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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학각색(各學各色)’ | 핵 있는 평화, 핵 없는 평화 - 정치학] 핵 있는 평화 달성은 지난한 목표 

 

차홍석 동국대 폴리티쿠스랩 연구위원
국제사회 견제로 핵무장 사실상 불가능 … 핵으로 평화 연결 짓기도 어려워

핵이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핵 억지’는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핵 무기의 사용이 모두의 파멸을 불러올 수 있다는 인식에서 비롯된다. 가장 강력한 무기를 가짐으로써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는, 다소 모순된 것으로 들리는 이 ‘핵 억지’ 전략은 성립될 수 있을까? 무기의 발달이 가져온 역사적 상황을 돌이켜보며 핵 있는 평화를 위한 필수조건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사와 영주의 충성서약을 바탕으로 한 서양의 봉건제 사회는 화약의 도입으로 궤멸됐다. 총의 발달로 기사는 더 이상 숙련된 무력집단의 역할을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기사와 일반인의 능력에 큰 차이가 없어졌고 이에 따라 서로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다른 사람의 생존권에 위협을 줄 수 있는 개인이 자신의 생존권을 일부 양도함으로써 사회를 만들어냈다’는 홉스의 사회계약론 논리의 시발점이자, 리바이어던의 탄생 배경이다. 여기서 리바이어던 탄생의 핵심은 개인의 생존추구와 이에 대한 공포다. 모든 인간은 자신의 생존추구를 위한 모든 행위를 다 하려고 하기 때문에 자연상태, 즉 무정부상태에서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 상태’에 직면한다. 그러나 인간은 이내 자신의 생존권 추구가 자신의 생존에 오히려 큰 위협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자신의 권리의 일부를 정부에 위임한다. 무기의 발달이 생존에 대한 공포를 불러 일으켰고, 이 공포가 오히려 평화를 가져온다는 역설의 논리가 등장하는 순간이다.

이른바 핵 있는 평화 역시 총을 핵으로, 개인이 국가로 치환되면서 동일한 논리를 드러내게 된다. 그러나 여기에는 간과할 수 없는 두 가지 차이점이 있다. 첫째, 국제사회는 무정부상태라는 점이다. 국제사회는 리바이어던과 같이 모든 개인(여기서는 국가)을 제약할 수 있는 권위체가 없다. 유엔은 국가간 연합이지, 세계의 정부가 아니다. 둘째, 개인과 국가는 엄연히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라는 배의 항로는 다양한 행위자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결정되기 때문이다.

이 두 가지 차이점은 ‘생존의 공포를 이용한 평화’라는 메커니즘을 굴절시킨다. 먼저 핵무기가 있는 국가를 제어할 강력한 세계 정부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핵무장한 국가의 폭주를 막을 수 없다. 강대국들의 세력균형을 통해 평화를 가져오는 방법뿐이다. 둘째 공포라는 감정은 개인의 것이다. 공포라는 감정이 집단적으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집단의 안보를 위협하는 특정한 상황이 수반돼야 한다. 따라서 핵무장이 전쟁을 억지하면서 평화를 가져오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과정이 필요하다. 먼저 핵무장에 대한 국가 내부의 합의가 필수적이다. 다음으로 핵무장한 국가에 대해 타국의 국민들이 공포심을 가져서 전쟁 발발 가능성이 줄어들어야 한다.

그러나 이 과정은 첫 단추부터 난관에 처한다. 지금 한반도에서 핵무장에 대한 국가 내부의 합의는 이루어지기 어렵기 때문이다. 국제사회는 핵무기 개발을 용인하지 않으며, 이를 어기는 국가에 대해서는 국제적인 압박을 가해왔다. 따라서 핵 개발을 하다가는 오히려 정치·경제·외교적 난관에 처할 수 있다. 더구나 남북 화해무드가 조성되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안보에 위협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쉽사리 핵무장에 대해 이야기하기 어렵다.

타국의 정부와 국민들이 공포심을 가지게 됨으로써 전쟁이 억지될 것이라는 기대를 품는 것도 쉽지 않다. 언급한 바와 같이 핵무장한 국가들을 규제할 수 있는 권위체가 없는 상황에서는 핵무기를 가진 국가들이 서로 공포심을 가지기는커녕 분노를 통해 모두를 파멸로 이끌 가능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가 추구하는 것은 핵이 아니라 평화다. 핵은 평화를 위한 수단으로 가치가 있을 뿐이다. 문제는 한반도에서 핵을 통한 평화는 달성되기 쉽지 않다는 점에 있다. 핵무장을 하는 것도 어렵지만, 핵무장을 이루고서도 이를 평화로 연결시키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 차홍석 박사는…사회 변동과 과학의 발달 등이 인간의 정치적 행위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현재 한국민주시민교육학회 총무이사로 활동 중이다.

1465호 (2018.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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