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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필재의 ‘브라보! 세컨드 라이프’(21)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 인생 2막에도 ‘1만 시간의 법칙’ 적용 

 

암 투병 후 아마추어 사진가로 활동… 한 번도 어려운 정년퇴임을 두 번 기록

▎사진 : 김성태 객원기자
“암 투병한 덕에 인생 2막의 두 가지 화두를 찾았습니다. 바로 내려놓음과 감사죠. 1년 만에 직장에 복귀하니 동료·후배들이 리더가 없어도 나름대로 잘 꾸려가고 있더라고요. 내가 없어도 세상은 돌아가게 마련이죠. 또 감사하게도, 투병하는 동안 주변의 많은 분이 저를 위해 중보기도를 하셨더라고요. 저 혼자 병을 이겨낸 게 아니었어요.” 고희를 바라보는 박용기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초빙연구원은 “일반론이지만, 우리 모두는 스스로 생각하는 만큼 그렇게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 역시 유학파 재료공학 박사로 고온초전도체, 심장·뇌 상태를 측정하는 스퀴드 센서 등을 개발해 2000년 ‘이달의 과학기술인상’을 받은 한때 잘나가던 과학자였지만 암 투병 후 때가 되면 권한도 지위도 다 내려놓아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외부 강연 때 활용하기 위해 직접 작성한 ‘박용기 사용자 매뉴얼’에 이렇게 적는다. “위가 없고 철이 조금 부족함.” 위가 없는 건 9년 전 위암 3기 판정을 받고 잘라냈기 때문이다. 당시 병원이 추정한 5년 생존율이 14%였지만 그는 지금 아마추어 사진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이다. 대덕특구 인터넷 매체인 헬로디디에 4년 간 ‘박용기의 사진공감’을 연재했고, 지난 1월 서울 왕십리의 갤러리 허브에서 사진 개인전도 열었다. 또 접사 촬영한 꽃 사진과 감성 돋는 글을 고교 친구들에게 메신저로 매일 보낸다. 아침에 띄우는 꽃편지다. 과학 강연가이자 과학 칼럼니스트이기도 하다.

과학도답게 책으로 사진 독학

사진은 독학을 했다. 과학도답게 책을 보고 배웠다. 1년 만에 표준과학연구원에 복귀한 후 건강 관리를 위해 연구원 캠퍼스를 산책하다 보니 꽃이 눈에 들어왔다. 계절이 바뀌면 풍경도 달라졌다. 홈페이지를 만들어 꽃 사진을 올리기 시작했다. 접사 촬영을 위해 장비도 장만했다. 사진이 취미로 좋은 건 우선 즐겁게 몰입할 수 있어서다. 결과물을 통해 다른 사람과 그 즐거움을 나눌 수도 있다. 하면 할수록 실력이 향상돼 성취감도 맛볼 수 있다. “사진을 잘 찍으려면 무엇보다 피사체의 아름다운 면을 보려 노력해야 합니다. 또 자신만의 앵글을 구사하고, 내가 잡은 프레임 안에서 불필요한 것들을 제거해야죠. 더불어 여유를 갖고 즐기려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인생살이도 이 네 가지가 필요해요. 만나는 사람에게서 아름다움을 찾고,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봐야죠. 또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여유를 가져야 합니다.”

에머슨의 시 ‘성공이란 무엇인가’엔 이런 구절이 있다. “아름다움을 식별할 줄 알며 다른 사람에게서 최선의 것을 발견하는 것 … 이것이 진정한 성공이다.” 그의 버킷 리스트도 주로 사진과 연관된 것들이다. ▶사진 좀 그만 찍으라는 아내의 잔소리에서 벗어난 해외 출사 ▶카메라 없이 떠나는 아내와의 스위스 여행 ▶언젠가 자신처럼 취미로 사진을 배운 아내와 함께 떠나는 해외 출사 ▶사진 작업 하는 작은 공간의 확보 등이 그것이다. “아내도 카메라를 메고 떠나는 출사 여행은 아내가 원치 않아 쉽지 않을 거예요. 쉽게 이뤄지지 않을 것이기에 버킷리스트죠.”

