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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세기의 담판(18) 빌리 브란트, 진정의 힘을 보여주다] 미래를 연 한걸음 ‘바르샤바 크니팔’ 

 

매국노 손가락질 무릎 쓰고 진정어린 참회… 피해국 용서, 세계 신뢰 얻어내

▎1970년 빌리 브란트 당시 서독 총리가 폴란드 유대인 위령탑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죄하고 있다.
1970년 12월 7일 추적추적 비가 내리던 날. 폴란드 바르샤바의 유대인 게토(ghetto 강제 격리 거주지) 추모비 앞에서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던, 하지만 누구도 잊을 수 없었던’ 광경이 펼쳐졌다. 폴란드를 방문해 추모비에 헌화하던 서독의 총리 빌리 브란트(Willy Brandt)가 무릎을 꿇은 것이다. 전혀 기획되지 않았던, 브란트의 최측근 참모들조차 예상하지 못했던 갑작스러운 행동이었다. 브란트는 이에 대해 “말로는 더 이상 어찌할 수 없었기에 할 수 있는 행동을 했을 뿐이다”라고 밝혔다. 2차 세계대전의 가해국가로서 잘못을 반성하고 책임을 지겠다는 다짐을 그와 같은 행동으로 표현한 것이다. 이것이 소위 ‘바르샤바 크니팔’이다. 독일어로 크니팔(Kniefall)은 무릎을 꿇는다는 의미다.

바르샤바 크니팔은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서독의 초대 총리 콘라드 아데나워의 ‘서방통합정책’과 더불어 전후 서독 외교의 핵심 비전이었던 동방정책은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과의 적극적인 화해와 협력을 추구했다. 서유럽과 동유럽의 중간에 놓여있는 독일의 지정학적 위치를 고려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동방정책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과거사에 대한 정리가 선행돼야 했다. 독일은 2차 세계대전 때 동유럽 전역을 침공해 점령하고 해당 지역에 큰 고통을 안겨줬다. 특히 폴란드에게는 막대한 인적·물적 피해를 입혔다. 히틀러의 폴란드 침공이 2차 세계대전의 막을 열었고, 수백만의 폴란드인이 희생당했으며 남은 사람들도 독일의 가혹한 점령 통치를 받아야 했다. 감정의 골이 매우 깊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독일 쪽에서도 폴란드와 풀어야 할 숙제가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포츠담 회담에서 소련은 18만㎢에 이르는 폴란드 동쪽 영토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한 후, 대신 폴란드 서쪽과 맞붙어 있던 독일의 영토 10만 3000㎢를 폴란드에게 넘겼다. 이때 그어진 국경선이 오데르-나이세, 즉 오데르 강에서 나이세 강으로 이어지는 라인이다. 그리고 이 지역에서 살고 있던 수백만 명의 독일인들도 강제 추방했다.

과거사 반성, 조약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실천


▎서경덕 성신여대 교수가 2013년 월스트리트저널 인터넷 판에 ‘Making Peace With History(역사와 함께 평화를 만들자)’라는 제목으로 게재했던 독일과 일본을 비교한 광고. 왼쪽에는 폴란드에 사죄하는 독일의 메르켈 총리와 브란트 전 서독 총리. 오른쪽엔 과거 침략사를 부정하는 일본의 아소 다로 부총리, 아베 총리, 하시모토 시장. / 사진:뉴스1
따라서 독일에서는 이 땅을 되찾아야 한다는 여론이 높았다. 하여 소련의 압력을 받은 동독 정부가 1950년 해당 국경선을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서독 정부는 오랫동안 오데르-나이세 라인에 동의하지 않았다. 강제 이주된 실향민 수백만 명의 표심이 걸려있는 사안이어서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폴란드로서는 분통이 터졌으리라. 자신들이 그 땅을 빼앗은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넓은 땅을 강제로 소련에게 넘겨주지 않았는가. 그런데도 2차 대전의 가해자 독일이 영토 회복을 운운하고 있다. 아니 설령 사이가 나쁘지 않아도 그렇다. 독일에게 땅을 돌려주게 되면 국토의 1/4이 사라진다. 게다가 소련에 빼앗긴 땅에 살던 폴란드인들이 이곳으로 이주해 25년째 정착해오고 있다. 폴란드로서는 국가의 생존과 직결된,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문제였던 것이다.

