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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6) 초장왕의 비상] 몸을 낮추고 도약의 기회 엿보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방탕한 생활하며 충신과 간신 구분 … 관용의 용인술로 충성심 끌어내기도

풍몽룡이 정리한 [열국지(列國志)]는 춘추전국시대의 역사를 다룬 대하소설이다. 그만큼 방대한 시기에 걸쳐 수많은 인물이 등장한다. 특히 ‘동양의 그리스 신화’라 불릴 만큼 이야기의 보고이며 철학과 사유의 원형이 담겨있다. 작품의 배경은 불확실성이 극도에 달했던 시기다. 문명이 전환하고, 약육강식과 무한 경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정치가들은 부국과 혁신의 길을 모색했고, 사상가들은 인간과 공동체의 좀 더 나은 삶에 대해 고심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도 이와 다르지 않다는 점에서 지금 다시 [열국지]를 펼치는 의미가 있을 것이다.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왕은 나랏일에 관심이 없었다. “감히 간언을 하는 자가 있으면 용서하지 않고 주살할 것이다”라는 살벌한 경고문을 붙여 놓은 채, 매일같이 노는 일에만 몰두했다. 그렇게 3년이 지난 어느 날 대신 신무외가 알현을 청했다. “신이 도저히 풀 수가 없는 문제가 있어 대왕께 여쭙고자 왔나이다.” “무슨 문제이기에 그러오? 말해보시오.” “남쪽 언덕에 오색 깃털로 싸여 있는 큰 새가 있사옵니다. 하온데 이 새는 3년이 지나도록 날지도 울지도 않는다고 합니다. 신은 도저히 이 새가 무슨 새인지 알 수가 없사옵니다.” 왕이 웃으며 말했다. “과인이 그 새를 알고 있소. 비록 3년을 날지 않았으나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에 닿을 것이오. 비록 3년을 울지 않았으나 한 번 울면 사람들을 놀라게 할 것이오.” 신무외가 자신을 풍자한 것임을 안 임금은 조금만 더 기다려보라고 당부한 것이다.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에 닿을 것”

하지만 임금의 게으름과 방탕은 여전히 계속됐다. 그러자 이번에는 소종이라는 대신이 찾아왔다. 소종은 왕을 보자마자 대성통곡한다. “이제 신이 죽고 초나라도 망할 것이니 참으로 슬프옵니다.” 왕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째서 경이 죽는단 말이오? 초나라는 또 어째서 망한다는 것이오?” 소종이 대답했다. “오늘 신은 대왕께 간언을 올리고자 왔습니다. 대왕께서는 틀림없이 신을 죽이실 터이니, 신이 죽고 나면 이 나라에는 더 이상 간언을 할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리 되면 정치가 타락하고 망국에 이를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임금은 격노했다. “과인은 분명히 간언을 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고 했다. 간언을 올리면 죽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그대가 간언을 하니, 참으로 어리석은 짓이 아닌가?” 소종은 담담히 말했다. “신의 어리석음이 대왕의 어리석음만 하겠습니까? 지금 대왕께서 신을 죽이신다면 후세 사람들은 저를 충신이라 부를 것입니다. 그러나 대왕께서는 한 때의 즐거움에 빠져 만세의 이익을 내버리고 계십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더 이상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청컨대 죽음을 내려주시옵소서.”

그 순간 소종을 쏘아보던 임금이 갑자기 표정을 바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소종에게 정중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참으로 충언이오. 과인은 경의 말을 따를 것이오.” 임금은 곧바로 어진 신하들을 불러들이고 신무외와 소종에게 중책을 맡겼다. 권세가를 제압하고 부패한 관리를 축출했다.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업무에 몰두하여 국정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그 뿐만이 아니다. 총애하던 후궁 정희와 채녀를 물리치고 번희를 정실부인으로 봉했다. “과인이 사냥에 빠져 있을 때 오직 번희만 내게 그래서는 안 된다며 간언했기 때문이다.” 요컨대, 임금은 짐짓 방탕한 채 자신을 숨기며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누가 진짜 충신인지, 누가 능력이 있는 신하인지, 누가 나에게 진실한 말을 해 줄 사람인지를 가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초나라의 제 22대 군주이자 춘추시대의 세 번째 패자 장왕(莊王)의 이야기다.

