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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빌리티 혁명이 답보하는 이유] “어딜 감히”에 사축(社蓄) 되어 가는 혁신 인력 

 

기성사회 벽 부딪힌 ‘서비스 모빌리티’… 변화 거부는 미래에 빚지는 일

▎2019년 10월 29일자. 박용석 만평 ‘못 타다’
농부는 밭을 갈아엎어 혼돈을 불러온다. 흙과 생명의 생태계에서 이 들러 엎는 일, 그러니까 전복(disruption)적 활동은 새로운 순환을 가져온다. 일종의 ‘와해성(disruptive) 혁신’이다. 하지만 밭이란 다른 생명체의 생태계이기 때문에 저지를 수 있는 일이다. 사람들은 좀처럼 자신의 삶을 갈아엎는 일을 하지 못한다.

인간은 그리고 그 인간이 모인 조직이나 사회는 보통 외래물에 의한 변화를 극도로 싫어한다. 어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 반복되는 역사다. 고전의 기록을 찾아 읽지 않더라도 회사만 다녀 보면 그 느낌을 알 수 있다.

조직에 새로 들어온 이의 눈에는 현재의 부조리가 보통 한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많은 신입들은 조직의 기세에 눌려 입을 다문다. 또는 그 불합리가 자신이 준비되어 있지 않아 느끼는 착시라고 애써 여겨보기도 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 조직의 분위기에 동화되고 길들어가면서 세월과 함께 자신도 기득권이 되어 간다.

조직의 부조리가 자본주의 신진대사 막아

하지만 낭중지추 같은 존재는 특정 확률로 출현하곤 한다. 이들은 조직에 팽배한 모순을 정리해 볼 용기를 내기도 한다. 그것은 관습과 관례를 바꿔 보자는 제안일 때도 있고, 신산업의 아이디어일 때도 있고, 척결해야 할 비리를 지적하는 일일 때도 있다. 딱딱한 밭에 괭이를 박아 넣듯, 틈이 생기고 새로운 생명의 기운이 스며든다.

그리고 정말 그곳에서 미래의 싹이 트기도 한다. 모두 놀란다. 아니 이렇게 신참이 변화를 가져오다니! 그리고 이 변화에 기뻐하는 이들도 적잖이 생긴다. 그렇게 모두 미래를 함께 열어갔다.

뭐 이런 해피엔딩이면 좋겠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변화는 불편한 일이기 때문이다. 갑자기 튀듯이 혼자 잘해서 성과를 너무 올리면 표정이 어두워지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묵묵히 과거의 방식대로 일해 온 이는 이 낯선 시도에 상처를 받기도 한다. 그리고 그 고참 중에는 여러 사정상 조직 내 영향력이 큰 인물도 있다.

급기야 그들이 행여 삐치기라도 할까 봐 미리 새싹을 밟아 놓기도 한다. ‘분위기 파악을 하라’거나 ‘물을 흐리지 말라’거나 알아듣기 쉽게 귀띔을 준다. 너무 튄다면 조용히 따로 불러 “젊고 앞길이 밝은 자네가 양보하고 비켜주는 편이 모두를 위해 좋은 일”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눈치 없이 대든다면 여기를 나가 어느 조직을 가도 비슷한 이야기를 듣도록 해줄 수 있다고 나지막이 엄포를 놓는 마당발도 있다.

이처럼 인간 조직을 뭉쳐 놓는 나름의 질서는 질기다. 제 각자의 사정과 사연이 녹아 있는 이 현존 문화나 제도가 무너지는 일은 거북하다. 그것이 설령 미래를 열어 준다고 하더라도 당혹스러워한다. 모처럼 모두가 불평불만 없이 지켜온 사회적 약속. 이를 깨부순 악동에 먼저 나서서 눈을 흘기기도 한다. 내가 확보해 둔 소박하지만 평온한 오늘은 모두의 미래보다 중요한 법이다.

변화로 인해 유저가 기뻐하고 소비자가 즐거워하고 시민이 환희한다고 해도 “아니 이렇게 간단하게 바뀔 수 있는 것이었어?”라는 생각이 들게 한다면 그것은 지금까지 구태의연하게 해왔던 이들의 체면을 구기는 일이다. 어느 조직이나 고객을, 소비자를, 시민을 위한다 말하지만 분위기 파악 못 하는 유별난 풋내기가 눈치 없는 행동을 하는 것부터 우선 막아야 한다.

