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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8) 효종과 양송(兩宋), 원하는 것을 얻는 방법] 인재를 원하면 그가 원하는 걸 내줘야 

 

효종, 송시열(이조판서)·송준길(대사헌) 파격 임명… 왕권 확립, 왕위 계승 정당성 확보

▎사진:일러스트 김회룡
양송(兩宋). 17세기 조선의 성리학자이자 정치가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함께 부르는 말이다. 서인의 리더로 정계와 학계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두 사람은 인조 대에 처음으로 관직을 제수 받은 이후 한동안 조정에 출사하지 않았다. 인조가 청 태종 홍타시에게 머리를 조아려 항복함으로써 권위를 상실한 데다 간신 김자점이 전횡을 휘두르는 등 뜻을 펼칠 수 없는 상황이라고 판단한 것이다.

효종의 간청에도 양송은 요지부동

하지만 인조가 죽고 김자점이 몰락한 후에도 양송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는다. 효종이 즉위하자마자 두 사람을 부른 이래, 수십 여 차례에 걸쳐 벼슬을 내리고 조정에 나올 것을 요청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명예직을 맡거나 형식적으로 잠시 올라왔을 뿐, 효종이 “그대의 재주는 나라를 함께 다스릴 만한데 오직 물러가기만을 생각하니 어떻게 하면 그대를 머무르게 할 수 있겠는가?”(효종 즉위년 10월 6일 진선을 사직하는 송시열에게). “그대의 굳은 사양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이는 나의 정성이 부족해서일 것이다. 진실로 얼굴을 들기 부끄럽다. 그대는 나의 지극한 뜻을 깊이 헤아리고 부디 올라오라.”(효종 6년 11월 16일 동부승지를 사양한 송준길에게). 이렇게 간청했지만 요지부동이었다.

이쯤 되면 효종도 언짢았을 것이다. 임금이 사정하는 데 신하라는 사람들이 들은 척도 하지 않으니 말이다. 아무리 상대방에게 호감을 가졌어도 계속 거절을 당하면 불쾌한 법이다. 두 사람에 대한 관심을 진즉에 접어버리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효종은 멈추지 않고 두 사람을 불렀다. 계속 벼슬을 높여가며 두 사람을 중용하고자 했다. 도대체 왜 그랬던 것일까?

효종은 양송이 꼭 필요했다. 능력도 능력이지만 왕권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두 사람의 도움이 절실했다. 효종은 두 가지 핸디캡을 안은 채 보위에 올랐는데 첫째, 아버지 인조가 명나라와의 의리를 지키지 못하고 ‘오랑캐’인 청나라에 굴복했다는 점이다. 멸망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하고 백성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지만 “천지가 단절되고 윤리가 무너졌으니 중화의 문물을 이제 다시는 볼 수 없구나”라는 장현광의 한탄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사림은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다.

이 때 김상헌이 임금에게 고하지도 않고 조정을 떠나버리고 많은 유학자가 출사를 포기했는데, 선비의 도를 펼칠 수 없는 세상이 되었으므로 관직에 나서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임금과 왕실의 권위 역시 크게 실추되었고 효종은 이를 타개하기 위해 양송을 부른 것이다. 반청(反淸) 이념과 성리학적 대의명분을 상징하는 두 사람이 조정에 나온다면 자연스레 사림의 지지를 확보할 수 있으리라 여긴 것이다.

