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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연금, 기업 지배구조 변화의 ‘태풍’ 될까] 독립성 확보해 연금사회주의 우려 떨쳐야 

 

김성희 기자
5% 이상 지분 보유한 상장사 294곳...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등 적극적 주주권 행사

국민연금공단(이하 국민연금)은 지난 2월 19일 열린 넥센타이어 주주총회에서 ‘이사 보수한도액 승인’ 안건에 반대표를 던졌다. 이사 5명의 보수한도액으로 60억원을 배정하는 안건이었다. “경영 성과를 감안할 때 보수가 과도하게 많다”는 게 국민연금의 반대 이유였다.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안건은 통과됐다. 그러나 이날 주총에서 넥센타이어 경영진들의 얼굴에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넥센타이어 주총에서의 국민연금 반대표 소식이 알려지자 주총을 앞둔 상장사들은 긴장 모드다. 3월 27일 열리는 대한항공 주총에서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선임 안건이 상정될 예정이다. 국민연금의 대한항공 지분률은 11.56%다. 조 회장 등 대주주 일가(33.35%)에 이어 2대 주주다. 국민연금은 지난 2013년과 2016년에도 조 회장을 사내이사에 선임하는 안건에 대해 ‘과도한 겸임’을 이유로 반대표를 던졌다. 국민연금은 이번에도 조 회장 재선임 안건에 반대표를 던질 가능성이 크다. 조 회장 일가가 ‘갑질’ 등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켜 ‘오너리스크’가 더욱 커졌기 때문이다. 대한항공 주총 이틀 후에 예정된 금호석유화학 주총에서도 박찬구 회장의 재선임 안건이 상정돼 있다. 박 회장은 배임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12월 대법원에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확정받았다. 그러한 만큼 국민연금은 이 자리에서도 반대표를 행사할 것으로 보인다. 국민연금은 금호석유화학의 2대 주주다.

국민연금의 이 같은 주주권 행사는 지난해 7월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하면서 본격화됐다. 스튜어드십 코드란 국민연금과 같은 기관투자자가 돈을 맡긴 고객을 대신해 집사(스튜어드)처럼 투자 기업의 의사결정에 적극 참여하면서 그 결과도 투명하게 보고하도록 한다는 취지의 제도다. 국민연금이 투자 기업에 적극적으로 의결권을 행사하면 기업의 지배구조 개선과 경영 투명성 강화 등으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주주의 이익으로 환원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에서 도입됐다.

투자 기업 주총에서 잇단 반대표 행사


국민의 노후자금 640조원을 굴리고 있는 국민연금은 약 124조원의 자금을 국내 주식에 투자하고 있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3월 5일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할 때 기준이 되는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회사는 294곳이다. 유가증권·코스닥시장 전체 상장사(2094곳)의 14%에 해당된다. 증시에서 시가총액 1위인 삼성전자(국민연금 지분율 10%)를 비롯해 SK하이닉스(9.1%)·현대자동차(8.7%) 등 주요 대기업 계열사들이 대부분 포함된다. KT(12.19%)·KT&G(10%) 등 국민연금이 이미 최대주주에 오른 상장사도 적지 않다. 때문에 이들 기업의 주총에서 최대주주나 경영진이 올린 안건에 국민연금이 반대표를 행사할 경우 해당 기업으로선 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다.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가이드라인은 이렇다. 기업가치를 훼손하거나 주주권익 침해, 기업의 배당정책, 임원 보수 한도의 적정성, 환경·사회·지배구조(ESG) 평가등급이 일정 수준 이상 떨어져 하위 등급에 해당되는 회사가 대상이다. 여기에 국민연금은 합리적인 배당계획을 마련해 공시하지 않거나, 수립한 계획을 지키지 않는 기업을 가려내 비공개 대화를 하게 된다. 비공개 대화에도 개선하지 않으면 ‘비공개 중점관리기업’으로 선정한다.

국민연금은 지난해부터 지배구조 개선과 기업가치 제고, 배당 확대 등 적극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국민연금은 올 들어 예년보다 적극적으로 투자 기업에 대한 의결권 행사에 나설 방침이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에 따르면 최근 국민연금은 2월 수탁자책임전문위원회(전문위) 결정에 따라 의결권 행사 방향을 사전공개하기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지분율이 10% 이상이거나, 국내 주식 포트폴리오에서 보유 비중이 1% 이상인 상장사가 대상이다. 국민연금의 사전공개 대상 기업으로 LG하우시스·신세계 I&C·현대글로비스 등이 거론된다. 에프앤가이드에 따르면 현재 국민연금이 보유하고 있는 LG하우시스 지분은 12.63%, 현대글로비스는 10.19%, 유니드 11.28%다.

LG전자·신세계, 전년보다 배당 50% 늘려


국민연금의 이런 움직임에 배당에 다소 소극적이었던 기업들은 스스로 행동에 나섰다. 대한항공은 올해 240억원 규모의 배당을 결정했다. 보통주 1주당 250원, 우선주 1주당 300원씩으로 지난해와 비슷한 수준이다. 당초 업계에서는 대한항공이 2017년에 이어 2년 연속 배당을 실시할 가능성이 크지 않다고 예상했다. 지난해 유가 상승에 따른 유류비 증가와 외화환산 손실 등의 영향으로 당기순이익이 적자전환했기 때문이다. 국민연금이 저배당 기업으로 지목했던 현대그린푸드는 배당성향을 종전 6.2%에서 두 배 이상으로 높은 13%로 높이기로 했다. 주당 배당금은 80원에서 210원으로 대폭 오른다. 국민연금은 현대그린푸드의 지분 12.82%를 보유한 2대 주주다.

