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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25) 중종과 조광조] 그토록 믿었건만 … 야속한 보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중종, 조광조 중용하다 갑자기 숙청 … 예측불허의 임금 믿고 따르는 신하 찾기 어려워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전남 화순 능주의 조광조 유배지.
‘신 등은 모두 자질이 망령되고 어설프며 우둔하지만 어지신 임금의 조정에서 성덕(聖德)을 입었기에, 오직 전하의 밝은 지혜만을 믿고 어리석은 마음을 죄다 말하여 뭇사람의 시기를 범하였습니다. 임금께서 계신 것만을 알고 다른 것은 헤아리지 않았으며, 오직 전하께서 요순 같은 군주가 되게 하고자 한 것뿐이니, 이 어찌 제 한 몸을 위한 것이었겠습니까? 하늘의 밝은 해가 비추듯 결코 다른 사심이 없었습니다. 신 등의 죄는 실로 만 번 죽어 마땅하오나 선비들에게 한 번 참화가 시작되면 훗날 국가의 명맥이 어찌 염려스럽지 않겠습니까? 전하께 말씀을 올릴 수 있는 길이 막혀서 저희들의 마음을 아뢸 방법이 없습니다. 잠자코 죽는 것은 차마 못하는 바이오니 바라옵건대 한번이라도 전하께서 친히 심문하여 주시길 허락하신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겠나이다.’ 1519년(중종 14년) 11월 16일, 전날 밤 전격적으로 체포되어 옥에 갇힌 대사헌 조광조, 형조판서 김정, 대사성 김식 등은 연명으로 상소를 올렸다. 에둘러 표현하기는 했지만 이 상소의 핵심은 ‘전하의 밝은 지혜만을 믿고’, ‘임금께서 계신 것만을 알고’에 있다. 그동안 일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매끄럽지 못한 면이 있고 또 다른 사람들의 질시를 사기도 했지만 자신들은 임금만 믿고 걱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투옥되었으니 당혹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과거 급제 후 초고속 승진

실제로 중종은 조광조(趙光祖, 1482~1519년)를 위시한 이들 개혁세력을 적극 후원한 바 있다. 중종 10년 8월, 문과 전시(展試, 왕이 주관하는 최종시험)에 합격한 조광조는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리들을 모두 파직하라는 상소를 올리며 일약 조야의 주목을 받는다(종종10년 11월 22일). 언로를 수호해야 할 두 기관이 그 책임을 방기하고 오히려 언로를 훼손하여 자유롭게 말하는 분위기를 해치고 있다는 것이다. 중종은 이런 조광조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그는 이듬해 홍문관 수찬으로 승진했고 직제학을 거쳐 대사헌에 올랐다(중종14년 5월 16일). 요즘으로 말하면 고시에 합격한 지 4년 만에 검찰총장이 된 것으로 이는 중종의 지시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중종은 김정·김식·김구 등 조광조와 가까운 사림들을 고속 승진시켰는데, 이는 조광조를 중심으로 일군의 세력을 구축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종은 현량과(賢良科) 실시와 소격서(昭格署) 폐지 등 이들의 요청을 대부분 수용해주었다.

