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6) | 이성계와 무학대사] 권력·이권 무관한 비선 참모라면 ‘긍정적’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무학대사, 태조 이성계와 신뢰자본 형성 … 사심 없이 조언하는 참모 곁에 두어야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무학대사.
국사(國師)와 왕사(王師). 나라의 스승, 임금의 스승이라는 뜻의 이 칭호는 덕이 높은 고승에게 국가가 부여하는 최고위 승직(僧職)이다. 현실정치에는 참여하지 않지만 백성을 종교적으로 교화하고 제도하는 정신적 지도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직책은 불교 국가인 고려에서 주로 운영되었는데 유교 국가인 조선에서도 국사와 왕사를 지낸 승려가 있었다. 태조 때 각각 국사와 왕사에 봉해진 조구(祖丘, 생년미상~1395년)와 자초(自超, 1327년~1405년)가 그 사람이다. 훗날 승려들이 고위직에 제수될 때 신하들이 극렬히 반대했던 것에 비하면 이 둘에 대해서는 특별한 반발을 보이지 않았는데, 태조가 워낙 독실한 불교 신자이기도 했지만 백성의 대다수가 불교를 신봉하고 있는 상황에서 성리학 이념을 연착륙시키기 위한 과도기적 조치로 생각된다.

그런데 조구에 대해서는 천태종의 승려이고 궁중에서 설법한 적이 있으며, 죽었을 때 태조가 조회를 정지시키며 추모했다는 기록(태조4년 11월 14일)이 있을 뿐 그가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자료는 남아 있지 않다.

무학대사 법명은 자초

이에 비해 자초는 다르다. 실록에 종종 등장할 뿐만 아니라 야사에 남은 일화도 많다. 경복궁을 동향으로 짓지 않으면 이백 년 후에 큰 난리를 겪게 된다고 경고한 인물(경복궁을 남향으로 배치할 경우 좌청룡이자 맏아들을 상징하는 위치에 해당하는 낙산이 다른 산들에 비해 산세가 약하기 때문에 왕위계승 과정에서 적장자들이 불행해질 것이라고 예언했다고도 한다), 도읍을 정할 곳을 살피다가 (도선대사의 현신으로 추정되는) 늙은 농부로부터 10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해서 ‘왕십리’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인물, 이성계에게 왕이 될 것이라는 꿈 해몽을 해주었고 또 ‘부처 눈에는 부처밖에 보이지 않고 돼지 눈에는 돼지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답했던 인물. 우리에게 무학대사로 알려진 이가 바로 자초다.

자초, 아니 무학대사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와 매우 각별한 사이였는데 주로 정신적인 안정을 돕는 존재였던 것으로 보인다. 풍수에 조예가 깊었기 때문에 도읍을 옮기는 문제 같은 경우에는 직접 자문 역할을 맡기도 했다. 태조가 천도를 위해 계룡과 한양 등을 시찰할 때 그를 동행시켰고 그의 의견을 묻는 장면이 실록에 기재되어 있다(태조2년 2월 11일, 태조3년 8월 13일) .

무학대사와 태조의 유대관계는 소위 ‘함흥차사’에서도 잘 나타난다. 야사에 따르면 함흥으로 차사가 오는 족족 태조가 활을 쏘아 죽이거나 억류시켰기 때문에 ‘함흥차사’는 한 번 가면 깜깜무소식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당시 태조는 1~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태종 이방원에게 크게 분노해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이자 태종의 이복형제이기도 한 방석과 방번을 죽이고 아끼는 동지 정도전까지 제거한 태종을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태조는 자주 왕궁을 떠나는 것으로 불쾌한 심정을 표시하곤 했다. 한 번은 태종이 알지 못하도록 한밤중에 보개산(경기도 연천)으로 떠났고(태종1년 3월 17일), 금강산에 갔다가(태종1년 윤3월 11일) 함경도 안변에 도착해 그곳에 오래 머무르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태종1년 4월 16일). 소요산(경기도 동두천)에 별궁을 짓고 거기에 상당 기간 거처한 적도 있었다.

하지만 1402년(태종2년) 11월의 함흥 행은 사안의 중대한 정도가 차원이 다른 것이었다. 태조가 움직이자마자 안변 부사 조사의가 태조에게 충성하고 살해된 폐세자 방석의 원수를 갚겠다는 명분으로 거병했기 때문이다(태종2년 11월 5일). 실록은 침묵하고 있지만 태종이 보낸 진압군이 맹주에서 조사의의 군대에게 대패한 날 태조가 맹주로 향했다는 것으로 볼 때(태종2년 11월 18일), 태조가 조사의를 지원하고자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태종은 태조의 개입을 차단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했는데, 창업군주이자 아버지의 인정을 받지 못한 것만으로도 왕권의 정통성이 위협받는 상황에서 자칫 부자간의 골육상쟁이 벌어지고 내전이 발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계속 사람을 보내 용서를 구하고 환궁해줄 것을 간청했지만 태조가 꿈쩍도 하지 않자 마지막 카드로 무학대사를 꺼낸 것이다. ‘무학은 태상왕께서 공경하고 믿는 자이기 때문에’ 태조를 설득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이다(태종2년 11월 9일).

태조, 무학대사 설득에 귀경길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태조를 찾아간 무학대사는 “빈도가 전하와 더불어 안지가 수십 년이니 그저 전하를 위로하기 위하여 찾아왔을 뿐”이라며 며칠 동안 계속 태종의 단점만 이야기하고 환궁이라는 단어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고 한다. 태조의 기분이 풀리자 그제야 “방원(태종)이 진실로 죄가 있으나 전하께서 사랑한 아들은 이미 죽고 다만 이 사람이 남아 있을 뿐이니 만약 이 아들마저 끊어 버리신다면 전하가 평생에 걸쳐 애써 이룬 대업을 장차 누구에게 맡기시겠습니까. 남에게 부탁하는 것보다는 피붙이에게 주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원컨대 신중히 생각해 보소서”라고 달랬다. 태조의 역성을 들어주며 감정을 가라앉히게 한 후 현실을 이해시킨 것이다. 마음에 들지는 않겠지만 다른 성씨에게 나라를 넘겨줄 것이 아닌 이상 태종 외에 대안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결국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의 수행을 받으며 귀경길에 오르고(태종2년 12월 8일), 이후 태종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게 됐다. 물론 태조의 환궁은 조사의의 군대가 궤멸하는 등 대세가 결정되었기 때문이지만 무학대사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갔다면 태조의 태도 변화까지 이끌어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무학대사가 일을 매끄럽게 성사시킬 수 있었던 것은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태조가 공경하고 믿는 신뢰자본이 두터웠기 때문이고, 출가자로서 정치적인 이해관계로부터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무학대사는 사심 없이 자신을 위한 조언을 해 주는 존재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태조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인 것이다.

이처럼 무학대사와 같은 유형의 참모는 보스와 개인적인 신뢰가 깊고, 권력이나 이권과 관계가 없으며, 중간 단계를 거치지 않고 보스와 직접 대화할 수 있는 위치라는 점에서 보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가 다른 참모보다 훨씬 수월하다. 조정에 있지 않고 민간에 있기 때문에 현장의 상황이나 생생한 여론을 전달해 줄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참모들은 흔히 비선으로 활동한다는 점에서 공적인 의사결정 과정을 무너뜨리고 정치의 투명성을 저해할 우려가 있다. 무학대사의 경우 왕사로 봉해지면서 국정과 관련된 그의 활동은 모두 공개적으로 이루어졌다. 단점을 예방하면서 장점을 최대한 살렸다는 점에서 참고할만한 부분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82호 (2017.05.01)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