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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수화로 배우는 풍경사진(14)] 경(景)·정(情)이 어우러진 환(幻)의 세계 

감탄 넘어 감동 담아야 ... 정서적·감성적 터치 필요 

글·사진 주기중 기자 clickj@joongang.co.kr
겸재 정선을 비롯한 조선시대의 화가들이 공통으로 그렸던 산수화가 있습니다. ‘소상팔경(瀟湘八景)’입니다. 중국 후난성의 둥팅호로 흘러 드는 강 소수(瀟水)와 상강(湘江) 일대의 여덟 가지 풍경을 그린 그림입니다. 이곳은 중국 최고의 절경으로 알려진 곳입니다. 북송 때부터 화가뿐만 아니라 시인묵객이 둥팅호 일대의 풍경을 그림으로, 시문으로 남기기도 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소상팔경이 유행처럼 번져 고려 시대 때부터 이를 그렸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사진1) 메시아, 2014
소상팔경의 첫째는 산시청람(山市靑嵐)입니다. 봄기운이 완연한 산촌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둘째는 원사만종(遠寺晩鐘)입니다. 공감각적인 표현입니다. 멀리 산사에서 들여오는 저녁 종소리라는 뜻입니다. 셋째는 어촌석양(漁村夕照)으로 노을에 물든 어촌의 풍경을 그린 것입니다. 넷째는 원포귀범(遠浦歸帆)입니다. 고기잡이 배가 멀리 있는 포구로 돌아오는 장면입니다. 다섯째는 소상야우(瀟湘夜雨)로 소수와 상강에 내리는 밤비를 뜻합니다. 매우 낭만적인 표현입니다. 일곱번째는 동정추월(洞庭秋月)입니다. 둥팅호에 비치는 가을 달이라는 뜻입니다. 일곱번째는 평사낙안(平沙落雁)으로 모래가 있는 강가에 앉아있는 기러기를 뜻합니다. 여덟번째는 강천모설(江天暮雪)로 해질녘 눈 덮인 산야의 모습을 일컫는 말입니다.

이상적인 산수경 ‘소상팔경’


▎화룡포의 아침, 2016.
조선시대 화가들에게 소상팔경은 관념 속에 있는 이상적인 산수경이었습니다.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소상팔경을 상상 속에서 그렸습니다. 문인들은 그림을 보며 시를 남겼습니다. ‘관동팔경’이니 ‘단양팔경’이니 하는 ‘팔경’의 유래도 소상팔경에서 온것입니다.

소상팔경은 아름다운 자연풍경의 ‘최대공약수’가 됐습니다. 소상팔경에 등장하는 그림의 소재를 나열해 볼까요. 산·물·구름·안개·비·눈·달·기러기·산사·초가집·어부·고깃배·낚시…. 이는 다른 산수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요소들입니다. 소상팔경은 천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 마음속에는 가장 이상적인 풍경으로 각인돼 있습니다. 산허리를 감고, 계곡마다 드리워진 운해를 보면 자신도 모르게 넋을 잃고 사진에 몰입하게 됩니다. 아마 산수화가나 풍경사진을 즐기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고개가 끄덕여지리라 생각합니다.

영국의 생물학자 리처드 도킨스의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는 ‘밈(meme)’이라는 용어가 나옵니다. 일종의 ‘문화적인 유전자’를 뜻하는 말입니다. 예술, 철학, 종교, 사회적 관습 등도 모방과 흉내를 통해 복제되며 다음 세대로 전달된다는 이론입니다. 우리 조상이 즐겨 그리고, 감상하던 산수화의 소재가 정서적인 DNA를 통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몇 년 전 미국 중서부의 캐년 여행을 했습니다. 레드캐니언, 캐니언랜드, 모뉴멘트 밸리, 아치스 국립공원 등 세계적으로 이름난 관광지입니다. 수억년 동안 만들어진 협곡과 바위가 장엄하고 신비로운 풍광을 연출했습니다.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아름다운 풍경이었지만 선뜻 카메라에 손이 가지를 않았습니다. 감탄은 하지만 감동이 없다고나 할까요. 습관적인 관광사진만 찍다가 돌아왔습니다. 낮선 풍경, 익숙하지 않은 지형 때문인지 마음이 동하지 않았습니다.

기억에 남는 장면은 모뉴먼트 밸리에서 찍은 ‘메시아(사진1)’ 정도입니다. 이곳은 백인들의 침략으로 땅을 뺏기고, 죽임을 당한 인디언의 후손들이 자치국가를 세우고 사는 곳입니다. 사막 한 가운데 우뚝 솟은 바위 가장 자리에 삐져나온 인체 조각같은 형상에서 ‘메시아’의 이미지를 봤습니다. 돌탑이 메시아를 기다리는 인디언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습니다. 미 협곡 여행 중 처음으로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역사적으로 잦은 외침에 시달려온 우리 역사가 오버랩됐는지 모르겠습니다.

풍경을 대하는 철학·신념 묻어나야

우리나라 풍경사진 시장은 비좁습니다. 카메라를 배우면 제일 먼저 하는 것이 인물과 풍경사진입니다. 날씨 좋은 날 ‘국민포인트(사진 동호인들이 많이 몰려 드는 곳)’를 가면 항상 사람들이 몰려 있습니다. 삼각대 설치할 공간도 없이 빽빽하게 서 있습니다. 프로 사진가에게는 재앙(?)입니다. 하는 수 없이 지구촌 오지로 눈을 돌립니다. 벌거벗은 원주민 사진 한 장 쯤 없으면 사진가로 명함도 못 내미는 시대가 됐습니다. 누가 더 오지 깊숙히 들어갔느냐로 승부합니다. 작품성이 아니라 보여주기로 경쟁하는 것이지요. 이른바 소재주의에 빠진 것입니다. 사진가가 발로 뛰며 풍경의 영역을 넓혀 나가는 것이 의미없는 일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렇게 찍은 사진이 국민포인트에서 아마추어가 찍는 사진과 다를것이 있을까요? 또 세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을까요? 프로 사진가라면 신비롭고, 장엄하고, 아름다움에만 집착해 셔터를 눌러서는 안됩니다.

진정한 풍경사진은 보여주기가 아니라 마음을 담는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 산수화는 ‘경치 밖의 뜻(景外意)’을 중시합니다. 풍경을 대하는 철학과 신념 등 정신적인 메시지를 전달해야 합니다. 그리고 수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오는 우리 민족의 정서적이고 감성적인 DNA를 건드려 줘야 합니다. 좋은 풍경 사진은 경(景)을 넘어 정(情)이 느껴집니다. 경과 정이 어우러진 ‘환(幻)’의 세계를 추구해야 합니다. 우리의 산수를 독창적으로 풀어내는 세계적인 풍경사진가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1351호 (2016.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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