 진상 규명 청문회와 피해보상특별법 논의가 진행 중이다. 하지만 여야 합의엔 시간이 걸릴 전망이다.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는 5월 9일 법안심사소위원회를 열고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도입 등을 담은 가습기살균제 관련 법안을 논의했으나 여야 이견으로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 조용탁 기자 ytcho@joongang.co.kr

1335호 (201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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