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umn

김정은의 평화공세가 기만전술만은 아니다 

 

김영희 안보·국제문제 칼럼니스트(前 중앙일보 대기자)
김정은의 신년사가 나오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비핵화나 한반도 평화를 바라기보다는 평창 동계올림픽을 평화롭게 치를 수 있을지 걱정해야 했다. 김정은이 신년사에서 약속한 대로 평창 올림픽에 대규모 선수단·응원단·관현악단·최고위 대표단을 파견해 지난 한 해 그렇게 뜨겁던 전쟁 위기는 회담과 악수의 홍수로 유턴을 했다. 난제가 얽힌 중간역을 건너 뛰어 4월의 문재인-김정은, 5월의 김정은-트럼프 정상회담으로 직행하게 됐다. 외교사에 드문 일이다.

대화에 대한 회의론이 무성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핵 미사일 실험에 열중하던 김정은이 왜 대화로 돌아섰는가. 김정은은 자진해서 핵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김정은 체제 붕괴가 비핵화의 유일한 길이라는 붕괴론(Collapsism), 최대의 압박과 제재로 김정은 정권을 고사시켜야 한다는 강경론,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을 외과 수술적(Surgical)으로 파괴하자는 선제 공격론이 서울과 워싱턴의 북핵 담론을 주도하는 듯했다. 그들의 정상회담 회의론은 김정은이 대화로 돌아선 것은 위장 평화공세라는 것을 전제로 한 것이다. 김정은의 핵·미사일 완성을 위한 시간 벌기 기만전술에 넘어 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김정은의 태도변화가 위장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대화 제의가 진정일 수도 있다. 문재인 정부와 트럼프 정부는 김정은의 의도가 진정일 가능성에 판돈을 걸었다. 옳은 판단이다. 왜 그런가를 살펴 보자. 첫째, 김정은이 내민 올리브 가지를 기만의 지팡이라고 일축해 버리면 우리에게 남는 옵션은 지난해와 같은 일촉즉발의 위기의 연속 아니면 대북 선제공격뿐이다. 미국이 동해상에 배치된 항공모함전단의 구축함에서 토마호크 미사일을 발사해 북한의 핵·미사일 시설을 공격하면 북한 핵·미사일은 불능화가 되고 한반도 위기는 해소되는가. 결과는 정반대다. 미국의 토마호크 미사일은 북한 전역에 분산 은닉한 북한 핵·미사일의 절반도 파괴하지 못한다. 90%를 파괴한다고 해도 북한은 남은 10%로 한국·일본뿐 아니라 미국에 대해서도 보복 공격을 가할 수 있다.

개성 송악산 북변 갱도에 배치된 300여문의 장사정포가 서울과 경기 북부를, 그들의 말대로 불바다로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다. 성주에 배치된 말썽 많은 사드가 북한의 어디선가 날아올 스커드 미사일을 요격한다고 해도 요격 성공률이 100%가 아니라면 남한 중부지역 이남의 파괴는 피할 방법이 없다. 더 무서운 것은 북한이 보유한 20척의 잠수함, 60척의 잠수정이다. P-3초계기의 지원을 받아도 한국 해군의 15척의 잠수함으로는 그들이 독도를 우회해 포항·울산·부산으로 침투해 미 증원군이 입항하는 부산과 울산의 항만시설을 파괴하는 것을 모두 저지할 수는 없다. 북한 잠수함들은 SLBM(잠수함발사 탄도미사일)으로 북쪽을 향하고 있는 사드의 배후 지역과 동남해안의 원자력 발전소를 노릴 것이다. 잠수정은 주요 시설 파괴에 동원된다.

그래서 김정은의 대화 의지가 진지하다고 일단 전제하고 대화를 하는 것이다. 김정은이 기만전술로 대화를 제의했다고 해도 남북, 북미 정상회담을 하는 동안 문재인과 김정은, 김정은과 트럼프가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하면서 김정은이 바라는 체제의 안전보장과 경제적인 보너스를 제시한다면 김정은의 생각이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하는 동안에도 대북제재는 계속되고 최강의 대북 군사적 억지력은 유지되기 때문에 김정은의 평화 제스처가 위장으로 밝혀지는 순간 한국과 미국은 더욱 강화된 제재와 억지력으로 복귀하면 된다. 국제사회의 각광을 받으면서 열린 두 개의 정상회담이 김정은의 기만술로 결렬된다면 김정은은 회복할 수 없는 국제적인 불신을 받게 된다. 이런 이유에서 나는 김정은의 대화 의지가 진지하다고 믿는 데 한 표를 던진다.

