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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으로 읽는 경제원리] 당신의 ‘케렌시아’는 어디입니까 

 

투우의 마지막 휴식처… 사무실 책상 꾸미는 ‘데스크테리어(deskterior)족’ 늘어

▎사진:© gettyimagesbank
칵테일 ‘오후의 죽음(Death in the afternoon)’은 일명 헤밍웨이 샴페인이라고 불린다. 고급술인 샴페인과 독주인 압생트를 섞어 만들었다. 일본만화 [바텐더]에서 주인공인 사사쿠라 류는 “샴페인은 삶, 압생트는 죽음”이라고 비유했다. ‘오후의 죽음’은 투우 경기를 의미한다. 투우경기는 보통 오후 5시나 5시반에 시작되고, 소의 죽음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헤밍웨이는 아파쇼나토(투우 마니아)였다. 그는 1500만 마리의 소가 죽는 모습을 봤다. 헤밍웨이는 1932년 투우에 대한 방대한 기록물을 남겼다. 그 글이 [오후의 죽음]이다.

투우경기엔 소만 죽지 않는다. 소에 받혀 먼저 말이 죽고, 자칫하면 투우사도 죽는다. 헤밍웨이는 투우란 ‘인간에 의해 연출되는 소의 죽음’이라고 했다. 투우 경기는 소와 투우사의 1대1 대결이 아니다. 피카도르, 반데리예로, 마타도르 등 수많은 사람이 등장하고 과거 사람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소만을 선택한다. 헤밍웨이는 “미국인이나 영국인은 스포츠로 생각할 수 없을 것”이라며 정당한 대결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밍웨이는 투우를 사랑했다. 투우의 무엇이 헤밍웨이를 사로 잡았을까.

헤밍웨이는 투우 경기에서 무엇을 보았나

“전쟁이 끝난 뒤인지라, 삶과 죽음 다시말하면 격렬한 죽음을 볼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투우장 뿐이었다.” 헤밍웨이는 자신이 투우를 보러 스페인으로 간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헤밍웨이는 가장 단순한 사물로부터 글쓰기를 시작하고 싶었다. 모든 사물 중에서 가장 단순한 것 중 하나가 격렬한 죽음이었고, 격렬한 죽음의 대표적인 사례가 투우였다.

[오후의 죽음]은 투우 마니아가 남긴 투우 가이드북 같은 글이다. 투우 경기의 등장인물과 경기규칙, 역대 투우 경기와 역대 투우사, 관람을 추천하는 시점과 장소, 투우를 관람하는 방법, 심지어 투우에 적합한 소를 키우는 방법과 고르는 방법까지 촘촘히 기록돼 있다. 이에 따르면 투우 경기는 3막으로 구성돼 있다. 제1막은 소가 피카도르를 공격하는 것이다. 암흑의 방에 갖혀있다 빛을 보고 튀어나와 흥분한 소를 말을 탄 피카도르가 창으로 찌른다. 제2막에서는 반데리예로가 네 쌍의 반데리야(일종의 작살)를 소의 어깨에 꽃는다. 상처를 입은 소의 기력이 빠지고 돌진하는 속력은 느려진다. 제3막은 죽음의 막이다. 마타도르가 물레타(막대기에 붉은천을 감은 것)를 흔들어 소를 몇번 통과시키면 소의 다리가 풀린다. 이때 마타도르는 긴 칼로 찔러 소의 동맥을 잘라 죽인다. 소가 죽기전, 헤밍웨이가 주목한 장면이 있다. 궁지에 몰린 소는 자신의 죽음을 직감한 듯 마지막 휴식처를 찾는다. 그곳이 ‘케렌시아(Querencia)’다. 헤밍웨이는 케렌시아를 이렇게 설명한다. “케렌시아는 소가 가고 싶어하는 링안의 일정한 곳을 말한다. 소가 좋아하는 곳이다. 그러나 장소가 고정돼 있진 않다. 투우 중 자신의 집으로 삼게된다.”

