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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S, 그 혁신의 역사] 휴대용 라디오부터 자율주행차까지 망라 

 

이창균 기자 smilee@joongang.co.kr
155개국 4500여 기업 한 자리에 … 올해도 소프트웨어 비중 커져

해마다 1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리는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 Consumer Electronics Show)’가 올해도 지구촌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전자제품 전시회로, 세계 각국의 내로라하는 기업이 참가해 첨단 기술을 뽐내며 자웅을 겨룬다. 2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열리는 ‘모바일월드콩그레스(MWC)’, 9월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국제가전박람회(IFA)’와 함께 세계 3대 정보통신기술(ICT) 행사다. 올해는 어떤 신기술로 관람객들을 놀라게 했는지 혁신의 현장을 살펴봤다. 더불어 CES의 역사와 라스베이거스의 경쟁력도 짚어봤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1월 8일(현지시간)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CES 2019’ 개막 기조연설 현장. 미국의 글로벌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IBM의 지니 로메티 최고경영자(CEO)가 무대에 올라 두 가지 신기술을 소개하자 취재진의 관심이 집중됐다. 하나는 IBM이 연구용과 상업용으로 동시에 활용할 수 있도록 처음 개발한 통합형 양자컴퓨터 ‘IBM Q 시스템 원(System One)’, 다른 하나는 새로운 기상관측 솔루션인 ‘IBM GRAF(Global High-Resolution Atmospheric Forecasting)’였다.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경계 허물어져


양자컴퓨터는 연산할 때 기존 컴퓨터와 달리 양자역학을 이용한다. 양자를 연산 소자로 활용, 현존하는 수퍼컴퓨터가 수백 년 걸려 해독할 수 있는 암호도 불과 수분 만에 해독할 수 있는 혁신적인 미래형 컴퓨터로 꼽힌다. 이 때문에 세계 각국이 개발 경쟁에 열을 올리고 있다. IBM GRAF는 현존하는 기상관측 기술의 정밀도 등 성능을 200% 향상시킨 신기술이다. 로메티 CEO는 “지금껏 12~15㎢ 범위에서 6~12시간 단위로 기상 관측이 가능했지만, 이젠 3㎢ 범위에서 한 시간 단위로 날씨를 예측할 수 있게 될 것”이라며 “올 연말쯤 상용화할 계획”이라고 소개했다. 전통적인 하드웨어 강자였던 IBM은 최근 주력 사업 분야를 소프트웨어로 바꿔나가고 있다.

하루 전 LG전자의 사장인 박일평 최고기술책임자(CTO)가 무대에 오른 기조연설 현장. 이번엔 LG전자가 만든 인공지능(AI) 로봇 ‘클로이’가 박 사장과 나란히 무대에 올라 화제가 됐다. CES 역사상 기조연설자로 무대에 오른 첫 로봇이다. 박 사장이 “AI가 적용된 세탁기가 일상을 어떻게 바꿔줄 수 있느냐”고 묻자 클로이는 친절히 설명에 나섰다. 이어 클로이는 “CES에서 로봇이 휴식을 취하는 걸 뭐라고 하는지 아느냐”며 운을 띄우더니 “시에스타(siesta,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보편화한 낮잠 시간)”라고 자문자답해 약 3000명이 모인 객석에 웃음꽃이 피었다. 소비자가전(CE) 부문의 글로벌 전통 강자인 LG전자 역시 AI 신기술 개발에 힘쓰면서 변신 중이다.

최근 수년 간 그랬듯, 이번에도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위화감 없이 한자리에 뒤섞였다. 하드웨어 위주의 소비자가 전 박람회에서 소프트웨어까지 아우르는 종합 전자제품박람회로 진화한 CES의 면모가 나타난다. CES를 주최하는 전미소비자가전협회(CEA)는 아예 단체 이름을 2016년부터 전미소비자기술협회(CTA)로 바꾸기도 했다. 심지어 자동차도 새 제품이 CES에서 공개되고 있다. 첨단 ICT를 탑재한 ‘달리는 전자제품’이 돼서다. 이번 CES에서 독일의 글로벌 자동차 브랜드 메르세데스-벤츠는 2세대 신형 ‘더 뉴 CLA’를 CES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하면서 증강현실(AR) 기술을 활용한 내비게이션 등 차에 탑재된 다양한 신기술을 소개했다. 5년 전인 CES 2014 때부터 CES에 본격 참가해 전시 부스를 확장해왔던 자율주행 업체들은 이번에도 부스를 적극 마련하고 신기술 홍보에 나섰다. ICT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처럼 CES라는 행사 자체도 혁신을 거듭하고 있다.

