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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4) 훈족 아틸라 왕 설득한 레오 1세] 적진에서 호위병도 없이 상대를 흔들다 

 

‘신의 대리인’으로 두려움 품게 만들어… 배후 상황 거론하며 협상 유리하게 이끌어

▎라파엘로의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 훈족의 지배자 아틸라는 서로마까지 점령했지만 로마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으로 군대를 되돌렸다.
‘교황 레오 1세와 회담시 훈족과 아틸라에게 나타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르’라는 미술작품이 있다. 루브르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라파엘로의 소묘다. 라파엘로는 이를 토대로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의 만남’이라는 채색 벽화도 그렸는데, 지금도 바티칸 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다. 도대체 교황 레오 1세와 아틸라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기에 라파엘로는 이 장면을 두 작품이나 그려 놓았을까?

우선 아틸라는 5세기에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훈족의 왕이다. 그는 게르마니아와 스키티아 지역을 차지하고 동로마제국을 공격했다.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후 막대한 배상금을 받고 물러난다. 아틸라는 서로마제국도 노렸는데, 451년 갈리아 지방을 침공해 여러 도시를 함락시켰다. 서로마의 명장 아이티우스에 참패를 당해 퇴각하긴 했지만 452년 다시 북부 이탈리아를 침공해온다. 이 때 아퀼레이아가 초토화됐고 베네치아·베르가모·베로나·메디올라눔(밀라노) 등 유수의 도시가 차례로 아틸라의 수중에 넘어갔다. 제국의 상징 로마마저 바람 앞의 등불과도 같은 상황이었다.

적장이 자존심 지키며 물러날 명분 제시

이에 서로마 제국의 황제 발렌티니아누스 3세는 교황 레오 1세에게 아틸라와의 화평 교섭을 부탁한다. 레오 1세는 심한 불화를 격고 있던 갈리아의 통치자 아이티우스와 알비누스를 화해시키는 등 탁월한 조정능력을 갖춘 인물이었다. 그는 교황의 권위를 강화하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면서 이탈리아 전역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는데, 이런 그가 로마를 지키고 나라를 수호하기 위해 적진으로 들어가 아틸라를 만난 것이다. 그야말로 목숨을 건 행보였다. 앞서 소개한 라파엘로의 작품은 바로 이 만남을 소재로 다룬 것이다.

그런데 레오 1세가 아틸라와 담판을 벌인 직후 아틸라는 홀연 군대를 철수시켰다.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아쉽게도 담판의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 일부의 주장처럼 레오 1세가 금은보화를 바리바리 싸들고 와서 사정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역사학계의 대다수 견해처럼 매년 공물을 주기로 약속했을 가능성이 크다. 아틸라는 침략한 나라에 주둔하지 않고 금전적 이익만 챙겨 돌아가는 행태를 보여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도 아틸라가 쉽게 물러난 것은 여전히 잘 이해 되지 않는다. 조금 더 압박했더라면 보다 많은 대가를 얻어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따라서 가능한 추론은 아틸라가 군사를 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리라는 것이다. 당시 아틸라는 1년 전 자신을 패배시켰던 갈리아 주둔군 총사령관 아이티우스를 서쪽 배후에, 무시하기 힘든 군사력을 가진 동로마제국을 동쪽 배후에 두고 있었다. 만약 이들이 뒤에서 공격해오거나 비어있는 훈족의 본거지를 친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에 빠질 수 있었다. 전염병이 유행하고 식량이 떨어진 것도 고민거리였다. 이런 아틸라에게 레오 1세는 자존심을 지키며 물러날 수 있는 계기를 준 것이다.

