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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셋, 한국경제 | 4차 산업혁명 올라타자] 대학을 ‘고시촌’ 아닌 ‘창업 전진 기지’로 

 

미 스탠퍼드대 모델 벤치마킹해야... 기업가정신 관련 과목·시설 대폭 확충도 시급

박용근(37) KAIST 물리학과 교수는 현직 교수이면서 벤처기업의 최고기술책임자(CTO)다. 2015년 9월 살아 있는 세포를 3차원 영상으로 실시간 관찰할 수 있는 홀로그래피 현미경 ‘HT-1’을 개발·제작하는 벤처기업을 만들었다. 박 교수의 현미경은 줄기세포와 면역치료 등 기존의 관찰 방식으로는 힘들었던 연구와 치료를 할 수 있게 했다. 이에 힘입어 창업 6개월 만인 지난해 초부터 미국·일본 등으로 HT-1 수출이 시작됐다.

박 교수가 겸직으로 창업을 할 수 있었던 것은 ‘KAIST 창업원’ 덕분이다. 박 교수는 창업원에서 1년 동안 시제품을 만들고 창업 동료를 모으고, 다양한 창업 지원을 받았다. 박 교수는 “앞으로도 학교에서 연구를 하면서 CTO로서 회사 일에도 참여할 것”이라며 “대학은 창업이든 연구든 더 큰 부가가치를 만들어내는 고급 인재를 창출하는 곳이 돼야 한다는 게 내 소신”이라고 말했다.

KAIST의 연구·창업 융합 실험


KAIST가 4차 산업혁명의 전진기지로 거듭나고 있다. 대표적 사례가 2014년 4월 문을 연 창업원이다. 이곳에서는 학내·외 학생·교수들의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한 아이디어를 발굴해 스타트업(창업 초기기업)으로 키워준다. 창업 준비공간(스튜디오)을 제공하고 다양한 창업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미국 실리콘밸리 등에서 창업 경험이 있는 교수들이 멘토 역할을 해주는 것은 KAIST 창업원의 강점이다.

창업원을 이끄는 김병윤(64) 물리학과 교수 역시 KAIST 교수로 임용된 이후 한국과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창업한 경험이 있다. 지난 3년간 창업원을 통해 창업한 스타트업은 모두 60개에 달한다. 이 중 75% 이상(46개)이 학생 창업이지만, 토모 큐브처럼 교수가 창업한 경우도 14건에 달한다. 김 교수는 “창업원에서는 학생·교수의 창업뿐 아니라 연구 성과로 나온 기술을 기업에 이전하거나 도움을 주는 역할도 한다”고 말했다.

KAIST는 지난해 2학기 창업원과 연계한 ‘창업석사’ 과정 ‘K스쿨’도 열었다. K스쿨은 석사 과정이지만 졸업 논문을 쓰지 않아도 되고 1년이면 졸업할 수 있다. 이곳에서는 기존 대학원의 각 학과 전공 지식과 함께 재무·회계, 투자 유치 방법 등 창업 관련 지식을 동시에 배운다. 창업 아이템 발굴부터 시제품 제작, 마케팅까지 창업과 관련한 실무도 익힐 수 있다. 창업 경험이 많은 전문가가 수업을 지도하고, 학생들은 아이템에 대해 전문가는 물론 동문 창업가들의 조언을 받을 수 있다. 또 기업의 문제를 해결하는 팀 프로젝트 수업으로 실전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이희윤(60) KAIST 연구부총장은 “K스쿨은 과학기술과 기업가 정신을 결합한 공학기술 혁신을 추구한다”고 말했다.


KAIST는 미국 서부 명문 스탠퍼드대를 롤모델로 삼고 있다. 6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스탠퍼드대는 세계 어떤 곳보다 창업 열풍이 뜨겁다. 1891년 설립해 최근까지 14만여 명의 졸업생이 4만 개가량의 기업을 창업해 560만 명의 고용을 창출했다. 이 기업들의 1년 매출은 2700조원으로 한국 국내총생산(GDP)의 두 배가량 된다. 구글·테슬라·HP·시스코·유튜브·넷플릭스·페이팔·인스타그램·스냅챗·링크트인·왓츠앱·야후 등 미국의 대표적 IT 기업뿐 아니라 나이키·갭·바나나리퍼블릭 등 소비재 기업들도 스탠퍼드대 동문들이 창업했다.