그는 집에 와서까지 사진 작업을 하는 자신을 못마땅해 하는 아내에 대해 원자력 발전에서 중성자를 흡수, 폭발하지 않고 연쇄반응이 적당히 일어나도록 하는 모더레이터 같은 존재라고 말했다. “이렇게 생각하면 배우자의 잔소리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아내에게 내 인생의 모더레이터 역할을 맡기고 나아가 기대할 수 있죠.”

그가 선임 부장이었던 시절 강의 차 연구원을 찾은 ‘변화경영 전문가’ 고 구본형씨는 일찍이 그가 사진을 찍는 2막 인생을 준비할 수 있도록 자극을 줬다. “좋아하는 활동, 잘하는 것을 앞으로 내가 할 일로 발전시켜 보라고 했죠. 그분 덕에 평생 제가 종사한 과학과 사진 예술 간의 융합을 시도해 볼 수 있게 됐어요.”

그는 일주일에 이틀 근무하는 비상근직이다. 일찍이 그는 두 번 정년퇴임했다. 61세 때 지금 몸담고 있는 표준과학연구원에서 부원장(선임본부장)으로 정년을 맞았고, 그 후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로 옮겨 65세에 교무처장으로 다시 정년퇴임했다. 그는 경기중고·서울대·카이스트 출신이다. 경기중 졸업 후 그는 경기고로의 동계진학에 실패했다. 생애 첫 좌절이었다. 내성적·부정적이고 다소 어두웠던 그는 재수학원에 다닌 1년 동안 긍정적인 성격으로 바뀌었다. 그 1년간 학원의 수학 선생님은 그를 격려했다. 1년 후 경기고에 진학한 그는 중학교 1년 후배들과 공부했지만 대부분 그가 재수생인 줄 몰랐다. 그 시절 친구 열다섯 명과 그는 지금도 만난다. 오세정 서울대 총장이 그중 한 사람이다. “그 후 저도 힘들어하는 사람들을 보면 격려를 하려 애씁니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지 않습니까?”

배우자는 인생의 모더레이터

영남대 전임강사로 있다 떠난 미 노스웨스턴대 박사과정 유학 생활은 엘리트 코스를 밟은 그로서도 만만치 않았다. 언어 장벽은 높았고 잘난 사람은 많고 많았다. 나이가 많았던 지도교수 웨이버 교수는 그가 힘들어 좌절할 때마다 “세상이 끝난 게 아니다(It’s not the end of the world)”라고 격려했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게 마련인데 그땐 여유가 없어 미처 못 봤던 거죠. 이분은 또 박사학위란 새로운 연구를 독립적으로 할 수 있는 면허증이라고 말씀하셨어요.”

그는 인생 2막도 제대로 준비하려면 1만 시간을 투입해야 한다고 말한다. “하루 3시간씩 투자한다면 10년의 세월입니다. 제가 그동안 사진에 그 정도 시간을 썼습니다.” 그는 이번에 일본 정부가 우리 기업에 대한 수출을 규제한 초고순도불화수소(에칭가스) 등을 우리가 확보하지 못한 데는 정부와 우리나라 대기업 탓도 있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의 대응은 분명 잘못됐지만, 그에 앞서 우리가 일본 업체를 믿고 이런 상황에 대비하지 못했습니다. 그동안 반도체 관련 소재·부품·장비를 국내 중소기업이 개발하면 대기업이 가져다 개발을 중단시킨 후 계속 일본 제품을 사용했어요. 중기가 개발한 기술을 대기업들이 사실상 탈취한 셈이죠. 중기·대기업 간 상생이 안 됐던 겁니다. 반면 일본은 이런 중소기업의 성장을 대기업이 받쳐줬어요.”

그는 남다른 창의성이 요구되는 이 시대엔 과학자들이 새로운 연구 프로젝트를 기획할 때 예술이나 인문학을 전공한 아트 디렉터를 참여시킬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연구 잘하는 사람들만 모이면 연구의 효율성은 높겠지만 도전적인 연구가 잘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있어요. 성공하는 연구만 하려들기 때문이죠. 반면 예술·인문 전공자는 기술 이전에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요. 그 비전을 실현할 기술을 과학자들이 개발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들 예술·인문 전공자가 프로젝트에 참여하면 다소 엉뚱해 보이는 질문도 던지고 무엇보다 ‘왜’라는 질문을 할 수 있게 해야 합니다. 그럴 때 분야 간에 융합이 일어나고 연구의 지경이 넓어집니다.”

1495호 (2019.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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