지난해 통신비 인하 여파로 영업이익이 전년보다 11.5% 줄어든 KT도 2696억원의 배당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전년보다 246억원 늘었다. 배당금은 2012년 결산 이후 가장 많아졌다. LG전자(87.5%)와 신세계(60%)처럼 전년보다 50% 이상 많은 배당금을 지급하기로 한 상장사도 속출하고 있다. 오진원 하나금융투자 연구원은 “국민연금이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 이후 단계적인 의결권 행사 확대를 계획하고 있다”며 “증시 전반의 주주환원 확대 요구가 거세지면서 올해 상장사의 순익이 14% 감소할 것으로 예상되지만 배당은 6% 증가할 것이란 기대감이 형성돼 있다”고 설명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는 소액 주주들에겐 반가운 소식이다. 그동안 주총에서 비중있는 발언권을 행사할 수 없었던 소액주주들을 국민연금이 대변해 주는 셈이기 때문이다. 기업 지배구조 건전성 제고는 물론 배당 증가로 1석 2조다. 국민연금도 배당확대 등을 통해 장기적으로 수익률을 향상시키겠다는 계산이다.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적용의 목적은 기금운용 장기 수익성 제고”라고 말한바 있다. 지난해 국민연금의 연간 수익률은 -0.92%다. 손실 금액은 5조9000억 규모다. 투자 자산별로 보면 국내 주식과 해외 주식에서 각각 16.7%, 6.19%의 손실을 냈다.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로 기업가치가 오를 것으로 보고 있다. 김형석 한국기업지배구조원 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기업지배구조의 건전성을 높이고 장기적으로 주가 상승과 같은 기업가치 향상에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국기업지배구조원에 따르면 2017년 12월 말 기준으로 국민연금이 지분 5% 이상 보유한 기업 194곳 중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으로 누적 수익률이 평균 0.82% 높아지는 것으로 분석됐다. 송치호 이베스트투자증권 연구원은 “첫 한국형 주주행동주의가 대기업 집단에 대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결과를 만들어 냈다”면서 “주주행동주의가 다양한 주식으로 퍼져나갈 수 있는 기반이 형성되기 시작했다”고 진단했다.

의결권 행사가 경영 간섭 수단으로 악용될 수도

다만 일부에서는 국민연금의 주주권 행사에 대해 우려감을 보이기도 한다. 스튜어드십 코드가 과도한 경영간섭 수단이 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일례로 미국계 행동주의 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엘리엇)는 지난해 5월 현대차그룹의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무산시키고, 9월에 현대모비스를 쪼개 현대차·현대글로비스로 합병하라고 압박했다. 11월에는 현대차·현대모비스·기아차 이사진에 ‘주주 환원정책과 기업지배구조 개선 협업’도 요구했다. 얼핏 보면 주주들을 위해 스튜어드십 코드를 행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엘리엇은 경영권 참여를 정당화하는 수단으로 스튜어드십 코드를 악용한 투기자본의 행태를 보였다. 황인학 한국기업법연구소 수석연구위원은 “독립성이 낮은 국민연금이 환경·사회공헌·지배구조 등의 문제에 관여하게 되면 부당한 경영 간섭으로 이어질 수 있고 이는 주주의 이익과 상충될 우려가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정치적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은 상황도 문제다. 현재 국민연금의 최고의결기구인 기금운용위원회 위원장은 복지부 장관이고 당연직 위원 4명이 주요 부처 차관이다. 조동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장관이 기금운용위원장을 맡고 기금운용본부장도 정부가 검증하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의 스튜어드십 코드 도입은 재벌개혁을 위한 관치로 이어져 연금사회주의가 우려된다”고 말했다. 현재 국민연금 주주권 행사를 결정하는 수탁자전문위원 14명 가운데 9명이 정부 산하 연구기관의 추천을 받은 인물이거나 노동계 인사로 구성되어 있다. 연금사회주의란 민간 기업의 주요 주주가 된 공적 연기금이 정치권의 영향을 받아 경영에 관여하게 되는 현상을 말한다.

전문가들은 국민연금의 이런 우려를 해소하고, 스튜어드십 코드의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서는 ‘정부 지배로부터의 독립’이 필요하다고 주문하고 있다. 박진식 법무법인 넥스트로 변호사는 “공적 연기금은 그 뒤에 인사·예산권을 쥔 정부가 있어 현재와 같은 구조에서는 중립성을 기대하기 어렵다”며 “경제민주화와 재벌개혁 등 정부의 정책 목표를 강제하는 또 다른 도구로 변질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전삼현 숭실대 법학과 교수는 국민연금의 독립성 확보를 위해 단기적으로는 기금운용업무를 민간에 위탁하고, 그 성과를 정책감사의 대상에서 제외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장기적으로는 기금운용위원회와 기금운용본부를 독립시켜, 공사화하거나 민영화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황인학 수석연구위원은 “국민연금이 집사의 지위를 인정받으려면 어떤 정치적 개입이나 제3자의 영향으로부터 독립적으로 주주권을 행사한다는 원칙을 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 김성희 기자 kim.sunghee@joongang.co.kr

1475호 (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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