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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 받는 기업인 나와야이 정부의 경제정책 방향을 둘러싸고 논란이 있습니다.“대통령의 참모들이 운동권 학생 시절의 경제관에서 못 벗어나면 우리 경제가 성장하기 어렵습니다. 정치가 기업을 때리지 말아야 합니다. 정치 하는 사람들이 기업을 옥죄면 경제가 어려워져요. 기업인들이 욕을 먹지만 그래도 정치인보다는 나아요. 우리도 하루빨리 존경받는 기업인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김 명예교수는 우리나라 철학계 1세대 교육자다. 일본 조치(上智)대 철학과를 나왔고 연세대 철학과에서 30여 년 간 후학을 양성했다. 철학의 사회적 가치는 무엇일까? 그는 “철학을 인문학으로 확장할 수 있는데 다른 학문과 달리 인문학은 일절 구속을 받지 않아 자유롭고 그렇기에 창조력의 원천이다”라고 말했다. “인문적 소양을 갖춰야 큰 인물이 됩니다. 미국이 강대국이 된 것도 인문적 사고를 하는 지도자들이 미국을 이끌면서 새로운 사상과 가치관을 창조해 왔기 때문이죠. 철학을 공부하면 오십쯤 됐을 때 나의 철학 곧 나 자신의 인생관·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습니다.”80분 간 인터뷰를 하는 동안 그는 여러 사람을 거명했다. 고령에도 이들의 이름을 줄소환하는 데 막힘이 없었다. 그는 “항상 문제의식을 갖고 살다 보면 기억력을 유지하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의 문제의식이 다른 문제의식으로 이어지는 거죠. 관련 연구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서 고유명사를 가장 먼저 잃어버린다고 합니다. 마지막까지 기억하는 게 동사입니다. 그래서 집 전화번호는 잊어버려도 배가 아프다는 말은 할 수 있죠.” 그는 이 나이까지 살게 될 줄 알았다면 재혼을 했을 거라고 말했다. 김 교수의 부인 김옥수씨는 20년 넘게 병석에 있다 1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아내가 병중에 있을 때 어머니가 유언처럼 ‘다 떠나고 나면 결국 혼자 남을 텐데 빈 집에서 혼자서 어떡하느냐’고 하셨는데 그게 재혼하라는 이야기였어요. 아흔쯤 되면 친구도 거의 없습니다.” 그는 여든넷에 상처한 후 아흔까지만 살면 될 거로 생각했다고 말했다. “100세 시대라지만 80대 중반이면 대개 혼자가 됩니다. 그런 후배·제자들에게 될 수 있으면 재혼을 하든, 연애를 하든 이성을 만나 사랑을 하면서 살라고 권합니다. 더 살아봤자 얼마나 살겠다고 하는 생각에 나는 실패했지만.”
상처하면 재혼을1970~80년대 그와 함께 철학계 삼총사로 불린 안병욱 숭실대 교수, 김태길 서울대 교수는 아흔을 전후해 세상을 떠났다. 세 사람은 공교롭게도 갑장이다. “나 혼자 남아 지금도 일을 하고 있죠. 두 사람은 나보다 건강이 좋았어요. 안 선생이 생전에 나더러 ‘김 선생은 정신력이 강해 우리보다 오래 살고 일을 많이 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정신력이란 신앙인으로서의 자세를 이야기한 거죠.”그는 초등학교 졸업할 무렵 건강이 안 좋아 아버지가 친구 의사에게 자신을 데려갔다고 말했다. 의사는 그가 몸이 약해서 중학교에 못 간다고 말했다. 철없는 나이었지만 그는 자신이 믿는 하나님에게 매달렸다. ‘중학교에 가게 해 주시면 건강이 허락하는 한 하나님 일을 하겠다’고 기도했다. 그는 건강에 대해 자신감을 갖게 된 것은 오십이 넘어서였다고 말했다. “50대 후반에 수영을 시작해 지금도 지속적으로 합니다. 수영을 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건강을 유지 못했을 거예요. 수영은 관절에 좋고 전신운동이라 몸의 균형을 잡아주죠. 수영 덕에 아직 관절에 문제가 없어 지팡이를 짚지 않는데 내년엔 짚어야 할지도 모르겠어요.” [예수]는 그의 주요 저서로 꼽히는 책이다.기독교가 교회 세습 등으로 시끄럽습니다.“기독교인은 예수의 가르침을 자신의 인생관·가치관으로 받아들인 사람입니다. 교회를 나가느냐 안 나가느냐는 중요하지 않아요. 앞으로 교회 없는 사회가 올지 모릅니다. 지나치게 보수적인 교회는 차라리 없어져야 돼요. 더욱이 교회 세습은 말도 안 돼요. 교회가 없어도 기독교 정신이 살아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도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라고 했습니다.”그는 먼저 간 두 친구 안병욱·김태길 교수가 도산이나 인촌 선생보다 못하지 않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고 말했다. “강연을 다니다 보면 ‘안병욱 선생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나한테 해요. 그렇게 고맙다는 인사를 많이 받는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버킷 리스트가 뭡니까?“지금 하는 집필과 강연을 죽을 때까지 하는 겁니다. 사랑이 있는 수고와 봉사를 하다 오래 앓지 않고 가고 싶어요.”그가, 아흔을 넘기면 신체적으로는 피곤하다고 말했다. 하루하루를 환자처럼 살아간다고 했다. “절대 편안하지 않습니다. 시력과 청력이 감퇴하고 균형감각도 떨어집니다. 피곤함을 일로 극복하는 거죠.” 그에게 묘비명을 어떻게 새기고 싶은지 물었다. “안병욱 선생이 강원도 양구에 누워 있습니다. 나도 나중에 거기로 갈 거고요. 우리 둘을 위한 묘비를 내가 마련하면 좋지 않을까 싶어요. ‘여기 겨레와 나라를 항상 걱정한 두 사람이 잠들다. 이름은 잊혀지더라도 이들의 마음은 남을 것이다.’”인터뷰를 마치고 함께 카페를 나섰다. 41년 전 대학 신입생 때 기자는 그의 철학 강의를 들었다. 내리막길을 걸어 횡단보도에 이르렀다. 녹색 신호등의 숫자가 빨간색으로 바뀌기까지 20초가 채 남지 않았다고 알려줬다. 그를 따라 길을 건너는 데 걸음 속도가 젊은 사람 못지않다. “집에서 2층에 있는 방으로 오르는 계단을 하루에도 몇십 번씩 오르내린다”고 한 그의 말이 생각났다. 돌아서 가는 노교수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으로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