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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총 변수(3) - 전자투표제] 소액주주 힘 키우는 ‘게임 체인저’ 될까 

 

지분싸움 치열한 한진 주총서 역할 주목… 참여율 저조, 의사 전달 한계도

▎사진 : 한국예탁결제원 전자투표시스템 홈페이지 캡쳐
지난해 3월 20일. 삼성전자 서초사옥 근처에 1000여명의 사람들이 몰렸다. 삼성전자 주주총회(주총)에 참석하기 위해 모인 주주들이다. 이들은 미세먼지를 참아가며 1시간 넘게 기다린 뒤에야 입장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기존에 준비했던 400석 규모의 회의장이 작을 것으로 예상해 2배 규모의 홀을 준비했지만, 이마저도 부족했다. 입장을 포기하고 돌아간 사람들도 상당수였다. 불편을 겪은 주주들의 항의는 한동안 이어졌다. 삼성전자는 입장 지연에 대해 긴급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올해는 이런 혼란이 줄어들 전망이다. ‘주주총회 대란’을 겪었던 삼성전자가 올해부터 주주총회에서 전자투표제를 도입하기로 한 것이다. 전자투표제도는 주주가 주총장에 직접 가지 않아도 온라인 전자투표를 통해 의결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한 제도다. 삼성전자의 주주구성을 살펴보면 2017년 12월 기준 소액주주가 14만4283명이었는데, 2019년 9월 기준 60만6447명까지 늘었다. 주주권 행사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늘면서 곤욕을 치렀던 삼성전자에 전자투표제 도입은 피할 수 없는 결과였다는 해석이 나온다. 삼성전자는 “주주들의 편의를 위해 전자투표제를 도입한다”고 밝혔다.

현대차그룹도 상장계열사 전체에 전자투표를 확대한다고 밝혔다. 현대차, 기아차, 현대모비스 등 9개 상장 계열사가 올해 전자투표제를 도입한다. 이미 SK, 신세계, CJ, 포스코 등의 그룹은 전자투표제를 시행 중이다. 전자투표제가 도입되면 소액주주들도 손쉽게 주주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길이 생긴다. 주주총회 전자투표 시대의 막이 본격적으로 오른 셈이다.

미적대던 기업들 섀도보팅 폐지되자 태세 전환


국내 주총에 전자투표제가 처음 도입된 건 2010년 5월. 하지만 당시 도입한 기업은 거의 없었다. 소액주주들이 주총에 참가하는 걸 반기는 기업이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러 기업이 주총 개최일을 몇몇 날짜에 집중시키는 ‘슈퍼 주총데이’가 생기면서 소액주주의 권리를 막는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해 ‘슈퍼 주총데이’는 3월 29일이었다. 이날 537개사가 동시에 주총을 열었다. 3월 26일, 27일에도 각각 240개, 328개사가 주총을 진행했다. 여러 기업의 주식을 보유한 사람이 한날한시에 열리는 각사의 주총에 참여하기는 불가능했다.

기업들이 소액주주의 참여를 방치하고 있었던 배경에는 한국예탁결제원의 ‘섀도보팅(Shadow Voting·의결권 대리행사)’ 제도가 있었다. 섀도보팅은 주총장에 나오지 않는 주주의 권리를 예탁원이 대신 행사한 제도다. 주총장에서 나온 찬반 비율에 따라 주주권을 적용하는 방식이다. 중립을 지키기 위한 방법이었지만 사실상 대주주의 뜻에 휘둘렸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상법상 주주총회 보통결의 사항 요건을 보면 안건에 대해 주총장에 출석한 사람의 과반이 찬성하고, 이들이 보유한 주식 수가 전체 주식의 25% 이상이어야 통과시킬 수 있다. 문제는 주총 참석자가 보유한 주식 비중이 25%를 밑돌아도 예탁원에서 섀도보팅을 통해 표를 던지는 방식으로 정족수 기준을 채워 통과시켜준다는 데 있었다. 2017년 정기주총에서 이 제도를 이용한 기업은 전체 상장사의 33.3%에 달했다.