대부분의 소는 자신이 들어온 문과 투우장의 벽을 케렌시아로 삼는다고 한다. 그곳이 가장 낯익기 때문이다. 등에 기댈 것이 있어서 뒤쪽에서 공격당하는 것을 염려하지 되지 않아도 된다는 이점도 있다. 어떤 소는 투우 중 자신이 말을 죽였던 곳을 케렌시아로 삼기도 한다. 자신이 어떤 성공을 거둔 자랑스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혹은 투우사를 한번 들이받았던 곳을 택하기도 한다. 이유 없이 링의 한 곳을 정하는 경우도 있다. 특이한 것은 케렌시아에 쉬고 있는 소를 투우사가 공격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는 것이다. 소는 철저한 방어자세이기 때문에 섣불리 공격하다가는 오히려 반격을 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들이 케렌시아로 갈 때 투우사는 꼿꼿이 서서 소가 지나가도록 통과시킨다고 한다. 그때는 아무리 가까이 지나가도 자신을 공격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라다’라는 뜻의 동사 ‘querer(케레르)’에서 나온 케렌시아는 투우를 통해 피난처, 안식처, 귀소본능, 귀소본능의 장소 등을 의미하는 단어로 굳어졌다. 현대적인 의미로는 ‘스트레스와 피로를 풀며 안정을 취할 수 있는 공간, 또는 그런 공간을 찾는 경향’으로 의미가 확장됐다. 일상에 지친 현대인들은 잠시 숨고르기를 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필요한데, 그곳이 소가 잠시 숨을 고른 뒤 다음 싸움을 준비하는 케렌시아와 닮았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케렌시아는 내 방이다.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는 나만의 공간은 재충전을 위한 최고의 공간이다. 퇴근길 한잔이 생각나 들르는 동네 포장마차도 케렌시아가 될 수 있다. 여유있게 아메리카노 한 잔을 즐길 수 있는 동네 카페나 조용히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미술관, 조용한 심야영화관를 케렌시아로 삼는 사람도 있다. 잠시 짬을 내 휴식을 취하는 케렌시아도 있다. 점심시간을 이용해 짧은 휴식을 할 수 있는 코인노래방, 수면카페, 안마카페 등 1인 휴식공간은 최근 인기다. 누적된 스트레스를 한 방에 날려버리는 해외여행도 따지고 보면 나만의 케렌시아다. 부모님이 살고 계시는 고향이나 나의 추억이 서려있는 동네도 케렌시아가 될 수 있다.

더 편히 쉬고 싶은 나만의 장소 확보 욕구

더 편히 쉬고 싶은만큼 나만의 장소를 꾸미고 싶은 욕구가 생긴다. 식물로 실내를 꾸며 공기정화와 심리적 안정 효과를 함께 얻는 나만의 숲, ‘플랜테리어(planterior)’가 주목받는 이유다. 사무실 책상 위를 예쁘게 꾸미는 ‘데스크테리어(deskterior)’도 생겨났다. 장시간 근무해야 하는 회사 사무실을 자신의 취향에 맞게 꾸며 심리적 안정감을 갖고 싶어서다. 최근 들어 무드등, 향수, 컴퓨터 주변기기 등 데스크테리어용품 매출액이 급증하고 있다. 이런 것을 사는 사람을 테스크테리어족이라고 부른다. 취업포털 잡코리아의 2017년 설문조사를 보면 직장인 10명 중 7명은 데스크테리어에 관심이 있다고 밝혔다. 마케터들은 이같은 트렌드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최근 들어 ‘케렌시아’라는 이름이 붙은 아파트가 부쩍 많아졌다. 침대와 가구 등 인테리어는 ‘케렌시아’ 스타일을 강조한다.

비단 헤밍웨이 뿐 아니다. 투우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아왔다. 슈퍼카를 제조하는 람보르기니의 심볼 ‘토로’는 이탈리아어로 ‘투우’를 의미한다. 대표 슈퍼카인 미우라(Miura)는 투우사들이 가장 상대하기 힘들다는 투우 품종인 미우라에서 이름을 따왔다. 슈퍼카 이즐레로(Islero)는 1947년 투우사마누엘 로드리게즈를 죽인 미우라 황소의 이름이다. 헤밍웨이는 투우를 소에 대한 사형집행과 같다고 봤다. 그래서 제1막은 재판, 제2막은 선고, 제3막은 집행이라고 표현했다. 스페인에서는 투우사가 칼로 소를 죽이는 마지막 순간을 ‘진리의 순간’라고 부르며 숭고한 의미를 부여한다.

하지만 죄 없는 소를 잔인하게 죽인다는 비판론이 커지면서 투우는 존폐의 기로에 섰다. 스페인 카탈루냐 주정부는 2012년 투우를 금지했지만 2016년 스페인 헌법재판소는 “투우는 문화유산의 하나”라며 반박했다. 투우 미래는 어떻게 될까.

- 박병률 경향신문 기자

1521호 (2020.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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