그 사이 CES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 역시 한층 커졌다. CTA에 따르면 2013년 세계 3000여 기업, 약 15만 명의 관람객이 참가했던 CES는 올해 155개국 4500여 기업, 약 18만 명의 관람객이 참가한 행사로 규모가 한층 커진 것으로 추산된다. 지난해(4000여 기업 참가)보다도 규모가 더 커졌다. 올해 IBM 등이 그랬듯, 소프트웨어 강화에 힘쓰고 있는 주요 참가 기업들은 경쟁적으로 CES를 통해 신기술 홍보 효과를 톡톡히 누리려 하고 있다. 삼성전자·현대자동차그룹 등 세계인이 주목하는 한국 기업들도 이번 CES에서 각종 신기술 공개로 또 한 번 관심을 모았다.

52년 간 숱한 히트작 쏟아내

1967년 처음 시작된 CES는 52년 간 숱한 ‘히트작’을 쏟아내며 수많은 기업과 관람객의 마음을 사로잡아왔다. 그야말로 혁신의 산실(産室)이다. 첫 CES를 수놓은 히트작은 휴대용 라디오였다. 지금은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영상을 무리 없이 보는 시대이지만 당시만 해도 신기술로 주목을 받았다. 3년 후인 1970년 필립스가 CES에서 선보인 비디오카세트녹화기(VCR) ‘N1500’은 가정용으로 크기를 줄이고 가격을 대당 2000달러(기존 VCR은 7만 달러)로 낮춘 획기적인 VCR로 세계적인 비디오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1982년 CES에 모습을 보인 ‘코모도어64’ 컴퓨터는 1994년까지 세계에서 약 1700만대가 팔리면서 PC 시대가 왔음을 선언했다.

종전의 아날로그 전송 방식에서 벗어난 고화질(HD) TV도 1998년 CES에 등장해 뜨거운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후 위성 디지털 방송 시대가 열렸다. 이는 세계 TV 시장을 장악한 한국과 일본의 TV 대전(大戰), 즉 치열한 기술 경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2008년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TV, 2009년 3차원(3D) TV, 2011년 스마트TV가 모두 CES에서 선을 보였다. 오늘날 산업계 다방면에서 활용도가 높아진 무인항공기 드론도 CES 출품을 계기로 발전했다. 2010년 패럿이라는 프랑스 업체가 CES에서 처음 공개한 드론이 지금처럼 4개의 프로펠러를 장착한 형태였다. 당시만 해도 ‘값비싼 장난감’처럼 여겨졌지만 이젠 세계 각지에서 활용도가 높아진 중요한 제품이 됐다.

이 밖에 세계 게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테트리스’ 게임(1988년), 생전의 스티브 잡스가 극찬했던 태블릿(2010년)과 스마트워치(2012년)도 CES 무대를 빛냈다. 그런가 하면 CES는 ‘당분간 대체할 만한 기술이 없을 것으로 보였던’ 신기술이 예상보다 빨리 쇠락할 수 있음을 보이는 무대로도 기능했다. 1981년 CES에 등장했던 CD플레이어가 15년 후인 1996년 CES에선 다른 신기술인 DVD플레이어로 대체돼 영원한 승자는 없음을 보여줬다.

