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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사직상소에 비친 조선 선비의 경세관’ (22)] 법례에 얽매여 인재 놓치는 일 없어야 

강희맹의 이조판서 사직상소... 인사 실무자의 임기 등 운용 방안 제안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1466년(세조12) 5월 8일 세조는 2품 이하의 신하들을 대상으로 ‘발영시(拔英試)’라는 특별 과거를 실시, 합격한 34명을 포상하고 승진시켰다. 어질고 능력 있는 신하들의 사기를 북돋아주겠다는 명분이었다. 그런데 바로 다음 날 해당 시험을 재차 시행하라고 명령한다. 강희맹이 발영시에 참여하지 못해 무척 아쉬워한다는 말을 듣고서였다(세조12.5.9).

이처럼 세조의 각별한 총애를 받았던 사숙재(私淑齋) 강희맹(姜希孟, 1424~1483)은 서거정과 더불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문장가로 손꼽힌다. 중국의 대가 사마천과 구양수에 비유될 정도였다(해동잡록). 그는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렸던 형 강희안과 함께 문화예술 분야에 큰 족적을 남겼는데, 정치가로서 중앙 정계에서의 위상 또한 만만치 않았다. 세종의 조카이자 세조의 이종사촌동생이었던 덕분에 임금의 후원을 배경으로 삼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성종이 세자를 강희맹의 집으로 피병(避病)시킨 것도 그가 왕실의 인척이어서다.

세종의 조카이자 세조의 이종사촌동생

하지만 강희맹은 신하로서 강직한 면모를 보여주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공손하고 근엄하며 신중하고 치밀했지만 평생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은총을 희구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성종14.2.18). 외척으로서 임금이 신뢰한 존재이니만큼 적극적인 간언으로 정치를 바로잡기 위해 노력했다면 좋았겠지만, 그저 임금의 의중을 헤아리고 임금의 지시를 실현하는 데에만 충실했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권력을 전횡하거나 부정을 저지른 일이 없었고, 항상 겸손하고 조심스럽게 관직생활에 임했기 때문에 자신의 명성을 보전할 수 있었다.

이번에 소개하는 상소 또한 강희맹의 이런 스탠스가 여실히 드러나는 것으로, 성종 9년 강희맹은 “소신은 세조대왕의 외척 신하로서 여러 번 전형(銓衡, 인재를 저울질하여 골라 뽑는다는 뜻으로, 인사 업무를 담당하는 부처인 이조와 병조의 관직을 가리키기도 한다)의 직책을 맡은 바 있으나, 이 일을 감당하기에 한 치의 장점도 없나이다”라며 이조판서를 사직했다(이하 인용은 모두 성종 9년 3월 18일자 실록기사임). 외척이었던 덕분에 요직인 인사업무를 담당해왔지만 이를 총괄하는 이조판서를 감당하기에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생각건대, 예부터 전형의 임무는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어리석은 자가 지혜로운 자처럼 보이고 간사한 자가 정직한 자처럼 보이며 속은 돌과 같으면서도 겉은 옥(玉)으로 보이고, 양의 바탕에 호랑이의 가죽을 쓰는 등 만 가지로 서로 같지가 않습니다. 그리하여 제왕은 스스로 전형을 맡지 않고 반드시 담당 직무를 두어 일을 맡겨온 것인데, 이것이 어찌 임금의 지혜가 부족해서였겠습니까? 사람을 고루 안다는 것이 진실로 어렵기 때문입니다.’

무릇 인재란 그냥 본다고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에 속지 않고 그 사람의 내면과 실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세밀한 검증 절차가 필요하다. 더욱이 국가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수백, 수천 명의 인재가 필요하므로 이를 전담할 부서인 ‘전조(銓曹, 이조와 병조)’와 담당자인 ‘전관(銓官)’을 따로 두는 것이다.

