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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프 메이저대회 깜짝 우승한 ‘언더독’ 10명] 누구도 예상 못한 무명의 대반란 

극적인 우승으로 감동의 스토리 남겨 … 우승 후 대부분 부진 

남화영 헤럴드스포츠 편집부장

▎프란시스 위멧(가운데)이 1913년 US오픈에서 기적 같은 우승을 이룬 후 미국에서 골프붐이 일기 시작했다.
잉글랜드프리미어리그(EPL)에서 레스터시티가 창단 132년 만에 첫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인구 30만의 도시뿐만 아니라 세계가 환호했다. ‘언더독(Underdog)의 반란’이라는 말까지 나왔다. 전혀 가망성 없어 보이던 선수나 팀이 거물을 극적으로 제치고 우승하는 스토리는 늘 감동을 준다. 상승의 사다리가 막혀버리고 삶이 더없이 팍팍해진 요즘 일상에서는 더욱 환상이 된다. 골프에서도 언더독의 반란이 곧잘 있었다. 골리앗을 무너뜨린 다윗의 스토리 10가지를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메이저 대회에서 살펴봤다.

1. 프란시스 위멧(1913년 US오픈): 브루클라인의 전직 캐디 출신의 스무살짜리 아마추어 골퍼인 프란시스 위멧이 US오픈에 출전하기로 맘먹었을 때는 예선 통과만 해도 대단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1895년에 시작돼 18회를 맞이한 1913년 US오픈은 영국의 스타이자 최고 주가를 날리던 초청 선수 해리 바든, 테드 레이의 플레이를 가까이에서 보려는 골퍼들로 인산인해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 출신 선수가 우승한다는 건 꿈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기적이 일어났다. 4라운드 대회를 마쳤을 때 위멧을 포함한 세 명이 동타가 되어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다. 결국 연장전 스코어는 위멧이 72타, 바든이 77타, 레이가 78타였다. 브리티시오픈을 5번 우승하고 바든 그립을 창시한 바든의 자존심이 구겨진 것은 물론, 미국에선 종전에 없던 골프붐이 일었다. 미국에서 골퍼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골프장이 급속도로 증가한 건 바로 이때부터다. 당시 대회는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게임>이라는 책과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2. 잭 플렉(1955년 US오픈): 벤 호건은 1949년 자동차 사고로 온몸이 만신창이가 됐지만 불굴의 의지로 딛고 일어서 US오픈 등 메이저 우승 행진을 이어간 미국 골퍼의 롤 모델이었다. 당시 호건을 향한 팬심은 종교적인 맹신 수준이었다. 팬들에게는 그가 누구에게 진다는 사실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1955년 샌프란시스코의 올림픽 클럽에서 열린 US오픈에서 호건은 잭 플렉이라는 청년에게서 정규 타수를 동타로 마감한 후 다음날의 18홀 플레이오프도 마지막 홀에서 한 타차로 내주고 말았다. 호건은 버디를 잡아야 동타가 되는 상황이지만, 긴장 탓이었는지 샷이 말리면서 결국 더블 보기를 범하고 말았다. 10번째 메이저 우승의 기회를 이른바 ‘듣보잡’ 골프선수인 잭 플렉이 가져갔다. 정작 플렉도 난감했다. 호건은 자신의 우상이었고, 심지어 호건 브랜드 클럽을 들고나와 우승한 것이다. 언론은 플렉의 승리보다 벤 호건의 패배를 더 상세히 다루었다. 팬도 잭을 비난했고, 그의 아들조차 훗날 “나의 멘토 벤 호건이 져서 가슴 아프다”고 했다. 이후 플렉은 두 개의 PGA투어에서 승수를 추가했으나, 호건은 더 이상 우승하지 못했다. 20여 년이 지나 부인이 자살한 데 대해 플렉은 “사람들이 너무도 오랜 세월 동안 비난을 멈추지 않아 아내가 견디지 못한 것”이라고 마음 아파했다.