OLED TV도 드론도 CES 통해 세계인과 만나

최근 수년 간은 AI 등 다양한 소프트웨어 신기술이 CES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4차 산업혁명’ 흐름을 반영했다. 올해 역시 ▶5세대(5G) 이동통신 ▶사물인터넷(IoT) ▶블록체인 ▶헬스케어 ▶스마트홈 ▶3차원(3D) 프린팅 ▶로봇 ▶드론 ▶자율주행차 등의 분야에서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만난 신기술이 선을 보였다. CES 현장을 다녀온 ICT 업계 관계자는 “예년 CES 때보다 신기술 적용의 ‘실현 가능성’ 측면에 중점을 둔 신제품이 많이 모습을 보인 것이 이번 CES의 특징이었다”며 “글로벌 기업들 간 상용화 경쟁이 갈수록 치열해질 것”으로 내다봤다. 한편 CES는 이제 산업계는 물론 금융권까지 관심을 가지는 행사로 지위가 격상된 모습이다. 국내 일부 시중은행은 디지털 관련 부서 직원을 CES에 파견, 현장에서 주요 부스를 둘러보고 최신 ICT 트렌드를 파악하는 데 힘썼다. 디지털 금융 환경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어서다. CES, 그 혁신의 역사는 다양한 갈래로 이어지고 있다.

[박스기사] CES 2019에서 한풀 꺾인 중국굴기 - 미·중 무역전쟁 탓? 참가 기업 줄어

최근 수년 간 CES를 관통하는 키워드가 하나 있었다. 바로 ‘중국굴기’다. 중국은 2000년대 이후 경제에서의 고성장을 발판 삼아 제조업 육성에 힘썼고, 그 결과 글로벌 시장에서 통하는 기업들이 다수 나왔다. 알리바바나 화웨이 같은 ICT 기업이 대표적이었다. 이번 CES에선 의외로 중국굴기가 한풀 꺾인 모습이었다. CES 주최 측에 따르면 이번 CES에 참가한 중국 기업은 모두 1211곳으로, 지난해(1551곳)보다 22%가량 감소했다. 최근 4년 사이 CES에 참가한 중국 기업 숫자가 줄어든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전체적인 행사 규모는 오히려 커졌으며, 해마다 중국 기업의 힘도 강해지고 있음을 고려하면 이례적이다. 한국만 해도 CES 참가 기업이 지난해 217곳에서 올해 338곳으로 크게 증가했다(한국정보통신기술산업협회 집계). CES 현장을 짚어본 전문가들도 같은 의견을 제시했다. 정구민 국민대 전자공학부 교수는 “이번 CES에선 ‘중국은 없다’는 얘기가 나올 만큼 중국 기업들의 영향력이 약해진 모습이었다”며 “참가 기업 숫자가 줄었을 뿐만 아니라 전시에서도 혁신적인 모습이 부족했고 관람객들의 관심도도 크게 떨어져 보였다”고 했다.

예컨대 중국의 전기자동차 업체 바이톤은 지난해 CES 미디어데이 때 입장하는 줄이 길게 늘어설 만큼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올해는 간신히 객석을 채웠다. 그나마 세계 최초 ‘폴더블폰’ 타이틀을 가져간 로욜이 취재진의 관심을 받았지만 로욜조차도 좁은 발표장 객석을 다 채우지 못했다. 그해 CES의 키워드를 제시하고 업계 트렌드 선도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남길 수 있는 CES 개막 기조연설자 명단에도 중국 기업과 기업인의 이름은 아예 포함되지 않았다.

미국과의 무역 분쟁 여파로 전반적인 참가가 저조했던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오는 이유다. CES가 매년 미국에서 열리는 행사여서다. 일부 외신은 “미국 행사에 중국 기업이 들러리 형태로 참가하는 걸 우려해 많이 불참한 것”으로 해석했다. 한편 일각에선 적잖은 중국 기업들이 실제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게 아니냐는 의문도 제기하고 있다. 단순히 국가 자존심이 걸렸다고 해서 불참할 만큼 CES가 작은 행사가 아니며, 오히려 매우 중요한 행사이기 때문이다.

익명을 원한 ICT 업계 관계자는 “글로벌 기업의 제품을 베껴 만들어 추격해온 중국의 ‘카피캣’ 전략이 한계를 보이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고 했다. CES가 미래형 신기술을 공유하는 자리인 만큼 카피캣 제품만으로는 참가해도 호응을 얻는 데 분명히 한계가 있으며, 이번 CES에서 중국 기업들의 참가 규모 감소로 그 한계가 입증된 게 아니냐는 시선이다. 반면 쫓기는 처지가 됐던 한국 기업들은 이번 CES에서 혁신적인 신기술들을 잇따라 선보이며 참가 규모도 늘어 업계에 기대감을 더했다.

1468호 (2019.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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