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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잘 날 없는 EU] 이상주의적 결성 … 유럽회의주의 만연 

많은 나라에서 주권 침해 논란 불러 … 영국 국민투표 후 새 국면 맞을 듯 

채인택 논설위원 ciimccp@joongang.co.kr

▎영국의 EU 잔류를 호소하고 있는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
유럽연합(EU)은 이상적인 지역 통합체다. 정치적으로는 전쟁을 막고, 경제적으로는 공동 번영을 추구한다. 이런 통합조직의 탄생은 철저히 역사적이다. 유럽의 역사가 가져온 필연적인 산물이다. 달리 말하는 비참한 역사에서 뼈저린 교훈을 얻었기에 불행을 막기 위해 통합이라는 수단을 선택한 것이다. EU의 탄생 과정을 살펴보면 이를 명확히 알 수 있다.

‘전쟁은 막자’ 절박함 속에서 탄생: 유럽은 좁은 대륙에 크고 작은 수많은 나라가 존재한다. 단일 국가가 아니므로 다양한 갈등이 생기기 좋은 환경이다. 근대가 시작된 17세기 유럽은 신교도와 구교도 간의 30년 전쟁(1618~1648년)으로 폐허가 됐다.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으로 제후의 종교자유를 인정하고 각국의 주권을 존중하는 국제질서가 성립되면서 잠시 질서를 찾은 듯싶었다. 하지만 전쟁은 끝없이 계속됐다. 7년 전쟁, 스페인계승 전쟁, 나폴레옹 전쟁, 독일통일 전쟁…. 민중은 엄청난 고통에 시달렸다. 하지만 이는 약과였다.

20세기에 들어와선 전쟁이 유발한 비극의 규모가 천문학적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로 유럽에선 20세기 들어 1914~18년의 제1차 세계대전, 1939~45년의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천 만명이 목숨을 잃고 전 대륙이 잿더미가 됐다. 기관총과 대규모 포격, 독가스와 공중폭격 등 전쟁은 갈수록 잔혹해졌다. 전쟁을 틈타 인류 최대의 증오범죄인 홀로코스트도 벌어졌다. 이에 따라 유럽인들은 과거 로마제국이나 프랑크왕국처럼 단일 체제안에서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방안을 생각하게 됐다.

이상주의자 쉬망 “석탄과 철강부터 통제하자”: 특히 2차대전 종전 후 핵무기를 배후에 둔 냉전이라는 무시무시한 시대를 맞으면서 유럽인들의 이런 갈망은 더해졌다. 전쟁이 없고 공동 번영을 추구할 수 있는 연합체를 입에 올리게 됐다. 이를 처음으로 입에 올린 사람은 영국의 윈스턴 처칠이다. 처칠은 야당 총재 시절인 1946년 ‘유럽 합중국(United States of Europe)’에 대한 구상을 말했다. 유럽인들은 즉각 이에 반응했다. 1949년에 ‘유럽 이사회’가 최초의 범유럽 기관으로 설립됐다. 이듬해인 1950년 5월 9일 유럽통합 이상주의자인 프랑스 외무장관 로베르 쉬망이 유럽의 석탄과 철강산업을 통합하자는 공동체 설립을 제안했다. 석탄과 철강 공동체라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석탄과 철강은 근대 국가의 국부를 좌우하는 핵심 요인인데다 전쟁 무기와 교통수단을 만드는 필수적인 자원이다. 전쟁 방지와 경제적 번영에 모두 관련 있는 물품이다. 이런 제안을 하고 실천에까지 나섰던 쉬망은 유럽 공동체의 아버지로 불린다.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공동 발전 시도: 쉬망의 제안에 따라 프랑스, 이탈리아, 베네룩스 3국과 서독 등 6개국은 1951년 파리 조약에 서명하고 유럽석탄철강공동체(ECSC)를 창설했다. 유럽연합(EU)의 모태가 되는 조직이다. ECSC는 1952년 일반의회(Common Assembly)를 창설하고 6개 회원국 의회에서 78명의 의원을 선출했다. 이 조직은 1958년 더욱 확장돼 유럽경제공동체와 유럽원자력기구(Euratom)를 포괄하게 되면서 이름도 유럽의회회의(European Parliamentary Assembly)로 바꿨다. 오늘날 유럽을 운영하는 유럽위원회·EU·유럽의회의 3대 유럽기구는 이렇게 창설됐다. ECSC는 유럽경제공동체(EEC)를 거쳐 1993년 유럽연합(EU)이라는 통합체 출현으로 이어졌다. 2002년 1월1일부터 EU의 공식화폐인 유로화가 도입됐다. 현재 28개 EU회원국 중 19개국과 비회원국 9개국이 사용하고 있다. 달러에 이은 사실상 글로벌 기축통화로 자리잡고 있다. 유로화 도입은 EU가 정치 통합에 이은 경제통합까지 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통합 거부감이 유럽회의주의자 만들어: 문제는 이런 유럽의 이상적인 통합에 거부감을 나타내는 세력이 도도하게 존재한다는 점이다. 바로 유럽회의주의자들이다. 유럽회의주의(懷疑主義)란 유럽이 유럽연합(EU)으로 통합되는 과정에서 통합보다 주권을 우선시하거나 인적 이동 자유화에 따른 이민 증가 등에 반감을 나타내는 등 유럽 통합 자체에 반대하는 이념이나 사상을 가리킨다. EU회의론이라고도 한다.