▎잭 플렉은 1955년 US오픈에서 골프팬의 우상이던 벤 호건을 물리치고 우승했지만 후폭풍이 만만찮았다. 잭 플렉의 아들마저 “나의 멘토가 져서 가슴 아프다”고 말했을 정도다.
3. 오빌 무디(1969년 US오픈): 14년 간 한국에서 주한미군으로 근무한 오빌 무디는 고향으로 돌아가 1967년 평소에 꿈꾸던 PGA투어 프로에 도전했다. 한국에서 복무하면서 한국오픈과 PGA선수권에 출전해 세 번이나 우승한 무디는 엄청난 장타의 소유자였으나 퍼팅이 항상 문제였다. 1969년 텍사스 휴스턴의 챔피언스클럽에서 열린 US오픈에서 누구도 예상 못한 우승을 했다. 대회 기간 내내 많은 비로 코스가 질척거렸고 그린은 한없이 느렸다. 무디는 잭 니클라우스, 아놀드 파머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총출전한 대회에서 엄청난 비거리로 홀을 공략했고, 느린 그린의 덕택에 그저 그런 퍼팅으로 한 타차 우승까지 일궈냈다. 2위는 딘 비먼, 알 가이버거였다. 이후로 무디가 PGA투어에서 우승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는 프로 생활 총 266개 대회에 출전해서 단 한 개 대회에서 우승했는데, 그게 바로 US오픈이었다.

4. 래리 마이즈(1987년 마스터스): 1934년부터 조지이주 오거스타내셔널에서 매년 개최되는 마스터스에서 가장 특이한 우승자는 1987년 오거스타에서 나고 자란 래리 마이즈였다. 4일 간의 경기를 마치고 동타를 이룬 선두는 그렉 노먼, 세베 바예스테로스와 래리 마이즈 세 명이었다. 연장전 두 번째 홀인 파4 11번 홀의 42m 지점에서 한 칩샷 버디로 그린재킷을 입었다. 당시 세계랭킹 1위로 전년도에서 막판에 우승을 놓친 바 있던 노먼은 이번에는 확실하게 이기려고 세컨드샷을 그린 15m 지점으로 보내 적어도 파를 잡을 수 있는 상황으로 만들었으나 마이즈의 전혀 예상못한 샷이 그를 또 무릎 꿇게 만들었다. 하지만 마이즈는 그 후 6년 동안 프로 생활을 더 이어갔지만 우승이 없었다. 이전에 거둔 3승에 더해 통산 4승이 그의 프로 전적이다.


▎오거스타에서 나고 자란 래리 마이즈는 1987년 마스터스에서 당시 최강자였던 그렉 노먼을 연장전 끝에 누르고 우승했다.


5. 존 댈리(1991년 PGA챔피언십): 인디애나주 크룩트스틱 골프장에서 열린 1991년 PGA챔피언십에서 선수들이 예정없이 빠지는 경우를 대비한 예비 선수 중에 가장 뒷 번호인 9번째 선수가 바로 존 댈리였다. 공교롭게도 닉 프라이스가 1라운드 하루 전날 아내의 출산 때문에 갑작스럽게 집에 돌아가게 되었다. 메이저 대회를 포기하는 선수는 거의 없는데 신기하게도 불시에 생긴 자리라 여러 선수가 차례차례 기권을 했고, 결국 25세의 댈리가 출전하게 됐다. 전화로 연락을 받은 즉시 댈리는 7시간을 차를 몰고 골프장으로 달려갔고, 이튿날 생전 처음 접하는 코스에서 댈리는 엄청난 장타를 맘껏 발휘해서 코스를 압도적으로 공략해 나가 우승까지 일궈냈다. 4년 뒤의 우승은 세인트앤드루스 올드코스에서 열린 디오픈이었다. 2006년 은퇴할 때까지 댈리의 PGA투어 우승은 메이저 2승에 총 5승이 전부였다.


▎존 댈리는 1991년 PGA챔피언십에서 예비 선수 중 가장 뒷 번호인 9번째 선수로 나가 장타를 휘둘러 우승했다.
6. 벤 커티스(2003년 브리티시오픈): 26세의 미국인 루키 벤 커티스는 90년 전의 프란시스 위멧이 그러했듯, 첫 우승을 메이저에서 따낸다. 커티스는 이 대회 이전까지는 세계 랭킹 396위의 풋내기 선수에 지나지 않았다. 2003년 잉글랜드 샌드위치의 로열세인트조지스에서 열린 브리티시오픈에서 커티스는 유난히 어렵고 바람이 심했지만 유일하게 1언더파를 쳤다. 타이거 우즈, 비제이 싱, 데이비스러브 3세 등 당시 세계랭킹 선두가 총출동했으나 추풍낙엽처럼 바람에 날아갔다. 대회 마지막 날 덴마크의 베테랑 토마스 비욘은 파3 16번 홀에서 그린 밑 언덕에서 친 볼이 세 번이나 굴러내려오는 불운을 겪으면서 더블보기를 적어내 결국 클라렛 저그를 들어올릴 기회를 놓쳤다. 이튿날 언론들은 하나같이 ‘깜짝스타의 우승’을 타전했다.