김병윤 KAIST 창업원장은 “‘대학에서 연구를 해야지 무슨 창업이냐’고 물으면 나는 ‘창업과 연구가 별개가 아니다’고 답해준다”며 “좋은 연구는 좋은 창업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국내 박사 인력의 70%를 보유하고 있는 대학이 4차 산업혁명의 전진기지가 돼야 한다”고 말했다.

중앙일보·JTBC의 국가 개혁 프로젝트 ‘리셋 코리아’ 4차산업혁명분과 위원들은 대학이 4차 산업혁명의 인재를 양성하는 전진기지가 되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모았다. 실리콘밸리에 뛰어드는 미국 스탠퍼드대 졸업생들처럼 과학기술을 바탕으로 창업에 나서거나 새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직업에 과감히 뛰어드는 인재를 키워야 한다는 뜻이다.

대학이 패자부활전 공간 역할해야


그러나 현실은 정반대다. 많은 국내 대학이 아직도 ‘2차 산업혁명’ 시대의 관습에 머물고 있다. 고교 시절 이과 최고의 학생들은 대개 의대에 간다. 교육부에 따르면 매년 2만 명 가까운 이공계 대학생들이 자퇴한다. 대부분 의학전문대학원 입학과 의대 편입을 준비한다. 대학은 각종 고시반까지 지원·운영하면서 학생들의 고시 열풍을 부추긴다. 융합의 추세와는 반대로 이공계와 인문대의 캠퍼스가 구분된 곳도 적지 않다. 분과장인 김태유 서울대 산업공학과 교수는 “기술 발전 적응력 등을 뜻하는 유동지능(流動知能·fluid intelligence)이 뛰어난 청년 인재들이 과학·첨단기술·산업디자인 등의 가치를 창출하는 직업을 택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4차 산업혁명의 물결에 올라타지 못하고 압도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해결책은 무엇일까. 첫째, 대학이 기업가 정신을 고취해야 한다. 최슬기 한국개발연구원(KDI) 교수는 “대학에 기업가 정신 고양과 창업을 위한 교과목·시설을 대폭 확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학생은 물론 교수들도 창업에 대한 인식과 지식이 부족하다는 판단에서다.

둘째, 대학이 패자부활전의 공간 돼야 한다. 김태유 교수는 “대학에 실직 또는 실패한 졸업생들을 위한 무상 재교육장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모교가 졸업생들을 위한 패자부활전의 공간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모든 학생에게 창업을 강조하는 것은 위험하다는 지적도 있다. 윤종록 정보통신산업진흥원장은 “개업과 창업은 구분해야 한다”며 “역량 있는 최고 엘리트들이 과학기술을 기반으로 창업에 나서야 부가가치 높은 성공을 거둘 수 있다”고 강조했다.

셋째, 대표이사 연대보증을 폐지해야 한다. 이석봉 대덕넷 대표는 “한번 실패하면 신용불량자로 떨어지는 현실 속에서는 아무리 좋은 기술과 아이디어가 있더라도 창업에 나서길 꺼린다”며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대표이사 연대보증금지법이 빨리 통과돼야 한다”고 말했다. 법인이 은행에서 대출받아도 대표이사는 무한정으로 연대 보증의 책임을 져야 한다. 전 세계에 한국만 남아 있는 악습이다.

넷째, 벤처엔 파격적인 스톡옵션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스톡옵션 지원도 파격적으로 해야 뛰어난 인재들이 벤처 창업에 나설 수 있다(정희선 세종대 교수). 미국 스탠퍼드대의 인재들이 박봉에도 벤처기업에 입사하는 것은 기업이 성공하면 스톡옵션 덕에 ‘대박’을 터뜨릴 수 있다는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현재 과세특례가 적용되는 벤처기업 임직원의 스톡옵션 행사가액의 합계를 3년간 5억원 이하로 제한하고 있다. 또 행사일로부터 1년 이내 처분하는 경우 소득세가 부과된다. 한국 벤처기업에 대박 사례가 없는 이유다.

1383호 (2017.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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