이후 장왕의 활약은 눈부셨다. 한 번 날아오르면 하늘에 닿으리라는 그의 장담처럼 초나라를 막강한 나라로 만들었다. 영윤(최고위 관직) 투월초가 반란을 일으켜 위기를 맞는 듯했지만, 이내 양유기를 발탁해 제압했다(양유기는 백보 앞에 있는 버드나뭇잎을 향해 화살 백발을 쏘아 모두 맞춘 신궁이다. ‘백발백중’이라는 말이 양유기로부터 유래했다). 인재를 소중히 여겼고 능력 위주의 인사를 단행했다. 농사를 짓던 위오(손숙오)를 중용해 명재상으로 만든 것도 다름 아닌 장왕이었다.

장왕의 용인술은 유명한 ‘절영지회(絶影之會, 관모의 끈을 끊고 즐긴 연회)’에서도 엿볼 수가 있다. ‘절영(絶影)’ 또는 ‘절영지연(絶影之宴)’이라고도 불리는 이 사건은 장왕이 신하들의 노고를 치하하는 연회에서 벌어진다. 이 날 장왕은 애첩 허희에게 ‘모든 참석자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술을 따라주라’고 지시했다. 허희가 자리를 오가며 신하들에게 술을 따라주고 있을 때, 난데없는 바람이 불어와 연회장의 촛불을 모두 꺼트렸다. 이미 한밤중이었기 때문에 연회장은 한치 앞도 볼 수 없을 만큼 암흑천지로 변했다. 그때였다. 어둠 속에서 누군가의 손이 허희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깜짝 놀란 허희가 그 사람이 쓴 관모의 끈을 잡아 뜯어낸 후, 장왕에게 아뢰었다. “여기에 무례한 사람이 있어 첩의 몸에 손을 대었나이다. 첩이 그자의 관모 끈을 끊어 가지고 있으니 불을 밝히면 누가 저지른 짓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은 “아직 불을 밝히지 마라. 오늘 과인은 경들과 더불어 즐거운 마음으로 크게 취하고자 한다. 그 거추장스러운 관모 끈부터 뜯어버려라”라고 분부한다. 자신의 후궁을 희롱한 죄를 묻기는커녕 오히려 덮어준 것이다. 잔치가 끝난 후 허희가 이유를 묻자 장왕은 이렇게 말했다. “오늘은 모두가 취하도록 마셨다. 사람이 취하면 누구나 실수하게 마련이다. 만약 기어코 범인을 찾아내어 처벌했다면 어땠겠느냐? 신하들의 흥은 깨어졌을 테고 잔치를 연 의의가 사라졌을 것이다.”

이로부터 3년 후, 초나라가 진(晉)나라와 치열하게 전투를 벌이는 과정에서 장왕이 죽을 위기에 처했다. 이 때 당교라는 장수가 나타나 장왕을 구하고 진나라 군대를 격퇴하는 큰 공을 세운다. 장왕이 칭찬하며 상을 내리려 하자 당교는 이렇게 말했다. “신은 진즉에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대왕께서는 3년 전의 일을 기억하십니까? 그 때 관모의 끈을 뜯긴 사람이 바로 저였습니다. 대왕의 은혜로 죽지 않고 살아났으니 소신 목숨을 바쳐 그 은혜에 보답하고자 했을 뿐입니다.”

부하의 실수를 용서한 덕분에 부하는 그 은혜에 감동하여 더 큰 충성과 헌신을 바친 것이다. 물론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자면 피해자(추행당한 후궁)가 사과 받지 못하고 피해자의 인권이 무시되었다. 따라서 장왕의 결정을 그대로 본받아야 한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아랫사람의 잘못을 드러내고 엄격히 처벌하는 일만이 정답은 아니라는 것이다.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해 너그럽게 대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직접 천명을 만들어가겠다는 배포

마지막으로 장왕이 남긴 이야기를 하나 더 살펴보자. 한 번은 장왕이 대군을 이끌고 천자국인 주나라 왕실 경계에까지 진군한 적이 있었다. 이를 항의하는 사신에게 장왕은 구정(九鼎, 하나라 우왕이 만든 9개의 솥으로 천자의 정통성을 상징한다)이 얼마나 크고 무거운지 본 적이 없어서 한 번 구경하러 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천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내보인 것이다. 그러자 사신은 이렇게 대답했다. “천자가 되는 것은 덕행(德行)에 달려 있지 구정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을 들은 장왕은 부끄러워하며 철군했다는데, 과연 그랬을까? 장왕은 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구정을 믿지 말라. 초나라의 부러진 무기들만 녹여도 구정쯤은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 주나라의 기존 질서를 언제든 무너뜨릴 수 있다고 자신한 것이다. 이처럼 천명을 기다리지 않고 직접 천명을 만들어가겠다는 배포가 있었기에 장왕은 패업을 이룩할 수 있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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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8호 (2018.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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