그런데 조광조가 ‘위훈삭제(僞勳削除)’를 추진하면서 중종과의 관계는 흔들리게 된다. 위훈삭제란 중종반정의 공신 작위가 지나치게 남발되었으므로 자격을 재심사해 부자격자의 작위를 취소하고 상으로 내려진 토지와 노비를 환수하겠다는 것을 말한다. 이는 훈구파의 거센 반발을 샀다. 조정 내 안정과 균형을 유지하고자 했던 중종으로서는 탐탁지 않은 상황이었을 것이다. 더욱이 반정공신 문제를 건드리는 것은 반정으로 옹립된 중종 자신의 권위를 위협할 수도 있는 문제였다. 이에 중종은 조광조가 선을 넘었다고 판단하고 그를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중종이 그동안 조광조 등을 지원해 준 이유가 이들의 개혁에 공감해서라기보다는 이들을 통해 훈구세력을 견제하는 등 정치적 필요 때문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그리하여 중종은 1519년 11월 15일, 조광조 등을 구금시켰는데 절차를 무시한 채 비밀 군사작전을 처리하듯 일을 진행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붕당을 맺고 저희에게 붙는 자는 천거하고 저희와 뜻이 다른 자는 배척하였으며…(중략)…과격한 논의로 국론과 조정을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게 했으니’ 그 죄를 엄히 물으라는 교지를 내린다. 그러자 영의정 정광필은 중종에게 거듭 이렇게 말했다. “평소에 저들을 제재하지 못하였으니 신들에게 죄가 있나이다. 그러나 저들은 전하께서 하고 싶은 말을 다하도록 하셨으므로 알면 말하지 않은 것이 없었고 생각이 있으면 반드시 아뢰었습니다. 개혁을 하려면 과격한 일이 없지 않을 수 없습니다. 더욱이 이들에게 과격한 잘못이 있게 된 것은 임금께서 너그러이 용납하셨기 때문입니다. 저들은 모두 임금께서 뽑으시어 요직에 올린 사람들로 하루아침에 죄를 주는 것은 함정에 빠뜨리는 것과 비슷합니다.”(중종14년 11월 16일).

이와 같은 정광필의 말 속에는 사태의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 가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조광조 등은 중종이 발탁해 중임을 맡긴 사람들이고, 중종은 이들이 하고자 하는 것은 모두 다 들어주며 지원해왔다. 만약 이들에게 과격한 잘못이 있다면 임금의 뜻도 그와 같을 것이라 믿고 행동한 것뿐이다. 따라서 다른 누구도 아닌 중종이 갑자기 그것이 죄라며 처벌한다면 과연 옳겠냐는 것이다. 하지만 중종은 고집을 꺾지 않았고 1519년 12월 20일, 조광조는 유배지인 전라도 능주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 하였고, 나라 걱정하기를 집안 걱정하듯 하였다. 밝은 해가 이 세상을 내리 비추니, 거짓 없는 내 마음을 환히 밝혀 주리라’는 시를 남긴 채.

신하의 신뢰 헌신짝처럼 버린 중종

훗날 선비들은 조광조를 두고 순수한 열정만을 가지고 현실을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에 좌절했다는 아쉬움을 표시하는데 이는 문제의 핵심에서 벗어난 것이다. 상황을 이렇게 만든 책임은 어디까지나 중종에게 있다. 마음에 드는 신하를 발탁했으면 그 신하가 임무를 잘 수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뿐만 아니라, 혹시라도 잘못을 범하거나 지나치지 않도록 제어해주는 것이 임금이 해야 할 일이다. 평소에는 아무 소리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심지어 신하가 하는 일을 흡족해 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를 질책하며 제거하려 드는 것은 전혀 임금답지 못한 태도다.

더욱이 이 과정에서 신하와의 신뢰를 저버린 것은 중종의 큰 잘못이 아닐 수 없다. 중종은 신하를 믿고 아끼는 것처럼 하다가 하루아침에 표변해버렸고 모든 것을 신하의 잘못으로 떠넘겼다. 법과 절차를 무시한 채 암암리에 신하를 제거하려 들었고 신하에게는 항변할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신하로서는 믿었던 임금에게 배반당한 셈이다. 조광조가 우리 임금께서 이러실 리가 없다는 말을 계속 되뇐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문제는 이러한 중종의 행태가 그 후에도 이어졌다는 점이다. 대표적으로 중종 후기에 국정을 장악했던 김안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김안로는 권력을 전횡한 간신으로 훌륭한 선비인 조광조에 감히 비교할 바가 못 된다. 다만 큰 권한을 맡기고 총애하는 것처럼 보이다가, 아무런 질책이나 제어를 하지 않다가 어느 날 갑자기 숙청시킨 과정은 동일하다. 한마디로 중종은 신하와의 신뢰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고, 임금으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채 방치하다가 마음에 안 들면 제거해버렸던 것이다. 임금이 이런 모습을 보이니 중종 대에 임금을 믿고 헌신하는 신하를 찾아보기 힘들었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1394호 (2017.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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