둘째, 유교 예법상 효종의 왕위 승계에 문제가 있었다. 인조의 맏아들이자 효종의 친형인 소현세자가 급서하여 그가 보위를 계승하긴 했지만 소현세자의 적장자 ‘원손(元孫)’이 엄연히 살아있었기 때문이다. 집안의 법통이든 왕실의 법통이든 적장자가 죽으면 적장손이 이어가는 것이 원칙이다. 따라서 원손을 제치고 둘째 아들인 효종이 왕이 된 것은 예법에 배치된다(바로 이 문제 때문에 훗날 ‘예송논쟁’이 발생하는데, 이 때 송시열과 송준길은 효종이 ‘체이부정(體而不正)’에 해당한다며 왕위를 이었지만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라고 규정했다). 이로 인한 정당성의 흠결을 극복하기 위하여 양송이 필요했다고 볼 수 있다. 명실상부하게 예학의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던 송시열과 송준길이 관직에 나선다면 이 문제 또한 극복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양송은 쉽게 움직이지 않았고 효종은 마침내 결단을 내린다. 효종 9년 9월 18일 송시열을 이조판서, 송준길을 대사헌으로 임명한 것이다. 과거시험 복시(覆試, 2차시험)와 전시(展試, 3차 최종시험)를 치루지 않은 사람에게 장관급 직위를 내린 것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보기 힘든 사례이다. 게다가 핵심 권력인 인사권과 감찰권까지 내어준 것이다. 이전에 제수했던 관직과는 차원이 다른 것으로 양송이 자신들의 원하는 정치를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것이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이러한 왕의 제안을 받아들여 조정에 출사했고 이듬해 효종이 승하할 때까지 복무하게 된다.

이처럼 세 사람이 타협을 이루기 직전, 효종은 양송과 중요한 담판을 벌인다. 효종 9년 9월 1일과 9월 9일에 이루어진 대화를 보자. 1일 어전에 든 양송은 효종을 보자마자 비판하는 말을 꺼냈다. “지난 일은 어쩔 수 없습니다만 앞으로는 마음을 힘들여 쓰고 생각을 자제하소서.”(송준길) “얼마 전 경연 석상에서 분부하시기를 ‘오늘날 씻기 어려운 수치가 있는데, 신하들은 이런 것은 생각지 않고 언제나 나에게 몸을 닦으라고만 권하고 있다. 이 수치를 씻지 못하고 있는데 몸을 닦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셨다 들었습니다…(중략)…진실로 몸을 먼저 닦지 않고도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다면 매우 그렇지 않습니다.”(송시열)

효종은 즉위한 이래 북벌을 기치로 내걸고 하루빨리 청나라에게 복수하여 치욕을 갚자고 독려했다. 효종이 실제로 북벌이 가능하다고 생각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구성원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는 대의명분을 내세움으로써 국가의 역량을 결집, 효과적으로 부국강병을 추진하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신하들은 효종의 기대에 부응하지 않았고 답답한 마음에 ‘지금 몸이나 수양하고 있을 때냐’며 질책한 것이다. 이에 대해 양송은 군주의 수신은 정치의 기본으로 효종 역시 먼저 수신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자(朱子, 주희)의 정치 사상’을 그대로 따라달라는 요청으로, 이어 모든 발언을 주희의 말을 인용하며 시작하고 있는 점이 잘 보여준다. 효종은 잘 알겠다며 “말하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행하기가 어려우니 경들은 마땅히 좋은 인재들을 끌어들여 국사를 도모하라”라고 대답했다. 양송의 뜻을 수용할 테니 조정에 참여하라는 것이다.

9월 9일의 담판은 보다 구체적이다. 1일의 대화가 정치의 태도, 이념 등 원론적인 주제를 다뤘다면 9일에는 개별 정책을 토론했다. 송시열과 송준길은 외교, 왕실, 국방, 백성구휼 정책, 인재 등용 등 개별 사안에 대한 의견을 피력하고 “만일 채용할 만하면 채용하소서. 신하의 거취는 말을 써주느냐, 안 써 주느냐에 달려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자신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주면 조정에 출사하겠다는 것으로, 효종은 모두 수용했다.

조정 출사의 조건 들어준 효종

양송을 얻기 위한 효종의 담판은 지나친 양보처럼 보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효종이 받아들인 양송의 제안은 조선의 지배 이념인 성리학의 가르침이었고, 양송이 제시한 정책 역시 효종의 생각과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이조판서와 대사헌이라는 핵심 요직을 내어준 것은 효종으로서도 큰 결심이라 할 수 있는데, 인재가 원하는 것을 주지 않고서 인재의 헌신을 요구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사람이 필요한 만큼 그 사람이 필요로 하는 것을 주어야 하는 것은 지금도 유효한 교훈이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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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3호 (2019.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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