그런데 전조의 총책임자인 이조판서(문신 담당)와 병조판서(무신 담당)의 경우 큰 권병(權柄, 자신의 뜻대로 사람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권력)을 잡은 자리로서 누구인들 근본을 청명하게 하여 한결같게 원칙을 지키려 하지 않겠냐만은 처음에는 삼가다가 이내 익숙해지고, 익숙해지면 습관이 생겨 모든 하는 일이 점점 처음과 같지 않게 되기 쉬운 법이다. 강희맹 자신도 병조판서를 맡았을 때 처음에는 단 한 사람을 등용하더라도 반드시 적당한지 않은지를 세 번 생각한 뒤에 주의(注擬, 최종 후보자 3인을 결정해 임금에게 올리는 것)하였으며, 털끝만큼이라도 잘못 주의한다는 나무람이 있을까 두려워하였지만, 두어 달 후부터는 점차 관례에 익숙해져서, 명부를 비스듬히 한번 흘겨보고 주의하였으니 얼핏 유능한 것처럼 보이나 일에 익숙해져 마음을 제대로 쓰지 않았었다. 물론 인사 업무에는 오랜 경험과 전문성이 필요하겠지만, 적어도 이를 총괄하는 장관의 경우 재임 기간을 1년으로 한정하여 업무의 긴장감을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판단이다.

채용·승진의 자격 요건 벗어난 파격적 인사도 필요

아울러 강희맹은 ‘신은 그저 문부(文簿)에 의지하여 성적을 살피고 재직 연수에 따라 승진의 차례를 정했을 뿐, 마음속으로 어진 이를 알고 있어도 임기(승진 소요 최저 연수)가 차지 않았으면 이내 손을 저으며 포기했고, 용렬함을 알고 있을지라도 임기가 만료되었으면 전례에 따라 승진시켜 관직을 제수하였습니다. 이 어찌 사람을 전형하여 올바로 쓴 것이겠나이까?’라고 고백한다. 이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부족함 때문이지만 인사와 관련된 법률과 규정이 그와 같아서 변통할 방법이 없었으니, 혹시라도 변통한다면 사사로움을 행한 것이 되어 나아갈 수도 물러날 수도 없어 도대체 어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던 탓도 있다. 어질고 훌륭한 인재가 있어서 전격적으로 발탁하고 승진시키고 싶어도 법에 저촉되는데다가 인사권을 사사로이 휘두른다는 비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반대로 무능하고 문제가 있는 사람일지라도 일정 기간을 채우면 승진시켜야 하는 것이 규정이어서 불필요한 인력을 도태시키거나 솎아낼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물론 채용과 승진의 자격 요건을 객관적으로 정해놓는 것은 인사의 투명성과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이다. 권력자의 인사 개입을 방지하는 효과도 있다. 그러나 그것이 폐쇄적이고 수동적인 규정으로 고착된다면 인재의 진입을 가로막고 조직을 정체시키는 원인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환부를 도려내고 새로운 피를 수혈하는 일이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중요한 임무를 맡기에 최적임자이지만 과거시험을 보지 않았고 관직생활을 한 적이 없다는 이유로 거부되거나 말단 관직만 주어져 결국 사장되어 버리는 경우를 우리는 역사 속에서 쉽게 찾아볼 수가 있다. 강희맹이 상소에서 인사 법례(法例)의 변통을 요청한 것은 바로 그래서이다. 강희맹은 인사책임자인 이조판서나 병조판서가 경우에 따라 관행과 틀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인사도 단행할 수 있어야 한다고 본다. 그 과정이 사사롭게 운용되지 않도록 엄격히 관리하면 되는 것이지 그 자체를 막아서는 안 된다. 인사에서 중요한 것은 승진을 위한 연수를 채웠느냐가 아니라 승진할 만한, 혹은 그 자리를 감당할 만한 능력이 있냐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컨대 강희맹은 이조판서를 사직하며,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이조판서 직(職)의 향후 운용 방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임기를 1년으로 제한하는 문제는 업무 연속성 등에서 이견이 있겠지만 매너리즘에 빠지지 않고 해당 업무에 집중하도록 하자는 취지는 기억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인사의 능동성을 도모하는 것도 중요하다. 강희맹은 이조판서에게 자율권을 부여해 인사의 안정과 혁신을 동시에 추구하도록 해야 한다고 본다. 법례에 얽매이느라 인재를 놓치는 일이 없도록 막자는 것이다. 오늘날에도 명심해야 할 지적이 아닐 수 없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49호 (2016.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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