대화의 목표는 한국에게도, 미국에게도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 정착이다. 비핵화가 한 발 앞서고 나란히 또는 반걸음 뒤에서 평화가 따라가는 협상 프레임이 될 것이다. 김정은은 평창 올림픽 때 이미 핵·미사일 실험에 모라토리움(일시중단)을 걸었다. 그러나 모라토리움은 전체 비핵화 과정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핵이라고 해도 과거·현재·미래의 핵이 있다. 과거의 핵은 이미 만들어 보유하고 있는 핵, 현재의 핵은 지금 개발 중이거나 보유한 핵, 미래의 핵은 1960년대부터 꾸준히 축적한 핵 기술과 그것으로 더욱 세련된 핵무기를 만들 잠재력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핵 동결이라는 입구로 들어가서 완전한 비핵화라는 출구로 나오는 비핵화 협상전략을 구상하고 있다. 비핵화의 매 단계를 검증하고 다음 단계로 나가야 하는 것은 두 말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북한 핵·미사일 과학·기술자들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술, 현재 보유한 핵을 인정하는 동결이 북한에게는 가장 유리한 협상의 지렛대인 동시에 남한에게는 협상이 결렬되거나 오랜 교착상태에 빠질 경우의 최대 불안 요소다. 동결은 북한이 현재 보유한 핵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동결로 들어가서 완전 비핵화로 나온다는 입구→출구론은 한국에는 리스크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유 때문에 한·미 전략가들의 물 샐 틈 없는 협력과 정책 조율을 통한 정교한 협상 로드맵이 필요하다. 다행인 것은 이번 협상은 6자회담 때와는 달리 김정은과 트럼프라는 충동적이지만 큰 거래를 할 줄 아는 최고지도자들이 만든 큰 틀의 개념적인 돌파구가 실무자들에게 내려가는 하향식(top-down)인 것이다. 실무자·전문가들의 협상 결과가 위로 올라가는 상향식(bottom-up)은 세부사항(detail)의 함정에 빠져 최종 목표에 이르는 것은 백년하청(百年河淸)이다. 2005년 9·19 공동성명처럼 실무자들이 어렵사리 합의한 해결책도 최고지도자가 단숨에 뒤집어 버릴 수도 있다. 처음부터 최고지도자의 의지가 반영되지 않은 합의였기 때문이다. 이번은 순서가 정반대라는 데 기대를 건다.

동결의 단계를 지나 완전하고, 검정가능하고, 불가역적인, 핵 폐기(CVID)에 이르는 단계를 전후해 북미 수교가 실현되고 현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교체한다. 북한 경제는 북일 수교에서 들어올 200억 달러 규모의 배상금,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조달할 수 있는 500억~1000억 달러의 장기 저리의 차관에 힘입어 22개의 경제특구를 중심으로 연간 10% 이상의 성장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남북 간에는 담대한 화해·교류·협력의 틀이 만들어져 남북경제공동체의 윤곽이 드러날 것이다. 남북경제공동체는 북·중·러 국경지대에 설치될 기념비적인 동북아경제공동체를 시야에 둔 것이다. 남북한과 중국과 러시아, 일본의 경제가 북·중·러 국경지대에 형상화될 때 비로소 한반도의 항구적인 평화가 담보되는 것이다. 경제적으로는 북한 경제와 북·중·러 접경지대의 경제공동체는 한국 경제의 블루오션이 될 것이다. 평창에서 시작된 기적이 현실이 되는 것이다. 김정은의 대화 제의를 기만이라고 차 버리는 것은 이런 기회를 테스트 해보지도 않고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이다.

한반도 문제는 범위를 좁게 잡아도 동북아 문제다. 미국은 말할 것도 없고 중국·러시아·일본의 참여와 지지 없는 한반도 평화는 사상누각이다. 그래서 중국과는 사드 이후의 앙금을 걷어내야 한다. 일본과는 위안부 문제를 안보와 분리해 애매모호하게 봉인해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신동방정책으로 한반도에 새로운 관심을 보이는 러시아도 한반도 문제에 적극 참여해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과도한 영향력 행사에 균형추 역할을 할 것이다.

1427호 (2018.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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