이처럼 흔하디흔한 사내 정치는 그렇게 하나둘 모난 돌도 둥글게 만들어 버린다. 이렇게 튀는 일은 피곤하고 그렇게 해서 얻어낼 수 있는 것의 실현 가능성이 낮을 때 구성원들은 자기효능감을 잃고 사축(社蓄)이 되어 간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런 이들이 모여 변화를 잊어버린 기업은 결국 오래가지 못한다는 점이다. 미래를 목격한 이들은 홀연히 떠나갈 것이며, 과거를 붙잡고 늘어져 있는 이들은 쇠락하는 조직과 함께 서서히 가라앉을 테니까. 이것이 자본주의의 신진대사다.

하지만 문제는 이 대사 과정조차 제대로 듣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이다. 바로 국가 단위의 분해와 재조합이 필요한 경우다. 좋은 예가 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는 또 한 번의 밭갈이가 시작되고 있다. 바로 ‘서비스로서의 모빌리티(Mobility as a Service, MaaS)’라는 테마인데, 택시니 버스니 지하철이니 자가용이니 모든 교통수단이 구분되지 않고 모두 하나의 서비스가 된다는 이야기다.

다양한 교통 선택지를 조합해 사용자에게 최적의 경로를 제공한다. 미래에는 어디에 가고 싶은지 앱에서 ‘길찾기’ 하면 다양한 선택지를 조합해 최적의 루트를 산출하고 알아서 결제 및 예약까지 될 터이다. 아마도 도심보다는 과소지역·격오지가 되어 가는 지방에서 유용할 것이다. 특히 소유하지 않고 필요할 때 손쉽게 불러낼 수 있는 승차 공유 서비스가 중요한 축으로 기대된다.

구체적으로 ‘CASE(Connected, Autonomous, Shared, Electric)’라 부르는 미래다. 재계에선 연결된 스마트 탈 것, 자율 주행, 승차 공유, 전기 구동이 이 미래를 열어 갈 것으로 본다. 할부로 산 신차를 평일에 세워두고 지하철로 출퇴근 하는 대신, 앞으로는 월정액 구독료를 내고 날마다의 생활방식에 따라 마음껏 여러 탈 것을 골라 타게 될 수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집 앞까지 편리하게 오가는 다양한 방편이 생기니 역세권의 메리트도 사라져 부동산 시장마저 변화시킬 수 있다. 이처럼 모든 혼돈에서는 희망도 싹튼다.

하지만 이는 법이라는 인간의 코드가 기계의 코드에 의해 어느 정도 대체될 수 있다는 낙관에 의해 시작된다. 즉, 큰 제도적 변화를 전제로 한다. 하지만 기성 사회는 각종 모빌리티 새내기의 새로운 시도에 여전히 “왜 너는 튀니, 왜 너는 남들 하는 대로 하지 않니”라며 면박만 주고 있다.

‘서비스로서의 모빌리티’가 부동산 시장까지 변화

새로운 이들은 완벽하지 않다. 새롭기에 미숙하고 못난 면도 더 많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새롭기에 변화를 일으키고 생태계에 진화의 압력을 가져온다. 이들을 “어딜 감히!”라고 밟을 수는 있지만, 현상을 유지하기 위해 자생적 변화를 거부하면 결국 어떻게 되는지를 인간의 역사는 수도 없이 반복하며 목격해 왔다.

하지만 사회의 늙은 리더들은 자신의 임기나 생애가 어제와 같이 평온히 지나가기를 바란다. 형님 동생하며 지내온 이들의 체면을 구겨 원성을 사기 싫다. 사회에 만연한 권위주의는 이처럼 인간 심리의 동조압력을 잘 활용해 과거와 오늘을 지켜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대가로 미래를 유보하곤 한다.

“역시 남들 하는 대로 살아야 해”, “이 나라에서는 분위기를 깨면 살아남을 수 없어” 점점 더 많은 이들이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된다면 그 사회의 미래는 뻔하다. 사회란 일개 기업과 달라 탈출하기도 쉽지 않고 깨끗이 망해 버려 손절할 수도 없다. 다만 미래가 두고두고 그 빚을 갚아나가야 할 뿐이다.

- 김국현 IT칼럼니스트(에디토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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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8호 (2020.0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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