이 밖에도 레오 1세는 최고 종교지도자라는 지위를 이용해 아틸라에게 초월적인 두려움을 심어준 것 같다. 그는 서고트의 초대 왕 알라리크가 3일에 걸쳐 로마를 약탈하고 얼마 뒤 폭풍우를 만나 죽은 것을 거론하며 아틸라에 신의 재앙을 경고했다고 한다. 하늘에서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가 나타나 아틸라에게 칼을 겨눴고(아틸라의 눈에만 보였다), 겁에 질린 아틸라가 퇴각했다는 라파엘로의 그림도 이 이야기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본래 훈족과 같은 중앙아시아계 유목민족들은 탱그리라 불리는 하늘신과 이를 인간세상과 매개해주는 무당에 대한 의존도가 강하다. 자신들이 생각하기에 서유럽에서 같은 역할을 하는 교황이 직접 찾아와 하늘의 분노를 운운하고 있으니, 아틸라의 입장에서는 내심 걱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455년 반달왕국의 왕 가이세리크가 로마를 침공해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이때에도 레오 1세가 홀로 가이세리크와 담판을 벌였는데, 로마에 대한 약탈을 막지는 못했지만 로마인을 죽이거나 로마의 건물을 파괴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가톨릭의 최고 성직자라는 위치와 죽음을 무서워하지 않는 용기가 적에게도 경외의 마음을 갖게 만든 것이다.

이상 교황 레오 1세의 사례는 담판에서 유념해야 할 중요한 교훈들을 전해준다. 첫째, 상대편의 마음을 흔드는 것이다. 담판이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관철하기 위한 냉정하고 치열한 계산의 장이라고 해도 결국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감동을 주든, 두려움을 갖게 만들든 상대편의 평정심을 흔들어놔야 유리한 결과를 얻어낼 수 있다. 레오 1세는 호위병 하나 거느리지 않고 적진으로 들어가 적군의 군주와 당당하게 마주했다. 서유럽 사람들이 자신의 이름만 들어도 공포에 떨던 그 때 홀로 태연자약하게 자신 앞에 서 있는 레오 1세의 모습에 아틸라도, 가이 세리크도 감탄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신의 대리인’, 즉 교황이라는 그의 지위와 겹쳐지면서 더 큰 파급효과를 가져온다. 레오 1세가 경고하는 ‘신의 재앙’이 사실일지도 모르겠다는 두려움이 드는 것이다. 아틸라의 양보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상대의 감정·상황·패턴을 효과적으로 이용

물론 상대편의 마음을 흔들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를 얻어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둘째, 상대방이 처한 상황과 그의 성향을 적절하게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앞서 소개한 바와 같이 아틸라는 배후에 동로마제국과 아이티우스라는 강력한 적을 두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의 신하인 아이티우스의 경우 아틸라를 공격할 가능성이 매우 컸다. 여기에 식량이 떨어지고 전염병까지 유행하고 있었으니, 아틸라의 조바심은 극도에 달했을 것이다.

상황이 이와 같다면 선택지는 전쟁을 그만두고 회군하든지, 아니면 총공격을 감행해 전쟁을 빨리 끝내든지 둘 중에 하나다. 따라서 레오 1세로서는 후자가 되는 일을 막고 전자로 유도해야 했는데, 시간을 지연시켰다가는 자칫 아틸라가 이판사판이라며 로마로 진격해 들어올 가능성이 컸다. 그래서 위험을 무릅쓰고 신속히 아틸라의 진영으로 찾아간 것이다. 그러면서 그동안 아틸라가 다른 지역을 공격할 때 점령을 하고 거기에 주둔하기 보다는 복종 약속을 받아낸 후 물러나는 패턴을 보였다는 점을 감안,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제안을 했다(그런데 이 때 레오 1세와 아틸라는 협상결과를 문서로 남기지 않았다. 양쪽 모두 이 약속에 대한 의지나 신뢰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로마제국의 복종을 받아냈다는, 아틸라가 자존심을 지키며 후퇴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해 담판을 성공으로 이끈 것이다. 지극히 불리한 상황임에도 상대방의 감정과 상황, 패턴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례라 할 수 있다.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17호 (2020.0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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