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보호와 육성’으로 정책 전환... 대·중소 격차 벌어지며 경제민주화의 중심에
경제민주화. 경제와 정치의 이질적인 조합이다. 경제와 정치의 관점은 다르다. 경제는 합리성에, 정치는 권력에 바탕을 둔다. 경제는 효용을 위한 최적 전략이, 정치는 선거를 위한 필승 전략이 필요하다. 경제민주화가 풀리지 않는 이유다. 경제민주화의 주요 대상은 한국 경제의 절대 다수인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 하면 보호, 지원, 열악한 환경, 낮은 임금 등이 떠오른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중소기업은 돌봐야 하는 ‘덤’ 신세가 된다. 한국경제는 성장의 돌파구가 필요하다. 대부분의 선진국은 중소기업 강국이다. 중소기업이 성장의 돌파구인 이유다.
‘중소기업 강국으로 가는 길’은 ‘왜 중소기업인가’를 찾는 과정이다. 중소기업의 어제를 훑어보며 어떻게 커왔는지를 볼 것이다. 그래야 오늘날 중소기업을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중소기업의 내일을 그려보며 어떻게 커가야 하는지를 볼 것이다. 이를 통해 그릇된 관점을 바로잡고, 올바른 방향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란다. [편집자]
▎전두환 정부는 강력한 중소기업 육성 정책을 폈다. 1982년 5월 14일 세종문화회관에서 개최된 전국중소기업자대회에서 전두환 대통령이 수상자들에게 훈장을 수여하고 있다. / 사진:중앙포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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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근대화 시작은 강화도조약(1876년)이다. 외국 문물이 유입돼 거래 품목이 다양해졌다. 시장은 커졌고 상사(商社)가 상인(商人)을 대신했다. 상사가 이 땅에 등장한 최초의 중소기업이다. 이후 가내 수공업을 벗어난 공장과 기업이 등장했다. 일제 강점기였지만, 1938년 기업 수는 2273개에 달했다. 아쉽게도 중소기업의 성장은 여기까지였다. 일본은 중·일 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치렀다. 전쟁을 위해 국책회사를 설립하고, 기업을 흡수했다. 한국기업은 몰락의 길을 걷는다. 이 기간 의미 있는 결실은 삼성, 현대, LG가 닻을 내렸다는 점이다.한국전쟁 이후 경제는 딜레마에 빠진다. 부흥과 안정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했다. 피해복구는 절실했지만, 예산은 부족했다. 세율 인상과 통화량 확대가 불가피했다. 물자가 부족한 데 통화량이 증가하니 물가는 치솟았다. 때문에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심각했다. 이에 이승만 대통령은 취임식에서 중소기업 육성을 천명한다. 그리고 ‘중소기업육성 대책 요강’을 발표한다. 이 ‘요강’은 가치가 있다. 정부가 처음 만든 중소기업 정책이라는 점, 중소기업 육성을 경제 정책으로 인정한 점, 성장보다 보호의 관점으로 접근한 점이다.19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등장한다. 산업화의 시작이다. 당시 재정은 전체 기업을 대상으로 하기에 한계가 있었다. 정부는 한정된 자원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분배할 수밖에 없었다. 철저하게 경제의 관점, ‘선택과 집중’으로 접근해야 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기업에 투자를 집중했다. 당시 대기업은 음식품, 피혁, 고무 등 중소기업 시장에 침투했고, 독과점을 형성했다. 이를 바로잡고자 정부는 ‘중소기업사업조정법’을 제정한다. 이후 13년 동안 사업조정은 한 건도 이뤄지지 않았다. 관심만 있었던 시대상이 보인다.마침내 66년 ‘중소기업기본법’이 제정됐다. 이전만 해도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작은 기업을 의미했다. 이제 중소기업은 처음으로 법적인 이름을 갖게 됐다. 이 결과 2만4112개 중소기업과 152개 대기업이 탄생한다. 73년 정부는 중화학공업화를 선언한다. 당시 재정기금의 50% 이상, 제조업 대출자금의 80% 이상을 중화학공업에 집중했다. 중소기업의 자금난은 심해졌다. 그러나 중화학공업화는 중소기업에 기회였다. 대기업과 납품 관계가 구축됐기 때문이다. 중화학공업은 여러 부품이 모여 하나의 최종재가 된다. 이에 정부는 ‘중소기업계열화촉진법’을 제정하고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수직계열화로 분업체계를 만든다. 즉, 중소기업이 부품(중간재)을 만들어 대기업에 납품하고 대기업은 제품(최종재)을 만들어 수출하는 그런 체계다. 산업화 과정에서 중소기업이 역할을 부여받은 것이다.그러나 계열화 구축은 더뎠다. 오히려 대기업이 스스로 계열사를 세우거나 중소기업을 인수했다. 1974~78년 4년 동안 현대는 22개, 삼성은 9개, 대우는 25개, 럭키금성은 26개 계열사가 늘어났다. 여기에 석유파동이 겹쳤다. 대기업은 휘청거렸지만, 중소기업은 곤두박질쳤다.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격차가 벌어질 대로 벌어졌다.
