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nside

[김준태의 열국지 재발견(11) | 범려의 처세] 나아갈 때와 물러날 때를 알다 

 

김준태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위기의 월나라 구하고 홀연히 사라져...천금의 재산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눠줘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명재상과 장사의 신(神).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이름을 동시에 가졌던 인물이 있다. 춘추전국시대 월(越)나라의 전략가 범려다. 그는 멸망 직전까지 갔던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웠고 모시던 주군을 패왕(覇王)으로 만들었다. 벼슬에서 물러난 후에는 상인으로 명성을 날리며 막대한 재산을 축적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주목할 만한 처세술을 보여줬다.

본래 초나라 사람인 범려는 포부를 펼칠 수 있는 곳을 찾아 월나라에 왔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월나라는 큰 위기를 맞았다. 숙적 오나라에 의해 월나라 군대가 괴멸당하고 임금 구천(勾踐)이 포로로 잡힌 것이다. 나라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아지자 월나라의 신하들도 동요하기 시작했다. 자칫 자신들의 목숨마저 잃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범려는 흔들리지 않는다. 전면에 나선 그는 갖은 계책을 써서 구천의 목숨을 구했고, 오나라 임금 부차를 부추겨 오나라의 국력을 낭비하게 만들었다. 오나라 조정을 이간질해 분열시키기도 했다. 그러면서 부국강병 정책을 주도, 월나라를 금방 강국으로 탈바꿈시킨다. 기원전 473년,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구천이 제후들의 맹주가 될 수 있었던 데에는 그의 공로가 절대적이었다. 보통 상황이 이와 같다면, 범려는 나라의 일등공신이자 수석 재상으로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됐을 것이다. 권력과 명예, 부귀를 한 손에 쥔 나라의 대주주가 됐을 것이다. 실제로 구천은 범려에게 나라의 절반을 주겠다고까지 말한다. 그러나 범려는 대업을 이룬 직후 곧바로 사직했다. “신이 듣건대 군주가 모욕을 받으면 신하는 죽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날 대왕께서 치욕을 당하셨는데도 신이 죽지 못했던 것은 참고 기다려 월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오나라가 사라졌으니 신은 그 때의 죄를 물어주시길 청하옵니다. 책임을 지고 관직에서 물러나겠습니다.” 놀란 구천이 “과인이 오늘을 맞이한 것은 오로지 경의 힘 덕분이오. 과인을 버리고 가긴 어딜 간다는 말이오?”라고 만류했지만 범려는 듣지 않았고, 그날 밤으로 짐을 꾸려 사라져버렸다.

동료 재상에게 ‘토사구팽’ 충고

범려는 떠나면서 동료 재상이었던 문종(文種)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를 남겼다고 한다. “토끼가 죽고 나면 사냥개는 삶아 먹히고 적국이 사라지면 모책을 내던 신하는 설 자리가 없어집니다. 부릴 대로 부려먹다가 쓸모가 없어지면 제거하는 것이지요. 아시다시피 우리 임금은 욕심이 많고 시기심도 많습니다. 함께 환난(患難)을 견딜 수는 있어도 같이 안락을 누릴 수 없는 인물입니다. 그대도 하루 속히 떠나지 않는다면 틀림없이 참혹한 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토사구팽(兎死狗烹)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유래한 것으로, 구천은 틀림없이 효용가치가 다한 문종을 죽이려 들 것이니 빨리 피하라는 경고였다.

무릇 신하가 지나치게 뛰어나면 그것이 죽음을 재촉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적국을 무너뜨리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신하의 탁월한 역량은 임금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지만, 일단 목표를 이루고 난 후에는 부담이 된다. 그러한 힘과 능력을 가지고 혹시라도 자신에게 반기를 들지 않을까 두려운 것이다. 더구나 큰 공을 세운 신하의 명망과 영향력이 왕권을 강화하는 데 장애가 되기 때문에 차제에 숙청하려 들기도 한다. 범려는 구천 역시 이와 같이 행동하리라 예상한 것이고, 그래서 주저 없이 월나라를 떠난 것이다(범려의 충고를 듣지 않고 머뭇거리던 문종은 구천으로부터 자결할 것을 명 받았다).

