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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5) | 최영과 우왕] ‘고려의 수호신’ 최영은 왜 끝내 실패했을까?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우왕, 충성심과 힘 가진 최영 제대로 활용 못 해 … 무능한 보스엔 유능한 참모도 무용지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최영 장군의 흉상.
여기 한 신하가 있다. 백성들의 추앙을 한 몸에 받는 백전불패의 명장으로 강직하고 청렴하다. 임금에 대한 충성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나라를 걱정하고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도 크다. 어디 그뿐인가. 권력의 향방을 좌우할 정도의 무력을 갖고 있어 난다 긴다 하는 권세가들도 그의 눈치를 본다. 왕실과 국가를 떠받치는 버팀목 같은 신하. 이런 신하의 보좌를 받는다면 그야말로 두려울 것이 없었을 것이다.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하라’는 잠언으로 유명한 최영(崔瑩, 1316~1388년) 장군, 그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하면, 이러한 장점에도 최영은 실패했다. 단순히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그가 모셨던 주군 우왕(禑王, 재위 1374~1388년)은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가 평생을 바쳐 지켰던 고려도 멸망했다. 그도 처형당한다. 물론 이 실패가 그 혼자만의 책임은 아닐 것이다. 여러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고 개인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었던 역사의 흐름도 있었다. 하지만 그가 다르게 행동했더라면, 우왕이 그를 보다 잘 활용했더라면 어땠을까.

첫머리에서도 소개했지만 당시 최영의 존재감은 압도적이었다.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이인임도, 유학의 종주(宗主)라 불렸던 이색도, 신흥 무인세력의 중심인물이었던 이성계도 그와 같은 영향력을 갖지는 못했다. 최영의 힘은 두터운 신뢰 자본으로부터 나왔는데 우선 그의 눈부신 전공 덕분이다. 그는 1362년(공민왕 11년) 안우, 이방실 등과 함께 홍건적을 격퇴하고 개경을 수복했으며 김용의 반란을 진압했다. 홍산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는 등 왜적이 침입할 때마다 달려가 물리쳤다.

최영은 나이가 들어서도 “왜구가 이처럼 포악하게 침략하니 신은 차마 백성들이 어육이 되는 것을 좌시할 수 없다”며 출전을 자원했다. 화살과 돌이 사방에서 날아와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크고 작은 모든 전투에서 공로를 세웠으며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고려사절요]가 “나라는 그 덕분에 평안하였고 사람들은 그 덕분에 혜택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듯이 최영은 국가의 수호신으로서 절대적인 신망을 받고 있었다.

청렴했던 최고 실력자

최영은 또한 청렴했다. 오랜 기간 병권을 쥐고 재상을 겸임했지만 뇌물과 청탁을 받은 적이 없었다. 누추한 집에 살며 쌀독이 자주 텅 빌 정도였던 그는 살찐 말을 타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을 보면 개돼지만도 못하게 여겼다고 한다. 최영은 평소 대신들이 재물을 축적하는 것을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는데 최고 권력자였던 이인임의 면전에서 “나라에 어려움이 많은데 명색이 수상(首相)이신 공께서는 어찌 이를 걱정하지 않고 재산을 늘릴 일만 생각하십니까?”라고 쏘아붙일 정도였다.

조정의 중심을 잡고 권력의 방종을 막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최영은 권세가들이 토지를 겸병하는 것을 금지하고자 노력했으며 상벌의 시행이 문란해져 있는 현실도 바로잡고자 했다. 왜적이 개경으로 쳐들어올까봐 두렵다며 너도 나도 천도를 주장했을 때에도 홀로 굳게 지킬 계책을 진언하였고, 그럼에도 임금이 듣지 않고 도읍을 옮기려 하자 “지금 천도하게 되면 농사를 방해하고 백성들을 힘들게 할 것입니다. 왜적들도 우리를 우습게 여기고 넘보는 마음을 갖게 될 것이니 나라는 장차 궁지에 빠질 것입니다. 이는 올바른 계책이 아닙니다”라며 철회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조정의 분위기는 최영의 뜻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최영도 “내가 밤새도록 나랏일을 생각하였다가 이튿날 아침에 동료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여러 재상들 중에 내 마음과 같은 이가 없으니 차라리 치사(致仕, 사임)하고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나을 것 같다”며 아쉬움을 토로한다.

그렇다면 과연 최영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을까. 학문이 짧고 융통성이 부족하며 독선적이라는 점들이 지적되지만 사실 이 자체가 큰 문제는 아니었다. “내가 이미 늙어서 사리에 어두우니 내 행동이 의리에 맞지 않는다면 청컨대 침묵하지 말고 늙은이를 일깨워 주시오”라고 말할 정도로 포용적인 태도도 가지고 있었다. 그보다는 총사령관이자 수석재상에 걸맞은 안목과 비전이 결여되었다는 점이 그의 한계였다. 국제정세는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지, 혁신의 방향은 어디를 향해야 하며 또 이를 위한 근본적인 처방은 무엇인지 최영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최영, 간신들의 전횡에 침묵

그는 국가의 혼란을 바로잡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지도 않았다. 물론 그가 우왕의 잘못된 행동과 난정(亂政)에 대해 침묵한 것만은 아니다. 우왕이 총애하는 하인들에게 벼슬을 내리려 하자 “소인(小人)이 관직을 얻게 되면 필시 제멋대로 굴게 됩니다”라며 반대했고, 우왕이 궁궐 밖으로 놀러 나가려 할 때에는 “지금 거듭해 기근이 닥쳐서 백성들이 제대로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또한, 농사철인 이 때 임금의 유희를 위해 백성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입니까”라고 간언했다. 한 번은 우왕이 사냥하면서 놀다가 밤늦게 들어오니 최영은 눈물이 가득 고인 채로 “지금 왜구들이 나라를 잠식하고 전제(田制)는 날로 문란해져 백성의 생활이 곤궁하니 언제 나라를 잃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상황이 이러한데 전하께서는 대신들과 국정을 의논하지 않고 소인배들과 친하게 지내시며 사냥에 절도가 없으니, 신은 장차 누구를 우러러보며 신하의 진분을 다하겠습니까”라고 진언했다고 한다.

문제는 이러한 최영의 노력이 임금 개인에 한정되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인임, 염흥방, 임견미의 전횡을 13년간이나 침묵하는 등 부패한 세력을 제거하거나 정치 환경을 바꾸고자 시도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인임과 협력관계를 유지하기도 했다. 본질을 바로잡지 못하니 결과가 나아질 리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최영이야 임금의 명령이 없어서 지켜보기만 했던 것이고 참다못한 1388년(우왕14년)이 돼서야 어명을 받아 이들을 제거했다지만, 대체 그동안 우왕은 무엇을 했던 것일까. 우왕이 진즉에 최영을 활용했다면 일거에 간신들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여기에 우왕이 이색을 위시한 유학자들을 적극 등용해 개혁에 나섰더라면 고려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왕은 끝까지 무능했다. 이후에도 우왕은 자신을 지켜주는 일에만 신경 쓰라며 최영의 힘을 사장시켰는데, ‘요동정벌’의 타당성과는 별개로 만약 우왕이 직접 출진해 정벌군을 지휘하겠다는 최영을 묶어두지 않았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전개되었을 지도 모른다.

요컨대 아무리 강한 힘과 충성심을 가진 참모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보스가, 그리고 참모 스스로 이를 잘 활용해 올바로 발휘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세상을 나아지게 만들 수 있는 힘을 가졌음에도 이를 쓰지 못하는 것만큼 안타까운 일은 없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81호 (2017.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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