2017년 12월, 섀도보팅제도가 폐지되면서 국면이 달라졌다. 기업들이 전자투표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했다. 2018년 예탁원을 통해 정기 주총에서 전자투표제를 실행한 회사는 517개, 2019년엔 581개로 나타났다. 의결권을 행사한 주주는 3만6141명에서 10만6259명으로 증가했다.

올해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는 기업이 느는 것은 주주들의 권리 행사에 관한 관심 고조와 함께 코로나19 사태도 영향을 미친것으로 풀이된다. 예탁원은 지난 2월 17일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확산을 방지하고 발행사와 투자자가 전자투표를 적극 이용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겠다”며 전자투표, 전자 위임장 수수료를 한시적으로 면제한다고 밝혔다.

전자투표제 도입과 관련해 올해 주목받는 기업은 단연 한진그룹이다. 조원태 한진그룹 회장과 조현아 전 부사장의 남매간 경영권 다툼이 치열하게 진행 중인데, 양측이 보유한 지분이 비슷해 소액주주들의 선택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2020년 1월 한진칼 공개자료에 따르면 의결권 유효지분 가운데 조원태 회장을 지지하는 우호지분은 33.45% 수준이다. 조현아 전 부사장 등 반 조원태 연합이 보유한 지분은 31.98%로 추산된다. 소액주주들이 어느쪽 손을 들어주느냐에 따라 판세가 기울 전망이다.

‘반(反) 조원태’ 전선에 있는 KCGI는 한진그룹에 전자투표제도 도입을 촉구하고 나섰다. 주주 권리 강화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25%에 달하는 기타주주들을 결집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다만 재계 한 관계자는 “소액주주들이 어느 쪽을 지지할지 예상하기 어려워 전자투표 도입이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예단할 수 없다”고 말했다.

코로나19 영향으로 확대, 터키·대만은 의무화

일각에선 현재 한진그룹처럼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전자투표제의 영향력이 제한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소액주주들이 가진 지분이 많지 않기 때문이다. 예탁원 전자투표시스템 이용 현황을 보면 2019년 기준 전자투표 행사율은 총 주식의 5.04% 수준이었다. 예탁원 관계자는 “소액주주의 참여율이 낮은 것도 있지만, 보유한 주식이 적어 행사율이 낮게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현행 전자투표 방식에 대한 지적도 나온다. 의결사항의 가부를 결정하는 초보적인 수준에 머물러 전자투표의 장점을 최대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송홍선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위원은 “기술로만 보면 전자투표제가 아니라 온라인 주주총회를 실시할 수 있다”고 했다. 온라인으로 주총 상황을 생중계하고 안건 토론도 할 수 있는데 국내 대부분의 기업이 그 정도까지는 시도하지 않고 있다는 의미다. 그는 “아무래도 경영진의 입장에선 주주들의 참여로 변동성이 생기는 데 부담을 느낄 수 있어 적극적으로 소액주주 참여를 독려하지 않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해외는 어떨까. 주요 선진국은 우리나라보다 일찍 주주총회에 전자투표제도를 도입했다. 미국은 2000년, 일본은 2001년으로 한국보다 10년 정도 빨리 전자투표를 시작했다. 전자투표제가 자리 잡는데 걸린 시간도 빠른 편이다. 미국의 경우 8년 만에 전자투표를 이용하는 상장사 비율이 45%를 기록했다. 땅이 넓고 시차도 존재하는 상황에서 주총에 직접 참석할 수 없는 주주가 많아 전자투표 이용률이 높아진 것이다.

전자투표를 의무화한 나라도 있다. 터키는 2012년부터 모든 상장사가 전자투표제를 도입하도록 했다. 대만도 주주 수 1만명 이상이고 자본금이 20억 대만달러 이상인 기업들은 의무적으로 전자투표제를 도입해야 한다. 한국은 아직 전자투표제를 의무화하지 않고 있다. 다만 전자투표제가 본격화하면 의미 있는 변화가 진행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재계 관계자는 “전자투표제를 강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한 번 도입하면 다음해부터 취소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며 “더 개선된 방향으로 제도가 발전할 것”이라고 말했다.

- 이병희 기자 yi.byeonghee@joongang.co.kr

1524호 (2020.0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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