7. 숀 미킬(2003년 PGA챔피언십): 2003년은 골프사에서 신인들의 깜짝 메이저 우승이 여러 차례 나온 해로 기록된다. 벤 커티스라는 신인이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한 한 달여 뒤에 23세의 신인이자 세계랭킹 169위의 숀 미킬은 뉴욕 오크힐에서 열린 PGA챔피언십에서 베테랑인 채드 캠벨을 누르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타이거 우즈 등 쟁쟁한 선수들도 헤맸으나 결국 트로피를 들어올린 선수는 미킬이었다. 마지막 홀에서 미킬은 1차 러프에 빠진 볼을 165야드 거리에서 7번 아이언으로 쳐서 홀 6cm에 붙이는 놀라운 샷으로 우승을 차지한다. 하지만 미킬의 천재성은 그날 하루뿐이었다. 미국 CBS스포츠는 ‘역대 메이저에서 우승한 최악의 선수’로 그를 꼽았다. 이유인 즉, 미킬은 이후 23번의 메이저 대회에 출전해 13번 컷 탈락했다. 생애 통산 출전한 380개 대회에서 우승은 이때 단 한 번뿐이었다.

8. 토드 해밀턴(2004년 브리티시오픈): 12년 간 일본JGTO투어와 아시안투어를 떠돌던 ‘저니맨’ 토드 해밀턴의 꿈은 PGA투어를 뛰는 것이었다. 38세에 이르러 꿈을 이뤘다. 내친 김에 혼다클래식에서 우승하면서 생애 처음으로 PGA투어에서 1승을 거뒀고, 스코틀랜드 로열트룬에서 열리는 브리티시오픈에 출전하는 자격까지 충족시켰다. 디오픈 무대에서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던 해밀턴은 4일 동안 단 2개의 보기만을 거둔 무결점 플레이를 펼쳐 10언더파로 경기를 마쳤다. 2년 전 우승자이면서 세계랭킹 2위 어니 엘스와 플레이오프를 벌여야 할 상황이었다. 엘스는 18번 홀에서 다 잡았던 버디퍼트를 어이없는 실수로 놓친 것 때문에 혼이 반쯤 나가 있었다. 결국 4홀 플레이오프에서 맥을 못 추고 만다. 해밀턴은 이 대회에서 이후로는 더 이상 PGA투어 우승은 추가하지 못했다.


▎디오픈에 서는 것만으로 행복하다던 토드 해밀턴은 2004년 브리티시오픈에서 무결점 플레이로 우승했다.
9. 마이클 캠벨(2005년 US오픈): 뉴질랜드 마오리 전사의 후예인 마이클 캠벨은 2005년 초 PGA투어에서 해외 투어에 주는 출전권을 얻어 파인허스트에서 열린 US오픈에 출전하게 됐다. 마지막 날 캠벨이 친 69타는 대부분의 리더보드 선두권 선수들이 80타대를 친 것에 비하면 경이적인 스코어였다. 3라운드까지 선두로 US오픈 2연패를 노리던 레티프 구센은 81타로 자멸했다. 타이거 우즈가 유일하게 1언더파를 치면서 분전했으나 2타차로 2위에 만족해야 했다. 마오리족의 문양이 새겨진 흰색 티셔츠를 입은 캠벨은 붉은 티셔츠의 타이거 우즈를 한 타차로 제치고 우승했다. 캠벨은 각종 투어에서 총 15번 우승했으나 PGA투어에서는 US오픈이 유일한 우승이었다. 이후로 마스터스에서는 10번 출전해 모두 컷 탈락했다.

10. 양용은(2009년 PGA챔피언십): 2009년 헤이즐틴에서 열린 PGA챔피언십의 마지막 라운드를 시작할 때 양용은은 타이거 우즈에 2타 뒤진 2위였다. 세계 1위로 최전성기였던 타이거 우즈는 마지막 날 선두로 나선 메이저 대회에서는 한 번도 패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양용은은 이날 우즈를 3타 차이로 제치고 역전 우승을 차지했다. 당시 누구도 우즈가 질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회 결과는 놀라움 자체였다. 다만, 양용은이 2006년 유러피언투어였던 HSBC챔피언십에서 우즈를 꺾고 우승한 적이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때도 같은 조는 아니었다. 양용은은 이 대회 이전까지 그 해 3월에 혼다클래식 우승으로 PGA투어에서 첫 승을 올린 바 있다. 1위 우즈에 역전승한 양용은의 세계 랭킹은 460위에 불과했다.

- 남화영 헤럴드스포츠 편집부장

1335호 (2016.05.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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