빌리 브란트가 동방정책의 일환으로 폴란드와의 관계 개선을 추진했을 때, 폴란드 정부가 가장 먼저 국경선 문제 해결을 요구한 것은 그래서였다. 이에 대해 브란트는 폴란드의 요구를 전격적으로 수용한다. 사실 독일이 영토 문제를 원상회복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무리 강대국 소련이 제멋대로 한 일이라 하더라도 이를 바꾼다는 것은 ‘포츠담 회담’으로 상징되는 전후 질서를 부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패전국 독일로서는 결코 취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럼에도 국내 여론과 국가적인 자존심 때문에 명시적으로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브란트는 이러한 교착상태를 종식시키고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승인, 영구히 존중하기로 합의했다. 비록 만족스럽지 못한 부분이 있지만 그것은 과거의 잘못에 대한 대가다. 따라서 현재를 인정하고 미래를 위해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1970년 12월 서독-폴란드 간에 체결된 ‘바르샤바 조약’이다.

그런데 브란트의 폴란드 방문이 이것으로 끝났다면 전후 25년 만에 양국이 관계를 개선하는 정도에 머물렀을 것이다. 폴란드로서도 오데르-나이세 국경 문제가 타결되고 서독과의 경제협력 토대가 마련되었으니 나름 만족할만한 성과였다. 그러나 브란트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폴란드 무명 용사의 묘(우리나라로 따지면 국립현충원 충혼탑)에 참배하고 유대인 게토 추모비 앞에서 무릎을 꿇은 것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에 살던 약 3백만 명의 유대인 중 90% 가까이가 나치에게 희생된 바 있다. 브란트는 폴란드와 유대인들에게 함께 사죄의 뜻을 전하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때론 계산 없는 진정한 마음이 갈등 해결의 열쇠

이와 같은 브란트의 행동은 그가 반(反)나치 활동을 했고 히틀러의 탄압을 피해 노르웨이로 망명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는 점에서 더욱 빛을 발했다. 그의 본명은 헤베르트 에른스트 칼 프람이다. 빌리 브란트는 원래 노르웨이 망명시절 썼던 가명으로, 훗날 정식으로 개명한 것이다. 브란트의 크니팔은 나치가 저지른 범죄에 직접적인 책임이 없어도 독일인으로서 과거 독일이 저지른 과오에 책임을 지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는 또한 브란트가 독일 국민에게 보낸 메시지이기도 하다.

오데르-나이세 국경을 인정하는 바르샤바 조약이 체결되자 해당 지역 실향민들과 야당은 브란트를 독일제국의 영토를 팔아먹은 반역자로 규정하고 격렬하게 항의했다. 크니팔에 대한 여론조사에서도 서독 국민의 48%가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나치가 저지른 범죄는 과거이고 현재는 현재라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서독 국민에게 브란트는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다. 우리가 열어가야 할 새로운 미래는 과거사에 대한 진심 어린 반성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래서 어느 기자의 말마따나 “그 자신은 그럴 필요가 없었지만, 그래야 하는데도 시도하지 않았거나 시도조차 할 수 없었던 모든 이들을 위해 무릎을 꿇은 것”이고 “스스로 책임질 필요 없는 죄를 고백하고 스스로 필요치도 않은 참회를 구한 것이다. 독일을 위해서.” 바로 이 점이 폴란드를 비롯한 세계인의 신뢰를 산 것이고, 독일인들의 마음을 변화시킨 동력이 됐다. 그리고 바르샤바 크니팔이 과거 역사적 범죄에 대한 독일의 진정 어린 참회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지금까지도 회자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외교의 장에선 치밀한 계산이 중요하다. 그러나 때로는 계산하지 않은 진정성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때가 있다. 화해·용서·신뢰는 ‘통석의 념’ 같은 립 서비스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정치적 이해관계가 아니라 마음과 감정을 나눠야 하는 것이니까. 빌리 브란트가 그러했듯이.

※ 필자는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다. -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같은 대학의 한국철학인문문화연구소에서 한국의 전통철학과 정치사상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경세론과 리더십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1525호 (2020.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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