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닭해의 단상(斷想)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김경원 세종대 경영대학원장
필자의 지인은 제법 큰 치킨집을 운영한다. 얼마 전 광고 전단지에 메뉴를 올렸는데 인쇄소의 실수로 ‘순살 치킨’이 ‘순실 치킨’으로 찍혀 나갔다고 한다. 획을 하나 빼먹은 것이다. 큰 실수로 낭패를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날 오후부터 주문이 마구 몰려 오더란다. 그 후에도 주문이 폭주하여 아예 이 메뉴를 고정시킬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재주문하는 고객들의 반응은 “씹어 먹는 맛이 일품”이라고 했다는 말도 덧붙이면서.

닭 이야기가 나왔으니 좀더 이야기해보자. 닭은 약 8000년 전부터 가축화되었다는 것이 정설 같다. 그 유래는 동남아시아, 중국 남부, 인도 기원설이 유력하다. 가축화된 닭은 인류의 식량문제를 해결하는데 지대한 공헌을 해왔다. 닭은 키우기 쉽고 번식력도 좋은데다 고기뿐 아니라 완전식품인 달걀도 많이 낳기 때문이다. 만약 닭의 존재가 없었다면 아마도 인류는 아직도 식량, 특히 단백질 공급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이래서인지 지금도 전 세계적으로 200억 마리 이상의 닭이 사육되어 인류가 생을 지탱하는데 아주 큰 몫을 해주고 있다. 한국에서도 닭에 대한 수요와 기호는 크다. ‘치느님’라는 말도 있을 만큼 ‘치맥(치킨+맥주)’의 인기는 여전해서 이웃나라에까지 열풍이 전파되고 있다. 근래에는 직장에서 퇴직한 이들에게 창업 아이템으로 활로를 열어주는 등 일자리 창출의 일등 공신 역할도 하고 있다.

닭은 식량 측면 이외에도 인류의 정신세계 발전과정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여러 종교와 설화에서 다산의 상징으로, 새 아침을 알리고 어두움을 물리치는 척사(斥邪)의 상징으로도 쓰여왔다. 기독교에서도 닭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예수는 회개하지 않는 예루살렘을 질책하며 “암탉이 병아리를 날개 아래 모으듯이 내가 몇 번이나 네 자녀를 모으려고 했던가”(마태 복음 24장)라고 했다. 베드로는 닭이 울기 전에 예수를 세 번 부정한 후 이를 크게 후회하고 통곡한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9세기에 교황 니콜라스 1세는 모든 교회의 첨탑에는 닭의 형상을 설치하라는 칙령을 발표하기도 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일부 이어져 오는 전통이다. 또한 닭은 용맹의 상징이기도 하다. 닭이 가축화된 것은 서로 싸움 시켜 구경하려는 목적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을 정도다. 과연 수탉은 거느리는 암컷들을 지키려 목숨까지 건다. 이태리의 어느 부대는 아직도 헬멧에다 용맹의 상징으로 수탉 깃털을 매단다.

하지만 닭에게 긍정적인 이미지만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에서도 ‘치킨’은 겁쟁이를 지칭하는 은어다. 서로 마주보고 자동차를 몰아 먼저 피하는 쪽이 치킨이 된다. 닭은 지능도 낮은 편이어서 한국에서도 멍청한 사람은 ‘닭 대가리’, 멍청한 짓은 ‘닭 짓’이라고 한다. 요즘 청문회·재판장에 나가 ‘기억이 없다’, ’모른다’라고 일관하는 증인들을 앞의 별칭으로 부르는 댓글이 인터넷 상에서는 난무한다.

닭의 해가 왔는데 정작 주인공인 닭은 조류독감(AI) 때문에 수천만 마리가 살처분 되는 등 수난을 겪고 있다. 닭이 없어지니 달걀도 귀해져서 값은 뛰고 긴급수입도 이루어지고 있다. 새해의 주인공이 수난을 당해서일까. 설이 지났는데도, 새해 느낌이 잘 안 드는 것 같다. 탄핵 정국으로 나라가 참으로 뒤숭숭하다. AI라도 지나가면 이 나라가 안정을 찾을지도 모른다면 엉뚱한 상상일까.

1372호 (2017.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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