유럽에서 유럽회의주의자들은 강경파와 연성파의 두 부류로 나뉜다. 강경파는 EU의 존재 또는 자국이 회원국이 되는 것 자체에 반대한다. 유럽의회 내에 있는 ‘자유와 직접 민주주의’ 그룹이 이를 대표한다. 브렉시트 운동을 주도하는 영국독립당도 여기에 속한다. 연성파는 EU의 존재와 자국의 가입은 지지한다. 하지만 개별적인 EU의 정책에 반대하는 그룹이다. 예를 들어 EU를 연방제로 확대한다든지 초국가로 만드는 것에는 반대 입장을 나타낸다. EU의 확대와 미래에 대해 선별적으로 반대 입장을 표명하면서 무조건적인 확대에 제동을 걸고 더욱 높은 수준의 논의를 요구한다. EU와 함께 개별 국가의 주권과 국익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룹이다. 유럽 의회에서는 ‘유럽 보수 개혁주의자’ 그룹이나 ‘유럽연합 좌파노르딕 녹색좌파 연합’이 여기에 속한다. 개별 국가에서는 영국 보수당이나 체코의 시민민주당이 여기에 포함된다. 주로 중도 우파 정당이 여기에 속한다.


유럽회의주의가 부른 영국의 브렉시트 국민투표: 영국이 EU 탈퇴를 묻는 국민투표를 하게 된 직접적인 이유는 국민 사이에 유럽회의주의가 만연했기 때문이란 분석이다. 사실 역사적으로 볼 때 유럽회의주의의 근원은 영국이다. 과거 영국이 EU의 전신인 유럽경제공동체(EEC) 가입을 고려하던 당시 노동당과 보수당 모두에 존재하던 반대파를 가리키던 말에서 시작됐다.