산업화의 밑단을 책임진 중소기업이즈음 등장한 전두환 정부는 정의사회 구현을 내세운다. 대·중소기업 격차를 해소하는 것도 전두환 정부가 내세운 정의 중 하나였다. 중소기업 정책이 쏟아졌다. 그리고 중소기업 정책의 패러다임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바로 보호와 육성이다. 그동안 중소기업 정책은 미미했지만 경제의 관점이었다. 비로소 중소기업 정책에 정치의 관점이 깊숙이 개입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공식 석상에서 중소기업을 언급한 것은 다섯 번에 불과했다. (정치적 슬로건에 불과했다는 평을 받지만) 정의를 내세운 대통령이 산업화를 시작한 대통령보다 중소기업에 관심이 많았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일이었다.어찌 됐던 산업화를 시작한 후 한국 경제는 고도 성장을 이뤘다. 대기업, 중화학공업, 수출이라는 전략이 맞아떨어졌다. 여기에 중소기업은 납품하며 분업체계에서 보완 역할에 충실했다. 성장의 몫은 적절히 분배됐다. 대기업의 수출이 증가하면 납품 중소기업의 매출도 늘었다. 중소기업 근로자의 소득도 나아졌다. 이를 소위 ‘낙수효과’라 한다. 이런 구조와 효과는 별 탈 없이 지속한다. 적어도 글로벌 금융위기 전까지 말이다.외환위기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중소기업은 양적 팽창을 거듭한다. 구조조정으로 직장을 떠난 대기업 근로자들이 너도나도 창업에 나섰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보기술(IT) 산업이 성장하면서 많이 늘어난 벤처기업도 한몫했다. 1999~2003년 중소기업은 32만 개나 증가했다. 이후 중소기업 수는 지속해서 증가한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중소기업은 처음으로 300만 개를 돌파한다. 1966년 2만4112개였던 중소기업이 오늘날 354만 5473개가 됐다. 60여 년 사이에 150배가량 증가한 수치이다.그러나 글로벌 금융위기는 다른 문제를 낳았다. 단순히 경제 문제는 아니었다. 위기를 자초한 이들은 ‘1%의 가진 자’였다. 그러나 그들은 망하지 않았다. 손해를 본 사람은 ‘99%의 덜 가진 자’였다. 1%를 위한 공적자금은 99%의 세금에서 나왔다. 경제적으로 부당했고, 불평등했다. 99%는 폭발했다. 부당함과 불평등은 사회의 분절로 이어졌다.한국은 다소 양상이 달랐다. 이런 분절이 대기업(1%)과 중소기업(99%)의 갈등으로 불거졌다. 당시 정부가 동반성장을 추진한 배경이다. 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동반성장은 경제민주화로 옮겨갔다. 중소기업 정책에 정치의 관점이 강하게 작용했다. 불행히도 경제민주화는 선거용에 그쳤다. 그래서 경제민주화는 여전히 진행형이다. 조만간 19대 대통령 선거가 있다. 경제민주화는 선거의 중심이 될 듯하다. 그래서 중소기업이 아직도 중심에 있다.
필자는 동아대 경제학과 교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