그렇다면 범려는 어디로 갔을까? 치이자피라는 이름으로 개명한 그는 제나라에 나타났다. 여기서 막대한 재산을 모았고 그 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해 인심을 얻었다. 범려의 비범함을 알아챈 제나라 왕이 그를 재상으로 임명했지만 “사사롭게는 천금의 부(富)를 이루었고 벼슬살이는 재상에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사람으로서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존귀한 명성을 오래 갖고 있으면 상서롭지 못하다”라며 금방 물러났다. 그리고는 전 재산을 모두 주위에 나눠줘 버린 후 또 다시 잠적한다.

범려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몸을 드러낸 것은 도(陶)라는 고을에서였다.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새 이름을 내세운 그는 연로한 나이에도 상업과 무역을 통해 큰 돈을 벌어들였다. 이 때 그는 월나라 시절 동료 계연(計然)의 방법을 실천해 성공했다고 말하는데, 이재(理財)에 밝았던 계연은 다음과 같이 말한 바 있다. “물자를 모으려면 그것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있도록 노력하되 묵혀두어서는 안 된다. 썩은 것은 내다버리고 상한 물건은 남겨놓지 말아야 한다. 물건값이 많이 오를 때까지 차지하고 있는 것도 옳지 않다. 물자가 남는지 모자라는지를 잘 따지면 값이 오를지 내릴지를 알 수 있다. 값이 극도로 비싸지면 반대로 싸지고, 값이 극도로 내려가면 반대로 비싸진다. 따라서 값이 오르면 오물을 버리듯 내다 팔고 값이 내리면 보석을 얻은 듯 사들여야 한다.”

물건값이 오르면 내다팔고 내리면 사들여야 한다는 것인데, 당연한 말처럼 보여도 막상 실천하기는 어려운 과제다. 가격이 올라가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계속 오를 거라 시대하며 관망한다. 이미 이익을 거뒀음에도 ‘지금 팔았다가 값이 더 오르면 그 손해가 얼마야?’라는 생각에 머뭇거린다. 그러다가 매도할 시점이 지나고 나서야 부랴부랴 판매에 나선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조금만 더 기다리면 더 좋은 가격에 물건을 살 수 있지 않을까?’라며 주저하다가 적절한 매수 시점을 놓쳐버린다. 범려는 이와 같은 인간의 심리를 극복한 것이다.

이러한 범려의 상술은 그의 처세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범려가 존망의 위기에 있던 월나라를 지켜내며 헌신한 것은 값이 내렸을 때 물건을 사들이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월나라’의 값어치가 떨어져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덕분에 범려는 마음껏 경륜을 펼칠 수 있었다. 대업을 이룬 후 미련 없이 월나라를 떠난 것, 제나라에서 재상을 사직하고 재산을 나눠준 것은 가격이 올랐을 때 물건을 내다판 것에 해당한다. 그는 도고을 에서도 천금의 재산을 가난한 이웃들에게 베풀고 홀연히 은퇴했는데, 부귀나 명예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이 마음 먹은 때에 정확히 물러난 것이다. “(범려는) 세 번 자리를 옮겼으나 세 번 모두 이름을 떨쳤고, 드러나지 않고자 했지만 널리 드러났다”는 사마천의 평가는 범려의 처세술 덕분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익 탐하지 않고 주저 없이 비워

이상 범려의 처세는 ‘물러나는 법’에 대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적절한 시점에 물러날 줄 알아야 자신을 지킬 수 있고 새로운 도전을 할 수 있는 기회도 열리는 법이지만, 우리는 눈앞의 이해관계와 욕심, 미련 등에 집착하느라 때를 놓치곤 한다. 머뭇거리고 주저하다가 상황을 오판하고 잘못된 결정을 내린다. 성공에 도취하지 않고 과감히 물러날 줄 알았던 범려의 자세, 이익을 탐하지 않고 주저 없이 비울 줄 알았던 범려의 자세를 본받아야 하는 이유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 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450호 (2018.09.10)
목차보기
  • 금주의 베스트 기사
이전 1 / 2 다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