그 후 유럽회의주의는 유럽 전역으로 세력을 확대했을 뿐 아니라 다양한 어젠다에서 논란을 몰고 왔다. 유럽통합과 관련 정책, 유로화 도입, 냉전 이후 동유럽 국가들에 대한 문호 개방은 물론 장래를 둘러싼 논란에서도 유럽회의주의는 힘을 발휘했다. EU의 미래를 둘러싸고 초국가적인 조직, 연방제, 국가연합 형성과 범유럽적인 통합체의 설립 등 다양한 방안이 제기되고 있다. 이러한 통합 가속화에 반대 입장을 표시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다. 이들 역시 EU의 구성에는 찬성하지만 추가적인 통합이나 그 속도에만 반대의 목소리를 낼 뿐이다. 하지만 이들 역시 유럽회의주의로 분류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유럽회의주의자들이 흔히 들고 나오는 것이 ‘주권’ 개념이다. EU통합이 개별 국가의 주권을 침해하든지 제한한다는 것이다. 국민국가나 국가주권의 개념은 오랫동안 유럽의 국제정치에서 핵심을 차지해왔던 개념이다. 하지만 EU 설립조약 전문을 보면 ‘제한 없고 연합체에 가까운(ever closer union)’이라는 구절이 있다. 유럽회의주의자들은 이 부분이 주권 침해의 소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럽회의주의자들은 EU의 의사결정 과정이 지나치게 관료적이며 비민주적이고 비효율적이라는 주장도 함께 펴고 있다. 이에 따라 엄청난 비용이 이를 유지하기 위해서 지출된다고 비난한다. 이 비용을 아껴 개별 국가의 사회복지에 사용한다면 국민 삶의 질을 높일 수 있을 것이라는 주장을 편다.

문제는 유럽회의주의가 영국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영국과 더불어 스웨덴, 덴마크 등이 통화통합, 즉 유로존 참여를 거부한 것도 유럽회의주의의 일환이다. EU 비회원국인 노르웨이·아이슬란드·스위스도 마찬가지다. 스위스에선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독일어 사용 지역에서 유럽연합과의 관계 강화나 가입에 소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유럽 곳곳에서 웅크리고 있는 통합반대론자들: 과거 소련의 영향권 아래 있다가 냉전 소멸로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받아들였던 동유럽권은 원래 EU 가입을 열망했지만 최근 들어서는 유럽회의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특히 헝가리는 유럽회의주의자들이 정권을 차지하고 있어 영국이 브렉시트를 결정하면 즉시 이를 따를 태세다. 옛 동유럽 국가 중 체코와 더불어 가장 시장경제 도입에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는 헝가리에서 유럽회의주의가 판을 치는 것은 중요한 관심거리다.

사실 유럽회의주의는 여러 EU 회원국에서 도도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EU의 여론조사기관인 유로바로메터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국의 EU 가입이 이익을 가져오고 있다고 느끼느냐’는 질문에 스웨덴에서는 10명 중 3명 미만이, 영국에서는 10명 중 4명 정도가 긍정적인 답변을 했을 뿐이다. 독일이나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대륙 국가들은 EU에 대한 지지가 높은 편이지만 이런 나라에도 어떠한 형태로든 유럽회의주의나 이와 관련한 활동이 존재하는 것은 물론 나날이 확대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동유럽에서 신규 가입한 나라 중에는 헝가리와 함께 체코가 유럽회의적인 경향이 강한 나라로 분류된다.

통합 자체에 반대 vs 통합 속도에 불만: 유럽회의주의는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노르웨이는 아직 EU 회원국이 아닌데 가입을 묻는 두 차례의 국민투표에서 유권자들이 가입에 반대했기 때문이다. EU 가입이 국민 경제에 도움을 주지 않으면서 주요 산업인 어업과 석유산업에 부담과 규제만 더할 것이라고 국민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스위스도 EU권과의 경제협력 확대안이 국민투표에서 거부됐다. 덴마크는 1992년 정치적인 유럽공동체 구성을 위해 체결된 핵심 조약인 ‘마스트리히트 조약(유럽연합에 관한 조약)’을 국민투표에서 거부했다가 재투표에서 간신히 통과시켰다. 덴마크는 유로 도입을 묻는 국민투표도 거부해 유로존에 들어가지 않았다. 스웨덴도 2003년 유로화 도입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거부의사를 밝혔다. 아일랜드는 2001년 EU의 확대와 내부 기구 개혁, 유럽의회 의석 재할당 등을 규정한 니스 조약의 비준을 거부했다가 재투표에서 간신히 인증했다. 아이슬란드는 EU 미가입국으로 남아 있다. 덴마크령 그린란드는 1979년 자치권을 얻었으나 EU의 전신인 EEC에서 탈퇴했다. 2005년에는 프랑스와 네덜란드에서 유럽헌법조약의 추인을 묻는 국민투표가 부결됐다.


EU의 지나친 중앙집중제, 소통부재가 불만 불러: 유럽회의주의를 부른 원인은 다양하다. 우선 EU의 지나친 중앙집중제를 들 수 있다. 개별 국가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는 획일적인 통합 방안과 제도 도입이 일부 국가와 국민, 정치인의 불만을 부른 측면이 적지 않다. 통합의 속도를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 사람이 보수층을 중심으로 상당히 존재한 것도 이유로 꼽힌다. 유럽통합주의자들이 이상에 빠져 사람들과 소통하고 설득하고 다독거리며 통합의 부작용과 부수적인 피해를 줄이는 노력을 게을리한 것이 유럽회의주의자들이 양산된 원인으로 꼽힌다. EU의 설립과 확산, 그리고 통합작업이라는 대의명분에만 집착한 나머지 통합으로 인한 긍정적인 영향과 부정적인 영향을 동시에 받는 일반 대중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영국에서도 브렉시트를 찬성하는 사람들이 50대 이상의 교육수준이 낮은 노동자층 남성이 많고 반대하는 측, 즉 EU에 남기를 바라는 사람은 젊고 고학력의 엘리트 층이 많다는 사실은 이를 잘 말해준다. 글로벌화가 진행된 대도시에선 EU 지지파가 많고 중소도시나 농촌엔 반대파가 상당수인 이유이기도 하다. 이데올로기 상으로 좌우할 것 없이 엘리트 층은 친EU, 대중은 반EU 분위기를 나타내는 데는 이 같은 세대간·계층간·지역간 갈등이 바탕이 된다고 하겠다.

그럼에도 EU 지도부는 통합을 지상과제로만 생각해 다양한 의견과 불만에 눈길을 주지 않은 게 사실이다. 급기야 미국과 같은 합중국 체제 창설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 유럽회의주의자들의 불만은 극에 달했다. 여기에 몇몇 민족주의자들이 ‘주권’ 개념과 ‘이민 반대’ 구호를 들고 나왔다. 이들은 통합에 따른 국제화의 이익보다 탈퇴에 따른 분담금 절약을 내세우고 있다. 유럽 통합으로 얼마나 많은 인력이 자기 나라로 몰려와 자국의 경제를 살리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한 선택이다. 이에 따라 유럽회의주의는 포퓰리즘의 하나로 지적받기도 한다.

주권 존중과 지나치게 빠른 속도 조절이 관건: 하지만 지나치게 빠른 유럽 통합의 속도가 개인은 물론 몇몇 국가도 어지럽게 했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EU가 개별 국가의 주권을 경시한다는 주장이 유럽회의주의자들 사이에서는 물론 유럽의 일반인 사이에서도 강한 이유다. EU는 그동안 유럽긴급대응부대 창설안, 유럽헌법 마련, 유럽검찰청 설치안, 유럽사법기구 창설, 유럽형사경찰기구(유로폴) 권한 확대, 각국의 세금과 생활보호제도의 조정, 개별 회원국의 법률에 대한 EU의 거부권 행사 등을 추진해왔다. 군사·사법·치안·조세·입법 등 이전까지 당연히 개별 국가의 주권에 해당한다고 믿었던 부분에 EU가 공공연하게 개입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조치들이다. 하나같이 유럽회의주의자들 사이에선 당연히 ‘주권’을 제한한다는 불만이 터져 나올 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통합주의자 입장에서 보면 당연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결국 브렉시트가 이뤄지든 아니든 간에 영국의 국민투표 이후 EU는 통합의 속도 조절이라는 과제를 안게 됐다. 어쩌면 브렉시트의 충격과 공포가 EU의 뿌리 깊은 문제를 수면에 올렸는지도 모른다. EU의 미래에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문제는 브렉시트의 찬반을 묻는 국민투표 사태가 아니라 그 다음이다. EU가 이상과 현실론 사이에서 어떤 길을 어떤 속도로 걸을 것인가에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는 이유다.

1340호 (2016.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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